김충렬 인터뷰
▲김충렬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제22장 그림자의 인식 과정과 방법(3)

그림자의 존재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림자의 인식은 개성화 과정의 첫 단계에 해당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개성화란 치료의 과정에 해당한다. 이미 그림자의 특징을 밝히는 데서 그림자의 정체는 일단 밝혀진 셈이다. 그러나 이를 자기의 인격의 부분으로 인식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어두운 인격의 부분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는 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림자를 자신의 인격의 일부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그림자의 존재를 일단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림자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다행히 그림자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특이한 방법이 있다. 우리는 그림자의 존재가 드러나는 방법을 이해해야만 한다.
    
1. 일상생활을 통한 인식

그림자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인식하기 어렵지 않다. 그림자는 인격의 어두운 특성이기에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게 되는 꼴사나운 언어나 행동, 상대방의 기분을 언짢게 만드는 행위, 그리고 보기에도 민망한 모습이나 행동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일상생활에서 드러나는 그림자의 인식은 다음과 같다.

1) 남의 탓으로 드러나는 그림자

그림자는 일상생활에서도 나타난다. 그림자의 존재는 그 특성상 우리 인격의 일부이므로 인격이 반영되는 일상생활에서 나타난다. 그림자의 나타남은 개인의 감추어진 인격의 어두운 부분과 관련되는 측면이다. 이 부분은 투사처럼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잘못의 원인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는 현상과 관련된다.

예를 들어, 부모가 아이에게 자신의 어두운 인격인 그림자를 옮기면, 그 아이는 부모의 그림자에 의해 영향을 받아 부모대신에 가족 내에서 악역을 맡는 속죄양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부모에게 의식화되지 못하거나 인식되지 못한 부모의 어두운 인격의 그림자가 생물학적 의미로서가 아니라, 심리학적으로 자식에게 어느 정도 전달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는 가정의 평화를 강조하는 생활에서 모든 가족성원들이 겉으로는 평화롭게 협동하면서도 무의식 속에 적개심을 억압하고 있는 가족의 가짜-협동성(pseudo-community)이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나중에 개인의 정신건강은 물론 가족의 건강까지도 해치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대인관계에서 갈등을 유발하는 그림자

그림자의 투사는 상호간의 불신과 반목, 증오와 갈등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그는 틀림없이 그런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을 거야!"라는 터무니없는 선입견을 서로 상대방에게 가지고 있으면, 그림자의 상호투사는 두 사람사이의 오해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든다.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투사된 그림자의 내용과 비슷한 행동을 보이면 "그것 봐, 내말이 틀림없잖아. 그는 그런 사람이야!"라고 단정을 지음으로써 투사를 강화시킨다. 이런 현상을 사회심리학에서는 '자기 충족적 예언'이라고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자신의 어두운 인격을 다른 사람에게 투영한다는 점에서 투사의 성격이 확실하다.

개인의 어두운 인격이라는 그림자는 일상생활, 특히 대인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개인은 자신이 갖고 있는 인격의 부분을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다. 다만 이를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에 따라 달려 있을 뿐이지만, 그것은 여지없이 우리의 삶에서 관계의 갈등으로 작용되는 측면이 있다.

때로 우리 자신이 남을 향하여 울분을 터트릴 때, 남을 저주하거나 심히 공격할 때, 자기의 의지와는 다르게 비사교적으로 행동할 때, 인색하고 편협하며 화를 내거나 신경질을 부릴 때, 비겁하거나 경박하며 위선적인 모습의 굴절된 모습은 모두 그림자의 존재를 반영하는 모습들이다.     

