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로 불치병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며 자기의 삶을 저주하는 사랑하는 아들의 목을 졸라 숨지게 한 비극의 장본인인 아버지에게 같은 아픔과 고통을 느끼며 심심한 위로와 동정의 마음을 보내고 싶다. 불치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아픔과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 것임을 나도 경험했기 때문이다. 머리 뼈가 벌어지는 극심한 고통을 당하며 비명을 지르는 나의 어린 아들을 바라보며 나도 극심한 아픔과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원망하고 조상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은 비참을 나도 겪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목 졸라 숨지게 한 비극의 장본인을 충분히 이해하고 동정하며 위로하고 싶다.


둘째로 비극의 원인을 생각해 본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모든 인류에게는 죄 값으로 인한 저주의 세력이 흐르고 있다. 그 저주의 세력이 몸에는 질병으로 성품에는 악한 기질로 영혼에는 죽음과 멸망의 그늘로 나타난다. 그 저주의 세력이 사람들에 따라서 그 정도의 차이가 있다. 북방 이스라엘 왕조에게는 그 죄악과 저주의 세력이 보다 강하게 나타났고 남방 유다 왕조에게는 그 죄악과 저주의 세력이 보다 약하게 나타났다. 결국 질병과 악한 기질과 멸망에는 유전적인 요소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어느 한 사람의 불행한 비극적 삶을 어느 한 사람이나 어느 한 사건의 죄 값으로 임한 저주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가리어진 비밀이다.

셋째로 저주의 세력을 극복할 방안을 생각해본다. 기독교는 저주를 극복하고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는 종교이다. 십자가는 인류의 죄 값 위에 임한 저주가 나타난 곳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인류의 모든 죄와 저주를 담당하셨을 뿐 아니라 죄와 저주가 되셨다. 그리고 대신 인류의 혈통 속에 흐르고 있는 죄와 저주의 세력을 끊으셨다. 결국 저주 받을 죄인이 십자가 앞에 설 때 그의 저주가 십자에 옮겨지는 교환의 은혜를 받게 된다. 벤허와 그의 사랑하는 어머니와 여동생이 십자가 앞에 섰을 때 몸의 질병과 마음의 증오가 치유되는 교환의 은혜를 받았고 강도가 십자가 옆에 달렸을 때 그의 영혼에 깃 들었던 죽음과 저주의 세력이 끊어져 영생과 낙원으로 옮겨지는 축복을 받았다.

넷째로 저주의 세력을 축복으로 바꾼 한 사람을 생각해 본다. 두 팔과 한 다리가 없는 불행한 장애아로 태어난 레나 마리아를 생각해 본다. 그는 비극을 극복하고 밝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닌 행복한 여인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부모님의 극진한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스웨덴이라는 조국의 따뜻한 배려 속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넓고 넓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품 안에서 아름답게 자란 레나 마리아가 밝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닌 행복한 사람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레나 마리아는 자신의 불행을 탓하지도 않았고 동정하지도 저주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장애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정도로 떳떳하고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살고 있다. 레나는 자신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며 자신을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다섯째 우리도 비극의 주인공들인 그 아들과 아버지를 행복한 사람들로 만들 수는 없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레나 마리아가 비극을 극복할 수 있었던 데는 부모님의 극진한 사랑과 보살핌, 조국의 따뜻한 배려, 그리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우리의 친척들과 이웃들 그리고 우리의 조국은 어떠한가? 불치의 병을 이어 받은 아버지와 아들은 병으로 인한 고통뿐 아니라 이웃과 조국의 무관심과 냉대에 더 큰 아픔과 고통과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 거액의 병원비를 충당하기도 어려웠다. 불행과 비극은 인류의 공동적인 책임으로 일어난 것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공동적인 책임을 느끼며 따뜻한 배려의 손길을 폈던들 그런 슬픈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섯째 삶의 가치와 행복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 육신의 생명을 억지로 연장해서 오래오래 장수하는 것이 반드시 인생의 가치와 행복은 아니다. 이 세상의 삶은 잠간 지나가는 나그네와 같은 삶이다. 아픔과 고통은 필연적이다. 영원에 잇댈 수 있는 가치 있는 삶을 살다가 떠날 때는 가볍게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이 인생을 바로 사는 것이다. 누가 말한 대로 별세가 인생이고 죽는 것이 참된 안식이다. 영원에 잇댈 수 있는 가치 있는 삶 즉 사랑과 위로와 도움을 베푸는 삶을 살다가 미련 없이 가볍게 이 세상을 떠나도록 항상 준비하는 것이 인생을 바로 사는 것이다. 우리 개인들과 민족의 비극을 십자가의 사랑의 정신으로 극복하고 모두 함께 행복하게 사는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자.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담임,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