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신학회에서 발표 중인 한영태 교수(서울신대 조직신학). ⓒ송경호 기자
한국복음주의신학회(회장 김성영 박사)가 24일 서울교회(담임 이종윤 목사)에서 개최한 제54차 정기 논문발표회에서 김재성 목사에 이어 두 번째 주제발표자로 나선 한영태 교수(서울신대 조직신학)는 ‘칼빈과 웨슬리의 신학적 대화’를 주제로 발제했다.

한 교수는 이날 발제에서 칼빈신학과 웨슬리신학 사이의 차이를 밝히고, 이러한 차이가 왜 발생했는지를 설명함으로써 두 신학 간 대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구원론에 있어서 ‘은혜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원칙에 대해 칼빈이나 웨슬리는 일치한다”며 “이처럼 웨슬리신학과 칼빈신학은 아주 근접하지만, 머리카락 하나 정도의 차이는 있다”고 했다.

한 교수는 칼빈과 웨슬리신학의 근본적 차이점을 설명하기 앞서 루터와 칼빈, 웨슬리 신학의 기본적 차이를 분석했다.

결론부터 말해 그 차이란, 루터신학의 주제는 구원의 방법에 관한 것이고, 칼빈신학은 구원자 하나님, 그리고 웨슬리신학은 구원의 대상을 그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한 교수에 따르면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의 발단과 동기는 지극히 루터 개인적인 문제, 즉 루터 자신의 구원 문제에서 출발했다. 결국 종교개혁은 루터 자신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두렵고 떨리는 심정에서 구원을 갈망하는 것으로부터 발단한 것이다. 이것은 곧 구원의 방법에 관한 질문이었다.

칼빈신학의 중심은 ‘구원자 하나님’이다. 루터가 신학의 3대 원리(only grace, only faith, only Bible)를 기본으로 구원의 방법을 증거했다면, 이어질 질문은 ‘그럼 누가 나를 구원하느냐?’일 수밖에 없고 이것이 곧 ‘나를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며, 그 분은 은혜와 믿음으로 죄인을 구원하신다’는 칼빈신학의 중심으로 연결된다는 게 한 교수의 설명이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라는 루터의 질문과 ‘누가 나를 구원하는가?’라는 칼빈의 질문에 이은 다음 질문은 ‘누가 구원을 받는가?’이며, 웨슬리신학이 바로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따라서 구원의 대상인 ‘인간이 무엇이냐?’라는 것이 웨슬리신학의 특징이며 중심주제이다.

칼빈과 웨슬리의 차이… 은총과 구원, 예정론 등

루터와 칼빈, 웨슬리신학의 차이를 설명한 한 교수는 본격적으로 칼빈과 웨슬리신학의 차이점을 강조했다.

한 교수가 밝힌 두 신학의 차이는 ▲하나님의 절대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은총 ▲구원의 주체 ▲예정론 ▲성화(성결)에 대한 해석으로 크게 나뉜다. 다음은 각 차이를 설명한 한 교수의 말이다.

▲하나님의 절대권과 인간의 자유의지=16세기 초 가장 큰 정치적 변화는 근대 국가의 탄생이다. 곧 중세의 봉건주의가 근대의 중앙집권적 왕정으로 전환되는 분기점이었다. 전제군주국가에서 왕은 최고의 권력자로 절대권을 가진다.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므로 당연히 최상의 절대자요, 최대의 절대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개념이 칼빈의 신관에 영향을 주었다.

웨슬리는 칼빈보다 약 200년 뒤에 태어난 18세기 사람이다. 이 시기 사람들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재발견과 함께 오랜 전통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심지어 교회와 기독교적인 가치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졌다.

이러한 민주주의 시대에는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와 권리가 중요하며, 개인의 의지(선택)가 중요하다. 이러한 시대적인 인식이 웨슬리의 신학, 특히 하나님과 인간 이해에 영향을 주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지 않으며, 인간은 하나님과 협력하는 존재라고 이해한 것이다.