3) 극심한 분노를 유발하는 그림자

그림자의 정체는 극심한 심리적 상태와 상황에서 드러나기 쉽다. 극심한 심리적인 상태에서는 대체로 의식의 조절력이 효과적으로 작동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극심한 분노는 그림자가 드러나기 쉬운 상태로 볼 수 있다. 어떤 경우에 누가 자기의 결점을 책망할 때 억누를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면, 평소에 의식하고 있지 않는 그림자의 일부가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대단치 않은' 타인에게 비난을 받는다는 일은 짜증스런 일이 될 터인데, 이때 우리는 과도하게 대응하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되는 순간 놀라기도 하고 후회하기도 한다. 그런 행동은 아마도 자아가 타인에 의해 간파되었다는 점도 있고, 자신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던 검은 마음을 인식하였다는 의미도 있다. 이때 우리는 이를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인 양 남의 탓으로 돌리는 등의 무모한 태도를 보이므로 적절히 은폐하거나 반응하는 형태를 취하려는 것이다.

2. 꿈을 통한 인식

그림자는 꿈에서도 나타난다.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무의식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꿈은 꿈꾸는 사람의 정신적인 성격의 특성들이 의인화 및 인격화되어 꿈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꿈을 통한 그림자의 인식은 다음의 몇 가지 때문에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1) 동성(同性)의 인물로서의 형상화되는 그림자

분석심리학에서는 꿈이나 신화에서 그림자는 꿈을 꾼 사람과 동성의 인물로서 나타난다고 본다. 무의식 속에 숨겨진 개인의 정신적인 어두운 부분은 꿈으로 활성화되어 인격체로 활동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때 개인의 편견 및 습관의 문제, 때로 자신의 인격의 가면이라는 페르조나(Pesona)와 연결되면,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거나 인정할 수 없는 부분이 되기도 한다.

꿈에서 개인의 어떤 부분을 비난했다고 하면, 자신의 내면에 있는 내적인 판단에 의해 비난당한 것이다. 이는 자아가 간파당한 순간이며, 그 결과 곤혹스러운 침묵이 발생하기 마련이기에 개인은 고통에 찬 갈등을 시작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합리화를 시도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그리스의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를 떠올리게 된다. 이 불행한 영웅에게 주어진 첫 과제는 신화에 등장하는 엘리스(Elis)왕의 아우게아스의 가축의 우리를 청소하는 일이었다. 그 가축의 우리는 30년 동안이나 한 번도 청소하지 않았는데, 헤라클레스가 강물을 끌어 들여서 하루에 말끔히 청소했다는 이야기이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수용하여 엄청난 고통을 감수함으로써 이룩한 것이다.

이런 일은 꿈에서 나타난 그림자의 정체를 올바로 해석해야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것이 자신의 그림자인지를 알지 못하면, 거기에 매여 갈등하거나 고통을 당할 뿐 개선의 여지란 일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꿈에서 나타난 그림자의 존재는 그렇게 받아들여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개선하여야 성질의 것이라는 생각이다.

2) 자아에게 신호를 보내는 그림자

꿈에 나타난 그림자는 단순히 비난을 넘어 자아와 사귐을 원하는 것이다. 꿈에 나타난 그림자의 존재는 자신의 성격과 반대되어 수용하기 어려우나 자아에게 접근해보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자아가 자신의 인격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느냐의 문제는 얼마나 그림자의 존재를 인식하는 정도에 따라 달려있다. 만약 자아가 이를 수용하지 못할 경우 종종 그림자는 파괴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며, 인격의 발전을 중단시키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

만약 어느 누가 남을 지나치게 멸시하는 사람의 꿈을 꾸었다고 하자. 그러면 꿈의 타인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이라는 사실이다. 자신의 그림자가 꿈으로 형상화된 자신의 인격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것이다. 타인을 자신의 모습으로 보는 것은 꿈의 원리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꿈에 나타난 흉악한 사람의 모습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일단 자신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물론 어두운 상(像)이 꿈에 나타났을 때, 그것이 단지 그늘진 자신의 부분을 인격화하고 있는지, 또는 자신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동시에 양쪽을 모두 인격화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어두운 동반자가 극복해야만 될 결점들을 상징하는지, 또는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인생의 의미 있는 부분인지를 예측해야 한다.

