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렬 인터뷰
▲김충렬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제17장 무의식의 구조와 특성

무의식은 분석심리학의 특징을 이룬다. 융은 무의식의 다양성과 그 방대한 세계를 체계적으로 밝혀내었다. 특히 융은 무의식을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으로 구별하여 무의식의 넓은 세계를 열어 오늘의 정신치료에 보다 획기적인 장(章)을 열었다. 이는 융의 고유한 업적에 해당하기에 융의 일생은 무의식과 깊이 연관되고 있다.

그는 자서전의 첫머리에서 "나의 생애는 무의식이 내 자신을 실현한 역사"라고 언급한다. 실로 융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정신의 미지의 세계인 무의식의 연구에 몸을 바쳤다. 융을 통하여 이 무의식의 세계는 폭넓게 체계화되었기에 분석심리학의 이해는 진정으로 무의식의 이해라 할 수 있다.


1. 무의식의 기초 이해

인간의 정신에는 의식과 무의식이 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이다. 이것은 의식만 인정되던 것에서 무의식이 인정되기에 이른 결과이다. 실제로 무의식이 오늘날에는 일반화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이처럼 무의식의 상용화되기까지에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서는 무의식을 이해하기 위하여 무의식의 정의와 그 특징적인 점으로 구분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1) 무의식의 정의

무의식(無意識, unconscious)은 현재에 의식되지 않는 정신의 특성이다. 이런 무의식은 개인의 내면에서 자신도 모르게 진행되는 정신활동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의식이란 지금은 의식되지 않는 정신의 현상을 모두 일컫고 있다. 우리는 생활하면서 때로 의도적으로 떠올리려고 해도 생각이 나지 않는 경험을 한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전혀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생각이 갑자기 떠올라 당황하는가 하면, 마땅히 떠올려야할 친한 사람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서 순간적으로 난감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여성이 집 열쇠를 어디에다 두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지만, 설거지하다가 갑자기 떠오른 경험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음악을 듣거나 TV의 장면을 보다가 그와 관련되어 일어나는 옛날의 사람이 생각나기도 한다. 생활에서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다가 과거에 했던 행동이나 사람들이 불현듯 떠오르기도 한다. 이런 것은 모두 우리가 떠올리려 했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루어진 정신작용이다. 이런 현상이 무의식으로 인해 일어난 정신의 현상이다.

그러면 우리가 과거에 경험한 것들은 모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적당한 자극을 가하면 다시 의식에 떠오르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무의식이란 현재를 기준으로 하여 의식에 떠오르지 않는 정신의 특성을 모두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무의식이란 현재를 기준으로 하여 의식되지 않는 특성이라면, 언젠가는 다시 의식으로 떠오를 수 있는 특성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무의식은 현재를 기준으로 하여 의식되지 않는 것이지만, 정신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는 의식이 어떤 시점을 기점으로 하여 다시 무의식으로 될 수 있듯이 무의식 또한 의식이 될 수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2) 정신경험과 무의식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자기도 모르는 어떤 것이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어떤 내 안에 내가 원치 않는 생각에 휘둘리기도 하여 상당한 불쾌감을 느끼는 경험도 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내면에서 어떤 것이 그것을 하도록 강요하여 실제로는 원하지 않았던 대로 행동하고 후회하는 수도 있다. 그래서 곧잘 우리는 어떤 실수를 했을 때에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어버린 것에 사과하기도 한다.

이처럼 '본의 아니게'란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리고 그렇게 하고 싶지 않는데 그렇게 되어버린 것에 대해서 후회하는 정신적인 경험이다. 이런 것은 의식의 특성인 논리적인 특성과는 다르게 자신도 모르게 내면에서 작용되어 일어난 심리적인 특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통칭하여 우리는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무의식의 현상은 최근에 일어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무의식은 이미 우리의 일상에서 그리고 정신경험에서 오래도록 존재하여 왔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우리가 중추신경계의 작용과 관련하여 보면 그 이해가 쉬워진다. 이는 임상관찰을 통해 기억의 생리학적 토대는 뇌세포 안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변화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는 점에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관련되고 있다. 수술할 때 환자가 수술대 위에서 의식을 갖고 있는 동안, 환자의 뇌 표면이라는 피질에 직접 자극을 주는 것은 환자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무의식적인 경험을 의식의 영역으로 되살리는 작용을 한다. 이때 환자의 뇌의 특정부분을 제거한다면, 환자의 특정경험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다.

