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황경태)와 농부(홍윤선), CEO(추광재)와 사회학도(최규동) 등 네 명의 크리스천 남성 청년들이 유럽 곳곳을 탐방하며 ‘살아있는 공동체 영성’을 찾아나선 여행기, 「워키토키 유럽(Walkie Talkie Europe·이담북스)」의 저자들이 신앙의 ‘본류’를 찾아 떠났던 그 소중한 경험을 본지에 열 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1. 축제, 그 후에 남은 것은

▲독일 통일의 상징 브란덴부르크 문.

드디어, 그토록 고대하던 베를린 입성.

베를린에 그렇게 오고 싶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저 무너진 장벽, 냉전의 아이콘인 동시에 탈냉전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싶었습니다. 통일을 염원하여 그 장벽을 무너뜨린 베를린 사람들(Berliner)의 심정을 잠시나마 깊이 공감하고 싶었지요. 눈에 보이는 유적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과 정신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독일 통일의 실천적 공동체 영성, 교회의 역할(과거)과 가능성(미래)을 말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의식있는 젊은 목사님으로부터 독일개신교회연합(EKD·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land)의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받을 수 있었고, 그것은 통일 이야기를 향한 나의 열망을 비춘 한줄기 빛이었습니다. 나의 열망을 공감해 준 EKD 비서의 도움으로 통일 당시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홀 박사님(Dr. Holl)과 연락이 닿았고, 베를린 EKD 회관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그는 통일에 있어 교회의 역할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동독교회는 자유(liberty)와 민주주의(democracy)라는 개념을 전달하는 통로 역할을 했습니다. 동독 사회에서 자유와 민주주의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고 생각될 때도 동독교회는 그걸 보존하고 있었지요. 동·서독 교회가 서로 만나 교류하면서 동독교회는 점차 소위 '계급장 떼고' 라운드 테이블에서 대화하는 서독의 문화에 익숙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통일 이전 동독교회 내에서만큼은 어느 정도 체제에 대한 비판이 가능했지요. 1989년 니콜라이교회의 평화기도회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동독교회가 이를테면 민주주의의 핵심개념을 보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지요.”

과연 독일 통일 당시 교회가 했던 역할은 부인할 수 없이 선명했습니다. 동독 비밀경찰인 ‘슈타지(Stasi)’에서 일했던 공산당 간부는 독일교회의 월요시위(Montags-Demonstrationen)를 회상하면서 훗날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한 대비를 했지만, 촛불과 기도에 대해서는 대책이 없었다.”

20년 전 통일 과정에서 종교의 역할이 그처럼 의미있는 것이었다면, 2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홀 목사님과의 만남을 통해 통일 전·후 종교의 역할에 대해 생각에 잠겼습니다. 독일교회는 통일 전에는 ‘제도로서의 교회’, 즉 외적 역할을 감당해야 했다면, 통일 이후에는 내적 역할, 즉 ‘종교의 근본적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EKD 회관.

재통일 이후 독일에는 신조어가 생겼습니다. ‘오씨(Ossi)’와 ‘베씨(Wessi)’. ‘오씨’는 동쪽을 의미하는 독일어의 Osten에서부터 생긴 말로, ‘가난하고 게으른 동독놈들’이라 구동독 지역 출신을 비하하는 표현, ‘베씨’는 서쪽을 의미하는 Westen에서 유래한 것으로 ‘탐욕스럽고 거만한 서독놈들’이라 구서독 지역 출신을 비꼬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오씨와 베씨 사이의 갈등은 한국의 경상도-전라도 간의 갈등 만큼이나 공공연하게 드러나고 있지요.

이런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속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을 거부하고 죄를 지적하여 회개하게 만드는 복음이야말로 욕망과 죄의 결과물인 수많은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옳음(공의)의 선포와 그것을 통해 드러난 죄에 대한 용서(자비)가 하나된 역사가 십자가 외에 또 있겠습니까. 2000년 전 고대 기독교는 이러한 본질적 역할을 다했기 때문에, 지금 동독인과 서독인 사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이질감을 가졌던 유대인과 헬라인을 하나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런 개신교의 역사적 기초 위에서 독일교회가 ‘마음 속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넉넉한 에너지를 발견하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사람 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일은 어쩌면 물리적인 베를린 장벽을 허물기까지 교회가 했던 역할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큰 것일지 모르지만요.

2. 자유를 사용하라 – 마르틴 루터

통일에 크나큰 기여를 한 독일교회의 중심에는 그들이 자랑스러워 마지 않는 종교개혁의 아버지 루터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3대 저서 가운데 하나인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다음과 같은 놀라운 선언으로 시작하지요.

“모든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섬기는 종이 될 수 있다.”

과연 오씨(Ossi)와 베씨(Wessi)들의 통일 독일에는 루터가 말한 ‘종이 되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과거 서쪽 독일 사람들을 위하여 이렇게 적용해 보면 어떨까요?

“모든 서독 출신 그리스도인 역시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다. 그러므로 모든 서독 출신 그리스도인은 ‘가난하고 게으른 오씨’의 종이 될 수 있다.”

▲독일 빌헬름 카이저 교회.

40년을 공산주의 체제 속에 살아온 동쪽 사람들이 변화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요. 서쪽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이해한다면, 종처럼 기다리며 희생할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마찬가지로 동독 사람에게도 기회를 주어야겠습니다.

“모든 동독 출신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다. 그러므로 모든 동독 출신 그리스도인은 ‘거만하고 탐욕스러운 베씨’의 종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재통일 이후 동독 사람들은 가슴에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게으름과 나태의 삶을 살았던 동독 사람들은 역사의 현실 앞에 겸손해야 하지 않을까요? 마음의 장벽을 허물기 위해 희생을 전제로 한 솔직한 대화가 양쪽 모두에게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500년 전 독일을 비롯한 유럽을 휩쓸었던 종교개혁은 이러한 종교적 기초에서 출발한 자기 희생만이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이끌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한반도의 남쪽에 살고 있지요.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이런 기회가 있지 않을까요?

“모든 남한의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다. 그러므로 모든 남한의 그리스도인은 북한 사람들을 비롯한 동아시아인들의 종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출발선에서 통일을 본격적으로 다룰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인과 종교에 대한 부정적이고 파괴적 비판 대신에, 그리스도인의 이러한 자세를 가지도록 격려하고 기대하면 어떨까요?

현대적으로 세련된 건물들이 즐비하면서도 지난(至難)한 역사의 흔적과 자취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베를린의 EKD건물을 나서며, 한여름 바닷가 같은 파아란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복잡한 역사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청명한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 삶을 살자!’며 주차(?)해 놓은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힘차게 돌리며 캠핑장으로 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