이는 개성화의 과정에서 부딪히는 가장 어려운 문제이기에 치료자에게는 꿈을 계속해서 관찰하여 적절한 판단에 도달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치료자가 인격의 발전을 위하여 꿈을 분석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훈련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개인의 충동과 부주의를 통한 인식

그림자의 인식은 개인의 충동과 부주의한 행동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림자는 때로 자신이 원치 않는 개인의 충동을 유발시키거나 부주의를 유발시키는 원인이라는 점에서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로 구분하여 기술해야 한다.

1) 충동을 유발하는 그림자

그림자는 그 특성상 어두운 인격으로서 부정적인 특성을 의미한다. 사람에게 그림자가 없다면 그는 죽은 사람이거나 신(神)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열등한 성격의 측면인 그림자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장담하거나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사회집단이 요구하는 선한 마음과 행위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고 굳게 믿으면서 온갖 사회악에 대하여 연민의 정(情)을 가지거나 혹은 멸시하는 사람은 이른바, 그림자 없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그림자가 없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다. 스스로 인격자임을 자처하고 확신하면서 고매한 인격자인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이들은 위선자이거나 이중인격자, 또는 각종 신경증을 일으킬 조건아래 있는 사람이다. 무의식적인 그림자에서 자아가 단절되어 의식의 분리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이 아니므로 누구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그 그림자는 인격에서 잘못 다루면 인격의 장애를 불러일으킨다. 물론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노이로제나 정신장애가 되지는 않는다. 자기에게 그림자 따위는 없다고 자처할 때 그림자가 자신 속에 있는데 보지 않으려 할 때 그것이 바로 신경증의 온상이 되기 때문이다.

2) 비인격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그림자

그림자는 반드시 결점으로만 성립되는 존재의 특성만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인식의 수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상정하는 것이다. 이는 존재의 특성이란 일반적으로는 인식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행동에서 인식해야 하는 필요성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때 그림자는 개인의 뜻밖의 충동이나 부주의한 행위에서도 나타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은 자기도 모르게 욕설이 입에서 튀어나오든가, 원치 않는 음모가 꾸며지든가, 그릇된 결정을 내리는 등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경우이다. 이로써 개인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거나 의식적으로 전혀 바라고 있지 않은 상황의 결과에 직면하게 된다.

게다가 이런 그림자는 의식적인 인격보다도 집단적인 것에 훨씬 감염되기 쉬운 특성도 있다. 대개 사람은 혼자일 때에는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남이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나 유치한 행동을 하기에 이르러서는 생각 없이 그 대열에 끼는 경향이 있다. 그 대열에 끼지 않으면 바보 취급을 받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실제로 자기의 것이 아닌 충동에 몸을 내맡기도 만다.

자기 자신의 그림자나 타인의 그림자에 걸려 넘어지는 경우는, 특히 이성(異性)이 아닌 동성(同性)인 사람과의 접촉에서 일어난다. 이는 대개 이성의 그림자를 인정은 하지만, 그것에 의해 불쾌감을 느끼는 일은 거의 없으며 쉽게 수용하기 때문이다.
   
4. 개인적인 투사를 통한 인식  

투사(投射)는 그 특성상 감추어진 자기의 부분을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 또는 타인의 탓으로 돌리는 형태로 드러난다. 여기에 개인적인 투사는 그림자가 자아의 밑바닥에 있어서 그 존재를 의식하기가 어렵지만, 외계에 투사됨으로써 자기의 감추어진 모습이 드러나는 현상이다.

이 투사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잘 드러나게 되는데, 흔히 가까운 사람이나 동류의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개인적인 투사를 통하여 그림자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1) 대인관계를 파괴하는 그림자

투사는 개인의 관계성에서 보면, 같은 친구 사이, 형제자매간, 동료 사이, 상사와의 관계, 가족 사이, 시누이와 올케 사이에,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사실이나 상황의 정확성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근거하게 된다는 점에서다. "괜히 보기도 싫다, 거북하다, 화가 난다, 그 사람을 보기만 해도 짜증난다." 등의 표현은 투사가 일어난 것이다.