뿐만 아니라 망상체 또는 망상활성조직이라고 부르는 뇌-조직 일부에 직접 전기자극을 주면, 무의식적이거나 전의식적인 자료를 의식의 영역으로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이 전반적으로 높아진다. 또한 뇌혈액의 변화이론에 따르면, 뇌가 무의식의 활동에서 의식의 활동으로 전환하는 과도기에는 뇌의 여러 부분에 대한 혈액공급에 국지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정신생리학적인 기능에 대한 지식이 늘어남에 따라 이런 생체심리학적인 연구는 무의식에 대한 개념의 타당성에 새로운 전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3) 철학에서의 무의식

무의식이라는 개념은 이미 오래전부터 등장하여 우리에게 알려져 왔다. 철학적으로는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에 의해 그 개념이 도입되어 쉘링(Friedrich Wilhelm von Schelling) 등이 철학의 주제와 관련하여 언급하였다. 라이프니츠는 단자론에서 정신의 세 가지 단계를 설정한다. 첫째 단계는 감각적인 것으로 감각의 대상과 자극에 의한 주로 외적 감각을 말하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외적인 감각의 질 위에 있는 인간정신의 정신의 두 번째 층으로서 공통감각(Gemeinsinn)과 그 내용을 설정한다. 여기서는 어떤 개별적인 감각에도 속하지 않는 것으로 자극되지 않지만, 상상으로 가능한 정신의 특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 세 번째 단계에서는 순수하게 예지적인 특성으로서의 정신의 내용을 부여한다. 이는 오성(悟性)의 개념으로서 감성을 포함하는 것으로 칸트의 인식론의 단초가 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라이프니츠의 단자(Monade)는 영혼이요 생명을 의미하던 것이 파라켈수스(Paracelsus)에게 이어지고, 쉘링에게서는 자연철학과 선험철학에서 살아있는 유기체의 자연적인 생명이 논의되는 중에 생명과 영혼의 배후에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명제가 세워진다. 정신은 자연이라는 것과 함께 다시 이 정신에서 주관과 객관이 논의되면서 현재에 인식할 수 없지만, 존재하는 선험적인 의미의 무의식의 특성이 논의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쉘링 이후에는 헤겔, 쇼펜하우어 및 쉘러 등이 생명, 의지, 충동 등에서 받아들인 개념이 되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쉘링이 말한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셀링은 처음에 밝힌 순수하게 자연과학적인 정신이란 명확하지 않은 것이었지만, 이런 정신적인 생명이 단순히 현상만을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삶과 체험에서 어떻게 변형되어 작용하는가의 문제를 주관과 객관에서 논하게 되었다. 다르게 말하면 그는 자연적인 정신이 실재하는 것으로서 주관에서 어떻게 객관으로 이동하는가의 특성과 더불어 자연의 배후에 존재하는 정신의 특성을 논의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는 그가 자연의 배후에는 정신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무의식의 특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점이다.

정신 개념의 발단은 단순한 정신생활만으로는 우리들의 마음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는 데서 연유된다.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본질적인 실재를 요구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술가가 자기의 작품을 구상하는 데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신체적인 표현 속에 드러내고, 또 이상(Ideal)에 불붙은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신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드러내거나 발견해내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그리움이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완전히 정신적인 것의 반영(反映)과 반대되는 것으로서의 완전히 신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쉘링은 이런 정신의 개념을 그의 선험철학에서 3단계를 거쳐서 논하고 있다. 그는 선험철학의 첫째 부분에서는 이론철학을 논한다. 여기서는 자연적인 정신이 지성으로 발전해 가는가를 밝혀준다. 실재하는 의식의 여러 단계들은 감각과 창조적인 직관을 질료를 생산해내고, 외적인 직관과 내적인 직관은 공간과 시간 및 범주를 만들어내고, 추상작용은 지성을 그 생산물과 구별지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 전체는 무의식적으로 행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선험철학의 둘째 부분인 실천철학에서는 어떻게 해서 지성으로부터 의식적으로 정립된 자유로운 행위들이 생겨나는가 하는 것을 드러내 보여준다. 역사는 혼란된 것, 의미 없는 것으로 보이는 때도 있으나, 그래도 정신에 의해 인도되며, 궁극적으로는 법과 국가에 있어서의 완전한 도덕적인 세계질서를 목표로 삼고 있음을 밝힌다.

선험철학의 셋째 부분에서는 예술철학을 다룬다. 이 예술철학은 이론철학과 실천철학의 종합이며, 무의식적인 것과 의식적인 것이 하나로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해낸다. 예술과 예술적인 창조 안에서 자연과 정신,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 법칙과 자유, 신체와 영혼, 개별적인 것과 보편타당한 것, 감성과 관념성,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 등의 양극적인 대립과 동일성 속에서 만나게 된다. 이로써 정신에서 서로 다른 특성이 영원한 관념성 속에서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게 된 것이다.

