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학술원(원장 이신열)이 8일 오후 고신대학교 비전관 손양원기념홀에서 ‘종교개혁과 프랑스 개혁교회’를 주제로 제10회 종교개혁 기념 학술 세미나를 개최했다. 강사로 폴 웰스(장칼뱅신학교 명예교수)·주도홍(백석대) 박사가 나섰다.

17세기 프랑스 교회들의 정치

▲폴 웰스 박사가 발표하고 있다. ⓒ개혁주의학술원

먼저 ‘17세기 프랑스 교회들의 교회 정치’를 제목으로 발표한 웰스 박사는 “교회 조직을 보다 상황적 측면에서 구성했던 마틴 루터와는 대조적으로, 칼빈은 교회 조직이 두 가지 특성을 가진다고 주장했다”며 “우선 그것은 그리스도의 주권 하에 직접적으로 놓여 있으며, 그 어떤 인간적 위계질서 하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성경에는 아주 명백한 교회 정치의 양식(pattern)이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 점에서 칼빈은 루터의 ‘두 왕국 이론’, 즉 사회와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사상을 루터보다 훨씬 일관성 있게 적용했다”며 “시민 정부의 차원에 대해서 칼빈은 ‘기독교강요’의 제일 마지막 장이 보여주 듯이, 필요한 경우에는 공적인 대표자들이 왕의 독재에 저항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했다.

웰스 박사는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 안에서는 시민 정부에서와 같은 직접적인 인간 통치자가 없다”며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직접 자기 백성의 왕으로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치 국가에서 인간 왕 아래에 있는 이들처럼, 그리스도 아래에서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있다. 교회는 공산주의나 무정부주의와 같지 않다. 오히려 교회의 질서는 지명된 직분자들에 의해서 보증된다. 칼빈은 성경이 이러한 교회 질서에 대한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고 믿었다”고 했다.

그는 “프랑스 교회 정치는 17세기 프랑스에서 모범적으로 형성됐다. 장로들의 모임이 이끄는 교회라는 개념이 발의시킨 장로교주의는 그리스도 아래에서 지역교회의 리더십 안에 권위를 위치시킨다”며 “이것은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에서 묘사한 지역교회에 대한 신약 성경의 모델과 매우 유사하다”고 했다.

웰스 박사는 그러나 “17세기 프랑스 교회와 관련해서 두 가지 질문이 남는다”며 “하나는 교회가 정치적인 측면에서 개신교 귀족들과 지적인 엘리트들에 너무 매여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사회적 요소가 칼빈과 그 이후 발군의 교회 개척자들이었던 테오도르 베자와 피에르 비레가 실천적으로 기초를 세운 견고한 토대를 넘어서서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았나 하는 점”이라고 했다.

그는 “17세기의 프랑스는 로마가톨릭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 교회와는 거리가 멀었고 실천은 매우 약했으며, 사람들은 대개가 문맹이었고 많은 경우 프랑스어로도 말하지 못했으며, 다만 파투와(patois), 즉 각 지역 간에 서로 이해를 못하는 지역 방언만을 사용하고 있었다”면서 “가톨릭교도들은 이런 상황에 응해 복음 전도 사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개신교회는 17세기 전체에 걸쳐서 전도 사역에 대해 매우 미미한 비전만을 가졌을 뿐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엄중한 사실은 이러한 교회들은 17세기에 점차 성장이 둔화되었다는 것”이라며 “이는 많은 지점에서 장로교회들에 여전히 유효한 문제점들이다. 내부 문제에 너무 집착해 주변 세계에 대해서는 망각하고 있는 형국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주요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개혁주의학술원

“칼빈 불러낸 파렐, 역사적 인물로 평가해야”

이어 주도홍 박사는 ‘파렐, 칼빈의 동지, 프랑스 종교개혁의 선구자’를 제목으로 발표했다. 주 박사는 “칼빈 곁에서 종교개혁을 위해 힘을 다해 함께 헌신했던 인물들이 적지 않다”며 “이름도 빛도 없이 소명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 성취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주목하며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들추어내는 일은 후대의 마땅한 몫”이라고 했다.

그는 바로 그러한 ‘동지’들로 부처(Martin Butzer, 1491-1551), 비레(Pierre Viret, 1511-1571),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 베자(Theodor von Beza, 1519-1605),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 녹스(John Knox, ca. 1513-1572), 올리베땅(Pierre Robert Olivetan, 1506-1538) 등을 소개하며, 특히 파렐의 생애와 사상 등을 살폈다.

주 박사는 “파렐에 대한 모든 서술과 내용들에서 결코 잊지 않아야 할 일은 그의 동지였던 칼빈을 생각하는 일일 것”이라며 “그들은 함께 만난 순간부터 함께 생각하고, 기도하며, 고민하고, 힘을 합쳐 16세기 하나님의 교회에 주어진 종교개혁의 과업을 신실히 이루려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그는 “종교개혁은 하나님이 각 지체로 보내 주시고 붙여 주신 신실한 종들이 각처에서 각자의 은사를 가지고 힘을 합쳐 이룩한 작품이었다”며 “그런 맥락에서 파렐은 나름의 소중한 역할을 했다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목가적인 도시 스트라스부르에서 글이나 쓰며 한 학자로서 정적인 종교개혁에서 조용한 역할을 감당했을 칼빈을, 역동적인 제네바로 불러내어 스위스 종교개혁의 중심에 서게 한 일이었다 할 것”이라고 했다.

주 박사는 “안디옥교회의 바나바가 다소의 바울을 불러내었던 것처럼, 칼빈의 생애에 있어서도 파렐은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었고 제네바의 종교개혁에 있어 결코 잊을 수 없는 역사적 인물로 마땅히 평가해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