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황경태)와 농부(홍윤선), CEO(추광재)와 사회학도(최규동) 등 네 명의 크리스천 남성 청년들이 유럽 곳곳을 탐방하며 ‘살아있는 공동체 영성’을 찾아나선 여행기, 「워키토키 유럽(Walkie Talkie Europe·이담북스)」의 저자들이 신앙의 ‘본류’를 찾아 떠났던 그 소중한 경험을 본지에 열 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이번에는 홍윤선 형제의 ‘윌버포스의 흔적을 찾아’입니다.

▲하이드 파크에 모여 왕세손 결혼식을 관람하고 있는 런던 시민들. ⓒ저자 제공

영국 런던에 도착한 다음 날, 홍콩을 들렀다 오는 후배 경태를 만나기까지 하루의 시간이 남아서, 아직 풀리지 않은 여독도 풀 겸 숙소 근처에 있는 하이드 파크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가는 길에 몇 미터 간격으로 경찰들이 서 있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공원에 가까이 갈수록 경찰의 수는 더 많아지고, 한적한 산책을 기대하고 들어간 공원 안에는 엄청난 인파가 운집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날은 영국 왕실 윌리엄 왕세손의 결혼식날이었던 것입니다. 기대했던 조용한 산책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또 이런 기회가 어디 있겠나 싶어 나도 결혼식 축하 인파 중에 하나가 되기로 했습니다. 결혼식도 결혼식이지만, 아마 몇 달은 가야 볼 수 있는 런던 사람들을 하루에 다 구경(?)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래 결혼식이 거행되는 곳은 버킹엄 궁전이었지만, 이곳 하이드 파크는 결혼식에 감히 참석할 수 없는 평민(?)들을 위해 4개의 대형화면과 음질 좋은 스피커에서 결혼식을 생중계해 주고 있었습니다. 결혼식은 찬송과 기도와 선포가 이어지는 예배였습니다. 대형화면에서 나오는 생중계를 보랴, 동양에서 갓 날안온 촌놈처럼 런던 사람들 구경하랴 정신 없었지만, ‘Love divine all loves excelling’으로 시작하는, 위대한 작사가 찰스 웨슬리의 찬양이 온 도시 한가운데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분위기 속에 사뭇 혼자서 경건의 바다에 빠져보기도 했습니다.

버킹엄 궁전에서는 예배였지만, 이곳 하이드파크에 모인 사람들에게는 축제였습니다. 한 손엔 맥주를 들고 다른 한 손엔 영국 국기 혹은 가족과 연인의 손을 잡고 예배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위대한 찬송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히잡을 쓴 무슬림 여인들의 모습도 여기저기 눈에 많이 띄더군요.

그러면서 전통이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이들에게 기독교 정신이라는 것, 그리고 예배라는 것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일상 속으로 들어와 있구나 하는 생각 말이죠. 물론 기독교인으로서 말씀대로 사는지 여부는 일단 차치하겠습니다. 영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이 대략 1500년 이상 되었는데, 기독교 정신이 그 동안 이 사람들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얼마나 배어 있을까요? 마치 우리 민족 안에 불교와 유교와 무교(巫敎)가 뿌리 깊이 배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불교와 유교와 무교의 공통점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바로 ‘절대神’의 부재입니다. 절대신 사상은 절대적 가치를 가지며, 사람들의 의식 속에 기본적으로  절대자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종교 혹은 철학체계는 절대적 존재에 대한 인정 없이 ‘나’ 자신이 신이 되고 중심이 되어 현세적 가치에만 충실하도록 만듭니다.

지구상에서 절대적 존재에 대한 절대적 순종이 가장 강한 곳이 어디일까요?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비록 구약의 하나님밖에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철저함은 나라가 없는 가운데서도 2000년 이상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키부츠라는 공동체에서 한 달여,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한 달 이상을 지내면서, 나는 신앙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서조차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과 경외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자신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뿌리 깊이 전제된 결과일 것입니다.

이 모든 걸 생각해 보면, 우리 민족이 얼마나 절대자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절대적으로 믿는 데 있어 영국이나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불리한지를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윌버포스의 ‘클래팜 공동체’가 있던 클래팜 교회. 폭격 자국이 선명하다. ⓒ저자 제공

숙소로 돌아와 체크아웃을 하고 다시 여행자 모드로 돌입했습니다. 이방인의 손에서 지도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또 한 군데가 눈에 쏙 들어오는군요. 바로 클래팜(Clapham)이었습니다. 이곳이 나의 눈길을 끈 이유는 바로 한 사람,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일생을 노예제도를 폐지시키는 데 바쳤고, 인생의 위대한 목표를 이룬 그 해에 죽었습니다.

그가 살아있을 당시에 영국의 국내총생산 중 3분의 1이 노예제도를 통해서 창출되었습니다. 정치인도 기업인도 유력한 사람들은 모두 노예제의 폐지를 원하지 않았고, 평생 그의 대적이 되었습니다. 윌버포스가 이 일을 이루는 데 혼자 힘만으로 가능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클래팜 공동체였습니다. 노예제도의 폐지를 위해 어떻게 반대파들과 싸우고, 어떻게 지지자를 모으며, 어떻게 전략을 짜고 실행할 것인가를 이들은 머리를 모으고 힘을 합쳤습니다.

윌버포스에게 동시대를 사는 클래팜 공동체가 있었다면, 동시에 역사적 공동체도 있었습니다. 악명 높은 노예상이었던 존 뉴턴(1725-1807)은 윌버포스가 이 일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수할 수 있도록 도운 스승이었습니다. 그러나 좀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존 뉴턴의 정신적·영적 스승은 영국의 종교개혁을 이룬 존 웨슬리(1703-1791)였습니다. 윌버포스의 스승의 스승이었던 웨슬리는 임종 직전 노예제 폐지를 위해 일하는 윌버포스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존 웨슬리, 존 뉴턴, 윌리엄 윌버포스로 이어지는 역사적 공동체! 웨슬리도 뉴턴도 생전에는 노예제도가 폐지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하지만 내 눈으로 결과를 직접 보지 못할지라도, 역사적 제자와 후배에 의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게 된다면 그 상급은 동일할 것입니다.

하지만 윌버포스의 후예들을 만나고 싶어 찾은 클래팜은, 성삼위일체 클래팜 교회 안에 있는 문 잠긴 ‘윌버포스 센터’ 이름에서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때 맞은 폭격 때문인지 알 수 없는 포격 자국이 남아있는, 클래팜 공동체 멤버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진 석판만이 과거 이곳이 어떤 곳이었는지를 말해줄 뿐이었습니다.

뭔가 대단하고 의미심장한 대화를 기대하고 찾은 클래팜 교회 앞 뜰에서 만난 것은, 홀로 술을 마시고 있는 노숙자였습니다. 그는 나에게 대뜸 2파운드를 달라고 했습니다. 역사적 기대감에 찬 방문에 대한 답변치고는 참 역설적이었습니다. 그때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는 ‘당신,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내 말 안에서 ‘한심하다’는 의중을 눈치챘는지 그가 내게 ‘나를 우습게 보느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분위기, 상황, 등에 진 무거운 배낭 등등 여러 핑계가 있었지만, 좀더 대화를 이어가지 못하고 온 것이 내내 아쉬웠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다음에 만나면 꼭 이 말을 해주겠습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줬던 이들에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