2. 심리학에서 무의식의 이해

심리학은 초기에는 의식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감각이나 지각, 그리고 의식의 연구에 집중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본능이라는 단어에 관점이 이동되는 변화를 가져오기는 했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심리학에서 무의식의 이해에 대하여 무의식을 이해하는 기초가 되는 일반심리학과 무의식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분석심리학의 경우로 구분하여 고찰할 필요가 있다.

1) 일반심리학에서 무의식

실험심리학을 창시하여 심리학이 과학이 되게 하는데 공헌한 사람은 빌헬름 분트(Wilhelm Wundt)였다. 그 당시의 심리학은 주로 감각이나 지각, 그리고 의식 등에 초점을 두어 연구했기에 무의식의 개념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분트는 그의 저서《심리학 개론》에서 무의식의 개념을 '의식에서 사라진 어떤 정신적인 것 요소를 우리는 무의식화된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분트학파에서는 정신적 상태가 적어도 의식의 문턱에 다다르지 않는다면 정신적이라고 칭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었다고 한다. 이는 의식만이 정신적인 것이기에 모든 정신적인 것은 의식된 것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규정하는 것으로 융은 이런 점을 들어 여기서의 '정신적' 상태는 논리적으로 보자면 그러한 상태가 정신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떤 상태'라고 말하는 편이 옳을 듯하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이런 정신의 특성에 대하여 융은 재생가능성 이외에는 더 이상 아는 것이 없기에 그 요소들은 오직 정신의 사건의 미래의 구성 요소가 될 소질이나 소인(素因)을 형성할 뿐이라고 말한다. 이런 이유로 당시에는 '무의식'의 상태나 혹은 그 어떤 '무의식적 과정'을 가정하는 것은 심리학을 위해서는 비생산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런 정신적 소인에 대하여 정신적으로 수반되어 나타나는 현상도 있고, 그것은 일부는 증명되고, 일부는 많은 경험에서 추정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신의 특성이 헤르바르트(J. F. Herbart)와서는 상당히 발전된 면모를 보인다. 그는 "하나의 관념이 의식의 문턱 아래로 떨어지면 그 생각은 계속 잠재적인 방법으로 존재하고, 지속적으로 문턱을 다시 넘어서 나머지 생각들을 억압하려고 한다."라고 말한다. 요한 프리드리히 헤르바르트(Johan Friedrich Herbart, 1776. 5.14-1841. 8.14)는 독일의 철학자요, 교육학자요, 그리고 심리학자이다. 쾨니스베르그에서 칸트 후임으로 있다가 괴팅엔대학에서 가르쳤다. 그의 주요 저서로서는 《철학입문 교본》,《심리학 교본》,《학문으로서의 심리학》등이 있다.

여기에서 그는 하나의 관념이 의식의 문턱 아래에 떨어지면 그 생각은 잠재적인 방법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밝힌 점이 특이했다. 다만 그는 그것이 무의식이라는 현대적인 개념으로 지칭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것이 또한 억압 상태에 있다고만 말했다는 점에서 무의식이 다시 의식으로 떠오르는 재생성을 언급하지 않는 점이 오늘의 무의식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융은 헤르바르트가 '관념' 대신에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콤플렉스'라고 말했다면, 전적으로 옳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가 무엇인가 그런 특성을 생각했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무의식의 개념을 과학의 대상으로 삼고 연구한 사람은 프로이트(S. Freud)였다. 프로이트는 노이로제 환자를 치료하면서 아무런 까닭 없이 신체적인 마비를 일으켰을 때 그를 최면에 걸어 오래 전에 겪은 것을 말하게 하였더니 그 증상이 없어졌다. 이때 마비를 일으킨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였더니 없어진 것을 보고 잊어버린 과거의 기억은 마음의 상처이면서 의식에서 떨어져 나간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억압되어 신체에 나타난 것임을 착안하여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이 치료임을 알게 되었다.

당시 프로이트는 무의식에 억압되어 증상을 일으키는 것이 성적인 욕망과 관련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후에 프로이트는 이 무의식의 개념을 사람들의 실수, 망각, 공상, 노이로제나 각종 정신장애의 증상, 그리고 꿈에서 찾아 입증하게 되었다. 이처럼 프로이트가 심리학에서 무의식의 존재를 발견함에 따라 오늘날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방법으로 다양한 정신치료가 가능해졌다.