물론 싫은 이유를 물으면 분명하게 답변할 수도 있지만, 대개는 "잘난 체 한다", "너무 쌀쌀맞아서", "공연히 싫다", "주는 것 없이 밉다"는 식으로 부정적인 감정으로 채색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순히 이런 투사로 인해 대인관계의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경우도 있다.

더 나아가 이런 갈등이 노골화되어 표면화되면 본래의 투사가 더욱 강화되기 마련이기에 "역시 내가 생각한 대로 그런 종류의 사람이구나!"하고 단정을 내리게 되어 '그 사람과는 평생 말도 하지 않는 사이'가 되는 경우도 발생한다.

2) 가변적인 성질로서 투사적 그림자

투사는 항상 고정적이지는 않다는 점이 특징이다. 투사는 때로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기도 하기에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해도, 무의식에서 지향하는 보상기능에 따라 변화가 가능하다. 이런 현상은 무의식이 의식의 일방적인 평가에 수정을 가하는 기능을 지니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가능하다. 이런 그림자로 인해 사회적인 관계에서 사회적으로 선한 사람이 악한 반려자를 거느리는 경우가 있다.

그는 괜찮은 사람이지만, 참모나 비서는 고약한 사람이라든가, 청렴결백한 가난한 학자나 공무원 남편과 유능한 투기꾼 마누라와 같은 결합을 우리는 현실에서 드물지 않게 발견한다. 이는 물론 자신이 의식적으로보다는 무의식적인 결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는 어느 누가 "굉장히 나쁜 사람이다"고 생각했는데, 언젠가 그리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식으로 변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때로 원수처럼 지내는 사람과 꿈에서는 악수를 하고,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기도 하는 등 개인의 심리에 달라지는 변화가 일어난다.

이런 점에서 그림자는 개인적인 경우에서는 편견이라는 데서 나타나는 특징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런 특징은 비단 개인에게만 한정되지 않는 점에서 동일하게 생각될 여지가 있음은 물론이다.

5. 집단적인 투사를 통한 인식

그림자는 집단적인 투사를 통하여 인식이 가능해진다. 집단적인 투사는 오래도록 부정적인 시각이나 생각이 침전되어 내려온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집단적인 투사는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거쳐서 그리고 긴 세월을 통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에 축적된 정신의 특성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우리는 다음 몇 가지로 구분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1) 특정한 존재에 대한 편견을 유발하는 그림자

그림자는 그 특성이 개인을 넘어서 집단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집단에 소속한 이들은 집단에 소속한 집단적 그림자가 생기고, 이것이 다시 집단적인 편견을 강화시켜 다른 집단과 대립하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특별한 편견 없이 순수한 동기에 의해 만들어진 집단도 일단 만들어지면, 다른 집단의 그림자의 집단적 투사를 받아서 좋지 않은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집단의 활동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편견에 의해 형성되거나 배타성, 독선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때는 언제나 집단적 그림자의 형성이 가능해지고, 그 투사로 말미암은 집단 간에 불필요한 갈등이 생긴다. 정당간의 분쟁에서는 이런 그림자의 문제가 흔히 드러난다. 모든 나라의 정치운동은 소그룹이나 개인 사이에 행해지는 험담으로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투영의 투사는 자기 자신의 무의식적인 경향을 다른 사람 속에서 보는 것이다.

그러나 투영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간에 타인에 대한 견해를 혼란에 빠뜨리고, 객관성을 파괴한다. 그리고 이런 투영으로 인해서 참된 인간관계와 여러 가능성이 훼손되기도 한다. 이런 투사를 가족관계에서도 드러난다. 가족 중에 온 가족이 미워하는 구박둥이나 미운오리새끼를 만들어 내는 것도 가족성원의 그림자의 투사에서 비롯된다.

