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황경태)와 농부(홍윤선), CEO(추광재)와 사회학도(최규동) 등 네 명의 크리스천 남성 청년들이 유럽 곳곳을 탐방하며 ‘살아있는 공동체 영성’을 찾아나선 여행기, 「워키토키 유럽(Walkie Talkie Europe·이담북스)」의 저자들이 신앙의 ‘본류’를 찾아 떠났던 그 소중한 경험을 본지에 열 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이번에는 황경태 변호사의 ‘영국 교회를 찾아서’입니다.

▲영국의 한 성당 앞에 서 있는 필자.

해외여행을 상상하면 제일 처음 무엇이 연상되시나요? 지중해의 에메랄드빛 바다와 야자나무? 혹은 일간지 여행면에서 자주 보이는 로마의 콜로세움이나 베니스 운하의 낭만적인 풍경인가요? 물론 여행에는 그런 달콤한 맛도 있겠지만, ‘외로움’이라는 씁쓸한 맛도 있습니다. 특히나 아무도 찾아갈 친구 없는 타지에 홀로 머무르다 보면 그런 씁쓸함이 더 크게 다가오는 때가 있습니다.

밝고 따사로운 햇살이 창을 비추던 5월의 런던, 저는 회사 사무실에서 갑작스레 밀려오는 허전함과 고독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혼자라는 ‘자각’, 그 어떤 인생의 재미나 즐거움, 예를 들면 출렁이는 템스강과 웨스터민스터 사원, 빅벤(Big Ben)이 주었던 설렘 속에서도 외면할 수 없는 깊은 고독을 보게 된 것이지요.

그런 가운데 제가 찾은 곳은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 안에 있던 한 채플실이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만난 한 신부님과의 대화를 통해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가톨릭 미사에 찾아온 한 이방인을 다정하게 맞아주며 자신을 ‘Father Joe’라 부르라 했던 그 호의보다, 누군가를 ‘아버지’라 부르는 것에 대한 의미를 새삼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그 단어 속에는 ‘신뢰와 의탁’하는 마음이 동반한다는 것을 저는 갑자기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뿌리, 혹은 기원’, 궁극적으로 따르고 순종해야 할 분, 눈에 보이는 사람으로부터 절대 채울 수 없는 내 마음의 깊이를 감싸 안으시는 근원적인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준엄한 명령 속에, 저는 겸손히 무릎을 꿇고 순종하겠다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 인생에 있어 유럽이라는 미지를 탐험하는 출발과 기초가 되었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런 뿌리와 기초의 측면에서 저 개인 뿐 아니라 영국의 역사에 있어서도 기독교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쫓겨나고 광산 및 묘지에서 설교하면서 영국 전역을 들썩였던 존 웨슬리를 비롯해 조지 화이트 필드, 찰스 스펄전 등 기라성 같은 목사님들이 활약했던 나라! 뿐만 아니라 노예무역선 선장에서 회심한 존 뉴턴의 영향을 받아 평생 노예무역 폐지와 정치개혁에 헌신했던 윌리엄 윌버포스라는 정치가와 그의 공동체인 클래팜이 세속 사회를 변혁시킨 역사를 가진 영국. 저는 이런 탁월한 역사를 자랑했던 영국 교회의 발자취를 좇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시내 중심에 있는 영국성공회의 한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런던 중심 옥스포드 서커스 근처 성 제임스 교회.

런던 시내 중심부인 옥스포드 서커스(Oxford Circus) 근처 성 제임스 교회(St. James Church of England) 주일예배에는 관광객을 포함한 대략 40-50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유럽의 여느 교회가 그렇듯 크고 웅장한 내부와, 가톨릭과 유사하게 잘 갖추어진 예배형식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영어가 익숙지 않아 목사님이 하는 설교를 잘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예배 과정에서 전원이 둘러 서서 성찬식을 하는 것은 인상에 남았습니다. 적은 인원이었지만 그래도 훈훈함이 감돌았고, 낯선 방문자를 따뜻한 인사로 맞아주었습니다.

보통 예배 후에는 다과를 나누며 서서 대화를 하곤 하는 것이 영국의 풍습인데, 저와 같이 간 형은 차를 마시며 교인들과 짧게나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광고 시간이었습니다. 두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이 있었는데 하나는 주중에 동성애자를 위한 모임을 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교회 건물의 유지 보수를 위해 교인들에게 맘마미아의 공연티켓을 판매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성애’라는 주제는 사실 아직은 보수적인 한국사회에서 흔히 접할 수 없는 주제였기에 교회에서 이를 위한 모임을 한다는 것에 관심이 갔습니다. ‘어떤 주제와 목적으로 모임을 하는 것일까? 교회의 입장은 그에 대해 찬성하는 것일까, 아니면 반대하는 것일까?’ 하는 것들이 궁금했지요. 그래서 예배 후 이에 관해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었지만 명쾌한 대답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그가 대답을 하는 것을 꺼리는 느낌을 받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영국 교회 목사 중에서는 동성애에 찬성하는 사람도 있다더군요. ‘아니, 성경에 분명하게 동성애가 죄라는 것을 규정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되물었지만 성경을 믿지 않는 목사들도 있답니다. 신학을 연구하고 공부하고 설교도 하지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따라야 할 삶의 기준으로 믿지는 않는 것이지요.

더구나 건물 보수 기금 마련을 위해 맘마미아라는 공연의 티켓을 판다는 점도 무척 실망스러웠습니다. 그 뮤지컬이 나쁘다거나 교인들은 그것을 보면 안 된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이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켰던 힘 있는 교회는 사라지고 이제 세상 문화의 힘을 빌어 겨우 연명하고 있는, 다 쓰러져 가는 영국교회의 모습밖에 없었다는 증언을 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영국 교회에서 삼위 하나님 앞에서 선 언약 공동체의 힘차고 선명한 모습은 찾기 어려웠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국사회를 변화시켰던 교회의 능력있는 발자취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이 짧은 경험을 통해 영국 교회, 아니 유럽 교회는 신앙의 출발점, 기초와 뿌리를 잊어버리고 있다는 평가를 내린다면 너무 성급한 것일까요? 하지만 유럽 사회가 합리적 무신론의 사회가 되었고, 교회는 그 속에서 힘이 빠진 채 하나 둘 씩 건물들이 팔려나가 술집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그 원인으로 나 개인과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을 하나님 아버지를 절대적으로 따르고 순종하며 세상과 싸워야 할 존재로 규정하는 그 기초를 버린 것을 들고 싶습니다. 그 기초 위에서만 좋은 집과 안락하고 편안한 생활, 사회적 지위 등 내가 살고 싶어하는 방식대로의 삶을 부인하고 제자로서 예수의 뒤를 따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유럽교회가 세상이 주는 안락함에 안주하여 믿고 순종해야 할 아버지와 그의 말씀인 성경을 버림으로, 하나님도 그들을 외면하고 계신 것이 지금 우리가 보는 현실이 아닐까요?

만일 영국교회가 이렇다면, 이를 통해 지금 우리의 모습을 반추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소원을 들어주고 이루어 주는 그저 좋은 하나님을 믿고 있나요? 아니면 내가 순종하고 따를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있나요? 만약 우리 또한 교회의 본래적 사명을 잊어버리고 세속적 조건들에 만족하고 살며 이 땅의 실제 삶에서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다면, 어느 순간 촛대를 옮기실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경고는 지금 우리에게 해당하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