확실히 심리학에서는 무의식적인 활동의 원인과 의미를 해석하려는 노력은 프로이트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융도 이 무의식의 개념을 받아들여 더욱 확대해 나갔지만, 융은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무의식에 대한 입장을 달리한다. 융은 무의식에는 프로이트가 중요하게 보았던 성적인 충동만이 아니라 그 밖의 여러 인간 정신적인 요소들이 무의식을 이룬다고 보고 있다.

무의식은 그대로 깊고도 넓은 인간 정신의 심층을 이루는 것으로 미지의 '정신세계' 또는 아직 의식되지 않은 미의식(未意識)이라 부르는 등 다양하게 발전시키고 있다. 그리고 융은 생각된 것, 또는 의식된 것이 무의식적 내용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의식과의 무의식의 관련성을 분명히 했다.

2) 분석심리학에서 무의식

융은 특별히 자신의 박사논문에서 무의식의 특징을 몇 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융의 박사학위논문은 1902년 블로일러(Eugene Bleuler) 지도하에 "소위 심령현상에 관한 심리학과 정신병리에 관하여(Zur Psychologie und Psychopathologie sogenannter okkulter Phaenomene)"라는 제목으로 연구되었다. 논문은 어느 소녀영매(靈媒)의 강신술 회합에 2년간 참여하여 기록한 내용을 분석적으로 연구한 것인데, 그는 이 논문에서 몽유병, 히스테리, 기억상실 및 그 밖의 의식의 몽롱한 상태에 관한 현상들을 재검토하였다.

그리고 이 논문에서 융이 얻은 결과는 거의 무의식에 대한 것이었고, 여기에서 얻은 무의식을 특성을 계속적으로 발전시켜 오늘의 분석심리학의 바탕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분석심리학에서 중요시되는 무의식의 특성을 다음 몇 가지로 구분하여 정리할 수 있다.

첫째로 무의식의 존재적인 특징이다. 무의식이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것은 그 일차적인 특성이 된다. 물론 무의식은 여러 가지 특성을 갖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무의식의 자율성(die Autonomie des Unbewusstsein)은 가장 특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의식의 자율성이란 어떤 통제에 의해서만 움직여지는 것이 아닌, 즉 의식의 통제를 받지 않는 특성을 말한다.

융은 영매의 몽유상태에서 발생하는 모든 행동을 관찰한 결과 환시, 자동적인 동작 등은 의식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자율성에 의해 일어남을 발견하였다. 이를 신경기능에 비하면 무의식은 마치 수면 중에라도 계속해서 기능을 발휘하는 자율신경과 같다. 이런 무의식은 스스로의 법칙에 따라 움직여가는 자동기능인 자율성이지만, 이는 창조적인 측면이 많기 때문 반드시 위험하지 않은 것이다. 융은 이 자율성을 창조적인 에너지로 이해한다. 그것은 무의식이 의식을 어떤 힘으로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식에게 미래의 가능적인 창조적인 특징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다.

둘째로 존재의 목적이다. 무의식은 왜 존재하는가? 이는 무의식의 목적적 의미(der Zwecksinn des Unbewusstsein)를 묻는 질문이다. 무의식은 융에 의하면 일정한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 무의식이 의식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에 불필요한 존재로 여길 수 있지만, 무의식에 의해 나타난 모든 증상은 일단 일정한 목적이 있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융은 여기에서 모든 증상이나 정신장애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고찰하게 되었는데, 무의식이란 정신의 전체성이 어그러져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으며, 동시에 그 전체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정신의 전체성이 어그러진 것은 질병의 원인에 해당하고, 그 전체성을 회복하는 것은 치유하는 목적에 해당됨을 말한다. 분석심리학은 이런 특성을 중요하게 다룸으로써 무의식을 단순히 병리학적인 관점에서만 보려는 치료적인 차원을 넘어 인간 정신의 창의적인 측면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무의식의 창의적인 측면은 정신의 긍정적 특성이자 그 원천을 보는 것으로 프로이트의 관점과는 비교되는 부분이다. 무의식은 융에게서는 의식에 대하여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한 에너지의 원천이다. 무의식은 의식의 원천이자 정신의 모든 가능성의 원천이라는 점은 분석심리학이 무의식을 보는 특징이다. 무의식은 아직 의식에 떠오르지 아니하였으나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진 에너지로 충만하기에 생명의 원천이면서 동시에 창조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융이 무의식을 긍정적으로 보는 관점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매우 비교되는 점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은 억압된 것으로 반드시 밝혀져야 할 병인(病因)이지만, 융은 그것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융이 모든 무의식을 모두 긍정적인 것으로 보는 것만은 아니다. 다만 융이 지금까지 무의식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긍정적으로 보는 관점을 제시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이제 무의식은 나도 모르게 존재하는 정신적 에너지의 저장소이기에 이를 찾아 나서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개인에게서 무의식이 어떤 뜻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연구하는 일이 계속해서 연구해 나가야 할 과제가 되기에 이른 것이다.