이런 경우에는 그림자의 개인적인 투사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집단적인 투사의 결과이다. 이런 과정에서 가족구성원 중에서 독특한 성격을 지닌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나머지 가족구성원들의 그림자가 무의식적으로 투사되고, 그가 그 역할을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게 되면, 가족의 희생양이 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제 때문에 되는 일이 없어", "저 애는 도대체 누굴 닮아서 저 모양이지?" 등의 표현에 바로 가족그림자의 투사로 인한 '희생양'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경우이다.

2) 유사한 특성으로 이어지는 그림자

집단적인 그림자의 투사는 개인적인 투사처럼 가까운 집단, 비슷한 성격의 집단 간에 발생한다는 점은 집단 간의 투사가 집단적인 편견에 근거하는 경우가 많다는데 기초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경상도 사람, 전라도 사람, 이북 사람 하는 식으로 집단적인 편견을 갖는 것이다. 이런 것이 개인에게 깊이 새겨지면, 도대체 변하지 않는 진리처럼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자신의 생각을 다시 바꾸려 하지 않고, 고정화시켜버리기도 한다.

이런 편견의 투사는 나아가 국가적, 인종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인과 일본인, 흑인과 백인, 동양인과 서양인 사이에도 각종 긍정적 부정적 명암을 띤 무의식적 상호 투사가 일어나서 하나의 시각이라는 관(觀)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이런 관(觀)이 모두 그림자의 투사에 의한 것으로 단정하는 것은 옳은 것만은 아니다. 자칫 관점이나 견해가 부당하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집단적 투사가 심해지면, 지역이나 민족 간에, 인종이나 종교 간의 갈등이 분쟁으로 발전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6. 이념이나 주장을 통한 인식

그림자는 특정한 이념이나 주장을 가능하게 만든다. 물론 여기서의 특정한 이념이나 주장은 대체로 종교적 신념처럼 변하기 어려운 특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대체로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특이한 이념이나 주장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객관적인 측면이나 특성보다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매우 주관적인 특성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로 구분하여 고찰할 수 있다.

1) 특정한 이념과 주장을 가능하게 만드는 그림자

그림자의 투사는 개인적인 주의주장과 이념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공산주이자의 꿈에 자본가가 도왔다는 것이나, 마귀라 비난하는 사람에게 '마귀'가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 종파간의 정통성 여부를 주장으로 하는 비판에도, 학파간의 갈등에도 그림자의 투사와 관련된다. 특별히 유명인, 즉 각종 단체를 이끄는 지도자 등은 직접적으로 투사를 받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지도자의 '이미지'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인 작용의 공동 산물이며, 그 이미지를 형성하는 큰 요소가 된다.

반면 지도자나 권위자 또는 유명인이 집단이 투사한 완벽하고 선한 인격상에 부합되지 않을 때는 정반대의 현상도 일어난다. 그 결과로 집단은 실망과 충격을 받으며, 때로는 무자비하게 그 권위자를 매도하거나 매장하고 만다. 집단의 개인의 인격을 보기보다는 투사된 그들의 그림자를 보기 때문이다.

집단은 지도자 개인의 인격을 보기보다는 투사된 그들의 그림자를 보고 있다. 투사된 그림자에 부합되는 경우에는 신격화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집단은 실망과 충격을 받으며, 때로는 무자비하게 그 권위자를 매장시켜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만다. 여기에는 마녀사냥의 예를 들 수 있다.

2) 마녀사냥과 같은 행위를 가능하게 만드는 그림자

중세에서는 마녀사냥이 있었다. '마녀'는 높은 정신적 경건성과 도덕적 금욕주의를 표방하던 중세의 신앙 깊은 사람들의 무의식에서 의식의 일방성을 보상하기를 기다려 온 본능적 충동의 표현이었다. 중세의 수도승들은 이들에게 마녀라는 낙인을 찍어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하고 불태워 죽였다.

