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든버러성의 모습. ⓒ저자 제공

변호사(황경태)와 농부(홍윤선), CEO(추광재)와 사회학도(최규동) 등 네 명의 크리스천 남성 청년들이 유럽 곳곳을 탐방하며 ‘살아있는 공동체 영성’을 찾아나선 여행기, 「워키토키 유럽(Walkie Talkie Europe·이담북스)」의 저자들이 신앙의 ‘본류’를 찾아 떠났던 그 소중한 경험을 본지에 열 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이번에는 황경태 변호사의 ‘스코틀랜드 교회를 찾아서’입니다.

영국의 ‘뱅크 홀리데이(은행이 쉬므로 다른 기관들도 같이 쉬는 관습에 따라 부르게 된 이름)’라는 법정공휴일에 저는 런던을 떠나 스코틀랜드를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여행을 준비하기 전 가장 먼저 떠올랐던 질문은 “어디를 가야 하나?”하는 것이었는데, 여기에 답하기 위해서는 내가 여행에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를 정해야 했지요.

스코틀랜드가 가진 매력 중에서 무엇에 집중해야 할까? 멋진 자연환경이나 역사유적? 미술과 음악? 이도저도 아니라면, 잘 먹고 잘 쉬다 오는 여행? 생각 끝에 2박3일의 이 짧은 여행의 주제를 ‘죽은 역사와 살아 있는 역사’로 정해 보았습니다.

그 일정 중 방문한 곳이 에든버러에 있는 ‘존 녹스 박물관’이었죠.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간 과거의 역사, 그렇지만 현재까지 살아서 울림을 주는 역사적 인물인 존 녹스! 그 박물관은 그가 생전에 살았던 집에 그와 관련된 물건들을 전시해 놓은 소박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입구의 한쪽 벽면에는 그가 생전에 여왕과 나누었던 대화가 전광판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박물관에 있는, 존 녹스 공동체의 예배 모습을 그린 그림. ⓒ저자 제공

“그대는 ‘첫 나팔소리’라는 책에서 여성이 국가를 다스리는 것에 대해 반대하고 여왕으로서 나의 권위를 부정하였는데, 어찌 그럴 수 있는 것이오?”

“존경하옵는 폐하, 그것은 폐하가 아니라 특별히 저 잉글랜드의 이세벨(메리 튜더 여왕)을 비난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네로 치하에서 사는 것에 만족하였듯 저 또한 폐하의 치하에서 사는 것에 만족할 것이며, 만일 그녀가 성도를 핍박하기를 삼갔다면 저나 저의 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창시자 존 녹스와, 당시 스코틀랜드의 통치자 메리 여왕이 나누었던 대화 중의 일부입니다. 존 녹스가 언급하는 이세벨은 별칭으로 ‘피의 메리(Bloody Mary)’라 불렸던, 영국의 메리 1세였습니다. 그 유명한 헨리 8세와 첫번째 왕비인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죠. 그녀는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를 쫓아낸 아버지와 그가 만든 영국 국교회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가졌고, 재위 동안 개신교에 대한 탄압을 지속했습니다. 존 녹스는 그런 그녀에 대항해 붓을 든 것입니다.

존 녹스의 집에서 2층으로 올라가면 창문으로 에든버러의 거리가 내려다 보입니다. 그가 기도실로 썼던 조그만 방과 창가에 놓인 책상은 펜을 들어 써내려갔던 날카로운 필치의 글과 한 치 앞도 안보였을 깜깜함을 돌파하기 위해 매달렸을 ‘기도의 자리’의 흔적들입니다. 이런 소박함과 단순한 경건의 자리에서, 당시 세상을 울렸던 메시지가 터져 나왔음을 상상하여 볼 수 있었습니다.

메리 여왕과 존 녹스의 대화를 좀 더 들어보겠습니다.

“그대는 백성이 무력으로 군주에게 저항해도 된다고 생각하오?”

▲(왼쪽) 존 녹스의 기도실. (오른쪽) 창문을 통해 에든버러 거리가 내려다 보이는 존 녹스의 방. 책상은 존 녹스가 집필할 때 쓰곤 했던 것이다. ⓒ저자 제공

“폐하, 군주가 지켜야 할 한계를 넘으면 백성은 당연히 무력으로라도 저항할 수 있습니다. 부모라도 발작을 일으켜 자식을 죽이려 할 때, 자녀들이 아버지를 붙잡아 칼을 빼앗고 발작이 멈출 때까지 감옥에 가둔다면, 여왕 폐하는 그들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자녀인 백성을 죽이려 드는 군주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서 칼을 빼앗고 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감옥에 가두는 것은 군주에 대한 불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순종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 메리 여왕은 로마 교회야말로 하나님의 참된 교회라 생각하므로 자신은 로마 교회의 정통성을 수호할 것이라 항변합니다.

“폐하, 로마 교회는 이제 창녀같이 타락하였습니다. 제가 로마 교회를 창녀라 부른다고 놀라지 마십시오. 교리에 있어서나 관습에 있어 온갖 종류의 간음으로 더럽혀 있기 때문입니다.”

“내게 말씀을 전한 이들이 여기에 있다면 그들이 그대에게 답변해 줄 것이오.”

“폐하, 저는 그들이 유럽에서 가장 학식이 뛰어난 교황주의자였으면 좋겠습니다. 폐하께서 가장 신뢰하시는 그들이 여기 와서 폐하의 주장을 돕고, 폐하도 결론이 날 때까지 참고 들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폐하도 가톨릭의 헛소리를 듣고 그들의 주장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얼마나 근거가 희박한지 알 수 있으리라고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렇게 메리 여왕과 존 녹스의 첫번째 만남은 끝나고 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이어진 대화에서 메리 여왕은 분을 참지 못해 한참을 울었다고 합니다.

▲여왕 앞에서도 당당하게 발언하던 존 녹스를 담은 작품. ⓒ저자 제공

자신의 명줄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여왕 앞에서 조목조목 할 말을 다하는 사람, 더 나아가 로마 교회에 대해 ‘창녀’라고 욕하며, 그 교리를 따르는 여왕 또한 간접적으로 비난하는, 참으로 용감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단순히 용감할 뿐 아니라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지식과 논리에 있어 당시 어떤 교황주의자와의 토론에서도 자신 있다고 말하는 이 사람의 내부에는, 강인하고 직설적인 스코틀랜드인의 기질이 말씀의 본질과 신학적 탁월함, 그리고 종교개혁에 대한 확신과 결부되어 터져나왔던 불 같은 에너지가 있었고, 그것은 먼 후대인 지금에서도 느낄 수가 있습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5시간을 달려 런던으로 돌아오면서도, 그리고 여행이 끝난 지도 2년이 넘어가는 시점에서도,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거짓을 드러내고 진리를 선포했던 존 녹스의 얼굴은 여전히 뇌리 속에 남아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사랑과 확신으로 그 누구에게도 당당한 선명한 삶을 살아갔던 믿음의 선배의 발자취를, 그저 보고 느끼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저 또한 그 삶을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자본주의에 경도되어 그저 재물만을 탐하는 길, 혹은 삶의 쳇바퀴에 그저 지쳐 늙어가는 길에 빠지지 않고, 인간 사회의 갈등과 분쟁의 중재자로 서는 것, 개인과 기업과의 관계 뿐 아니라 남한과 북한, 그리고 아시아의 얽히고 설킨 역사적 분쟁을 풀어나가는 과정 가운데, 날카로운 공의의 칼날과 상처를 싸매고 우는 자비의 마음을 품는 것이 제가 소망하며 걸어갈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