셋째로 의식과의 보상적 관계이다. 무의식은 의식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는 무의식은 의식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와 관련된 것으로 의식의 대상적임을 의미한다. 무의식은 의식과 어떤 관계를 이루며 존재하는지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에서는 무의식이 의식과의 관계적인 측면으로 상호작용, 대응작용, 보완작용 등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런 보상적 관계를 무의식의 대상성으로 이해된다. 무의식은 의식과의 관계에서 상호 대상적 작용기능(kompensatorische Funktion)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대상작용이란 보상적인 것으로서 결여된 것을 보충하여 주는 역할이다. 무의식은 의식이 결여하고 있는 부분을 이렇게 보상함으로써 개체의 정신적인 통합을 이루는 유효한 기능으로 작용하려는 것이다. 이는 무의식이 의식을 위하여 협력하는 중요한 협력적인 관계요 체제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또한 무의식은 이를 자동장치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의식에 대하여 자동조절장치 같은 역할을 연상해 볼 수 있다. 의식이 너무 일방적으로 지적(知的)이면 무의식은 자동적으로 정적(情的)인 특징을 띠며, 의식이 지나치게 외향적이면 내향적으로, 내향적이면 외향적인 성격을 띠는 것을 상정하는 것이다. 융은 이러한 보상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의식과 무의식 뿐 아니라 정신의 전반적인 특징으로 정리하여 심리학적인 유형론을 발전시켰다.

넷째로 무의식의 형태적인 특징이다. 무의식은 그 성격에 따라 크게 두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이런 형태는 무의식에 두 가지 층이 있는 것으로 개인적인 특성이 있는 것을 개인무의식이라 하고, 집단적인 특성을 가진 것을 집단무의식이라 부르고 있다. 개인무의식(das persoenliche Unebwusste, personal unconscious)이란 무의식에서 특별히 개인적인 것과 관련되는 특성이다. 말하자면 개인의 특수한 체험이나 성격적인 특성이며 주로 후천적인 것이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성장 및 생활하면서 겪는 체험가운데 어떤 이유로 잊어버렸거나 잠재해 있는 것, 현실세계의 도덕관 및 가치관 때문에 억압된 심리 및 정신적인 내용들이다. 그러니까 개인무의식은 개인의 심리적 경향, 희구, 생각들, 고의로 억누른 괴로운 생각이나 감정, 그리고 의식에 도달하기에는 미약한 지각들이 해당되기에 개인무의식은 인격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이루기 쉬운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 집단무의식(集團無意識, das kollektive Unbewusste)이란 인간의 원초적 행동유형이다. 이는 개인적인 후천적인 특성과는 달리 주로 선천적인 것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원초적인 행동유형에 의해 타고난 것이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집단무의식은 근원적인 유형이라고 하는 지리적 차이, 문화나 인종의 차이와 관련 없이 존재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행동유형 및 사고를 말한다. 이 집단 무의식적 특성은 바로 신화를 산출하는 그릇이며, 우리 마음속의 종교적 원천이 되는 것이다. 융은 집단 무의식에서 프로이드가 말하는 무의식의 개념을 넘어선다.

프로이트에게서 무의식이란 의식에 의해 억압된 내용이며, 이는 주로 본능적인 욕망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융은 집단무의식을 개인의 한계를 넘어 모든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내재하는 미지의 정신세계임을 새롭게 관찰하였다. 이는 경험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모두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정신의 유전적인 특성이라는 것이다.  

3. 요약

지금까지 우리는 개인무의식의 구조와 특성에 대해서 기술했다. 무의식은 분석심리학의 특징을 이룬다고 했. 융은 무의식의 다양성과 그 방대한 세계를 체계적으로 밝혀내었는데, 특히 융은 무의식을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으로 구별하여 무의식의 넓은 세계를 열어 오늘의 정신치료에 보다 획기적인 장(章)을 열었다. 이는 융의 고유한 업적에 해당하기에 융의 일생은 무의식과 깊이 연관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이다.

그는 자서전의 첫머리에서 "나의 생애는 무의식이 내 자신을 실현한 역사이다"고 언급했는데, 실로 융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정신의 미지의 세계인 무의식의 연구에 몸을 바쳤다. 융을 통하여 이 무의식의 세계는 폭넓게 체계화되었기에 분석심리학의 이해는 진정으로 무의식의 이해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의식에 대하여 기술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