이 마녀사냥에 조직적으로 앞장서서 일으킨 것은 중세의 귀신을 쫓는 가톨릭의 수도사인 축마사(逐魔師)였고, 이들에 합세한 민중과 교계(敎界)였다. 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억압된 본능의 투사를 조직적으로 행하는 것으로서 14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나 유럽대륙을 휩쓴 마녀사냥의 광풍(狂風)을 일으켰다.

이 마녀사냥에 대하여 의학사학자인 질보르그(Zilboorg)는 그 책이 각종 정신병리현상과 성적 내용으로 가득 찬 것임을 밝혔다고 한다. 질보르그는 이것은 기독교적인 유럽의 사회적, 정치적인 통일체에 깊이 숨은 불안의 표현이었을 것으로 보았다는 점도 특이하다.

여기에 이부영은 중세에서 르네상스에 걸친 마녀사냥은 그 당시 사람들의 의식세계에서 배제된 자유분방한 삶에의 충동, 쾌락에의 욕구, 억압된 성적 욕구의 집단투사로 본다. 이것은 획일적 율법주의, 금욕주의, 정신주의의 특징을 한 당시 사람들의 의식세계 밑에 도사리고 있던 집단적 그림자였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더 자세히 살펴보면, 마녀는 그 상시 남성들의 여성혐오, 여성학대의 표본으로서 남성들의 내적 인격인 무의식의 여성성, 아니마의 왜곡된 이미지를 대변한다고 보는 쪽이 더 합당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마녀사냥이란 중세 서양인들의 무의식에 억압되었던 색정적 그림자였으며, 이들은 자신의 그림자를 마녀로 선택한 사람들에게 뒤집어 씌웠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3) 치료에서 드러나는 그림자

그림자의 투사는 치료자를 통해서 드러난다. 치료자는 치료를 받는 내담자가 인식하지 못하는 어두운 인격의 부분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안에 어두운 인격이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남의 탓만 일삼는 내담자는 자신의 그림자를 전혀 못보고 있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타인의 잘못만을 탓하는 부부 상담이나 가족상담의 이런 일이 허다하다. 내담자는 상황을 설명하는 중에 자기의 부정적인 인격의 그림자가 드러나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정당성만을 주장한다.

내담자의 투사된 그림자를 인식하는 문제는 치료자에게 중요한 치료적 과정이나 기술적 부분에 해당한다. 내담자는 자신의 어두운 인격인 그림자의 특성을 지적하는 경우에 대개 자기의 일부분으로 인정하여 받아들이기를 꺼려한다. 이를 수용하게 하는 일은 치료적 절차에 해당하는 것이다.

분명히 치료자의 통찰력으로 내담자의 어두운 인격에 해당하는 부분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후퇴하여 상담이 실패하는 경우가 여기에 있기에 내담자로 하여금 자신의 환상이나 신경증의 피난처로 숨어버리지 못하도록 하고, 그림자의 현실을 자기 인격의 하나로 인식하도록 유도하는 기술이 요구된다. 이는 치료자의 중요한 몫이 되며 그대로 치료의 성공과도 결부되는 문제가 되고 있다.

7. 요약

지금까지 우리는 그림자의 구조와 특징에 대한 것을 다루었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한 것이 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그림자의 특징을 아는 것도 그렇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것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의식에 대하여 그만큼 거리감을 갖고 있는데, 이는 무의식의 사실을 인지하는 일은 자기 자신의 생활에 성실한 자기검토나 재통합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을 계속할 뿐이다. 무의식을 진지하게 취급하고 그것에서 생기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고심하는 일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생각처럼 쉽지 않은 것이 무의식에 대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림자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다른 무의식에 비하면 비교적 쉽게 발견해서 개선이 가능한 성격을 가진 것이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그림자의 발견으로 인격의 성숙이 가능해지고 심리적 장애가 극복된다면 서둘러 해야 할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