▲은총=칼빈의 은혜관은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으로 나뉜다. 일반은총은 공공적(communal)인 은혜로 죄인의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은혜는 하나님께서 햇빛과 비를 선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주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칼빈에게 구원은 특수한 부르심(소명) 또는 특별은총으로만 가능하다. 이는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에게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이다. 이 소명은 제한적이며 불가항력적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

칼빈의 일반은총과 같은 개념이 웨슬리의 선행은총이다. 그러나 중대한 차이점이 있다. 칼빈의 일반은총에는 타락한 인간의 부분적인 회복의 개념이 없으나, 웨슬리의 선행은총에는 부분 회복의 개념이 있다. 두 신학에서의 이런 차이가 구원론에서 엄청난 상이점을 가져온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데, 왜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칼빈과 웨슬리의 대답은 서로 다르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와 멸망받을 자를 예정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웨슬리에 의하면 인간이 그들의 자유로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웨슬리의 선행은총은 하나님이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고 그 은총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인간에게 주지만, 인간은 자유의지의 결단으로 구원으로 향하는 마음의 문을 열 수도 있고 닫을 수도 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구원의 주체=칼빈은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함으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와 그 은혜의 불가항력성을 강조하는 칼빈신학은 인간의 무능력성을 들어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루어진다고 역설한다. 이것을 ‘신 단동설’(monergism)이라고 한다.

그러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주어지며, 선행은총은 완전 타락한 인간을 어느 정도 회복해 응답능력을 가진 책임적인 존재가 되게 했다는 웨슬리신학은 은혜가 모든 사람을 위해 자유롭다는 점에서 칼빈신학과 다르다.

즉, 인간이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구원해 주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은총의 주도권과 인간 자유의지의 조화를 이루기 위한 이론을 웨슬리안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복음적 신인협동설’(evangelical synergism) 이라고 한다.

▲예정론=칼빈의 예정론을 이중예정(double predestination)이라고 한다. 이는 한 사람을 두 번 예정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자와 멸망받을 자(선택과 유기)로 모든 인간을 미리 정해놓았다는 것이다.

창세전에 무조건적으로 예정되었다는 이러한 칼빈주의의 예정론에 반대하면서, 웨슬리는 하나님은 창세전에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도록 예정하셨다고 보았다. 즉 믿음이 조건이 되는 예정이다.

▲성화(성결)에 대한 해석=성화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칼빈과 웨슬리신학의 근본적 차이는 ‘한 개인의 성화가 이 땅에서 완전히 이루어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연결된다.

칼빈신학에 의하면 신자는 성화를 통해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간다. 그러나 이 땅에서 완전성화는 불가능하며, 죽음 이 후에야 가능하다. 따라서 성화는 사망에 이르러서야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점진적인 과정이다.

반면 완전성화는 웨슬리신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웨슬리는 이 땅에서 신자가 살아있는 동안에 완전성화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칼빈과 웨슬리 단순 비교는 안돼”
“관용, 유연성으로 서로 대화해야”

한 교수는 칼빈과 웨슬리신학의 이와같은 차이점들을 설명한 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서로 다른 주제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바울서신(갈라디아서, 로마서)과 야고보서를 한 쪽의 잣대로 평가한다면 서로가 잘못이라고 비난할 수 있다”며 “두 서신은 서로 다른 상황에서 다른 독자들을 대상으로 다른 차원의 교훈을 주고 있다. 칼빈과 웨슬리의 신학도 이와 같이 이해해야 개신교회의 신학을 통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칼빈과 웨슬리 사이에는 약 2세기의 시간적 차이가 존재한다. 따라서 그 둘의 신관과 인간관 그리고 구원론의 전개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한 교수의 주장이다.

한 교수는 또 칼빈의 예정론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이 설명함으로써 우리의 주의를 요구하고 있다.

“예정론은 원래 구원의 확신을 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고, 그런 동기에 충실히 봉사했다.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믿음으로 얻는 칭의와 중생론 말미에 예정론을 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이미 구원을 얻은 자에게 그 구원의 근원이 하나님의 뜻에 있다는 가르침은 엄청난 확신과 위로, 감사를 가져오게 된다.

그러나 구원의 경험 이전에 예정된 자와 아닌 자를 구분하려는 시도는 또한 엄청난 모순을 안고 있다. 웨슬리 당시나 오늘이나 예정론에 대한 논쟁은 이 점을 바로 구분하지 못한데 있다고 본다. 하지만 칼빈도 예정론을 사변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우리의 사고 수단으로써 예정론을 파악하려는 모든 시도는 무익하고 위험한 것이라고 한 것을 되새겨야한다. 웨슬리가 구원의 확신으로 가르친 영의 증거(성령의 직접증거와 우리 영의 간접증거)에 칼빈의 예정론을 포함시킨다면 확신론은 더욱 확실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 교수는 이날 발표의 말미에서 웨슬리의 관용 정신을 예로 들면서 “나와 다른 신학을 배격하거나 정죄해선 안 된다. 우리는 관용과 신학적 유연성을 가지고 서로 이해하도록 노력해야한다. 우리가 서로 대화한다면 신학의 폭과 깊이는 더해갈 것이며, 이는 한국신학의 발전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