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위와 같은 제목의 글을 쓸만한 사람이 못 된다. 설교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설교를 제대로 하는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일마다 주일 설교를 하고 수요일마다 수요 설교를 하고 새벽마다 새벽설교를 한다. 나는 분명히 설교를 잘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설교하는 것을 좋아하고 설교하는 것을 즐긴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은혜를 받기도 하고 설교를 하면서 은혜를 받기도 한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뿐이다. 여기에 실리는 글은 "한국교회 설교 달라져야 한다" 라기 보다는 "나는 지금 설교를 이렇게 한다" 이다.


나는 최근 수년 동안 설교 준비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과거에 반드시 참고하던 여러 권의 주석들을 거의 읽지 않는다. 최근에는 성경책만 읽고 설교 준비를 하는 경우가 많다. 설교를 너무 잘 하려고 힘쓰지도 않는다. 조용히 성경을 읽는 가운데 내가 깨닫고 느끼는 점들을 그대로 소박하게 말하려고 한다. 성경 텍스트를 중요하게 여기되 텍스트적 교훈만을 일방적으로 너무 강조하기 보다는 오늘의 삶의 컨텍스트와 연결시키면서 컨텍스트적 이해와 적용을 강조하며 고백적이고 간증적인 설교를 주로 한다. 나는 대분의 경우 설교를 세 가지 대지로 나누어 구성한다. 이해하기도 쉽고 기억하기도 쉽기 때문이다.

나는 주일 아침에는 오늘의 성도들이 꼭 들어야 할 말씀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주제별로 설교를 하고 수요일 저녁에는 지금 우리들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성경책을 정하고 그 순서대로 설교를 한다. 무슨 설교를 하든지 항상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며 하나님께 드림과 이웃을 돕는 일이다. 나는 강변교회가 도곡동으로 이사 온 지난 1998년 4월부터 1999년 1월까지 "예수님은 누구신가?" 라는 주제로 주일 아침마다 37번 설교를 했고 1999년 2월부터 7월까지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주일 아침마다 20번 설교를 했다. 그 후에는 "교회는 어떤 곳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십자가와 나" 라는 주제로 주일 아침마다 설교를 했으며 2001년 7월부터 지금까지 나는 산상설교의 순서에 따라서 "복 있는 사람은?" 이라는 주제로 주일 아침마다 주제 및 강해 설교를 하고 있다. 수요일 저녁에는 그 동안 시편, 전도서, 출애굽기를 장별로 강해 설교를 해왔고 2001년 6월부터 지금까지 나는 사도행전을 강해 설교하고 있다. 여기 지난 12월 9일 주일 마6:1-8을 본문으로 "복 있는 사람은?" 이란 주제 하에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설교한 설교의 내용을 요약하여 실린다.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아침 매우 중요한 얘기를 합니다. 행복의 비결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한 평생 사람 의식하면서 사람 앞에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얼굴도 마음도 인격도 꾸미며 사람 앞에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삶은 힘이 들고 무겁습니다. 행복하지 못합니다. 둘째로 한 평생 자기를 의식하면서 자기 앞에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표준입니다. 자기의 감정과 의지와 편견이 절대 표준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무시하고 자기 도취에 빠져서 자기 앞에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삶도 힘들과 괴롭습니다. 오늘 아침 예수님은 그런 힘든 삶을 다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 의식 다 벗어버리고 자기 의식 다 벗어버리고 하나님만 의식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기쁘고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이 물론 두려울 수도 있지요. 그러나 사실 하나님이 그렇게 두려운 분은 아닙니다. 두 손만 들면 누구든지 다 받아주시고 품어주시는 은혜로우신 분입니다. 여러분들 행복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바로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1.첫째 사람 앞에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 앞에서 의를 행하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이런 사람을 가리켜 예수님은 외식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외식이라는 말은 배우라는 말입니다. 가식으로 꾸미는 사람을 말합니다. 믿음이 있는 것처럼, 사랑이 있는 것처럼 겉 모양을 아름답게 꾸미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솔직하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하고 단순하지 못합니다. 기도할 때도 솔직하고 진실하고 단순하게 하지 못합니다. 말을 빙빙 돌려서 복잡하게 많이 합니다. 구제할 때도 조용하고 은밀하게 하지 못합니다. 자기를 나타내고 들어내며 떠들썩하게 합니다. 자기 이름이 꼭 들어가는 곳에만 구제를 합니다. 사람 앞에서 사는 사람은 자유함과 떳떳함을 누리지 못합니다. 거짓과 위선으로 자기를 꾸미며 살아가기 때문에 항상 불안합니다. 양심의 자유함도 영혼의 기쁨도 누리지 못합니다. 한 마디로 어둡고 불행한 삶을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 앞에서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판단을 의식하며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고전4:3). 오늘 아침 예수님은 사람 앞에서 사는 삶을 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2. 둘째 자기 앞에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항상 자기 자신을 의식하면서 자기 앞에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행과 구제를 하면서 나팔을 불지는 않지만 자기 선행에 스스로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를 삶의 표준으로 삼고 자기 앞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다른 사람의 판단을 무시합니다. 내가 정해 놓은 기준에 따라서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극히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고 극히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자기 만족에 도취되어 사는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 집착해서 살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자기를 너무 의식하며 살지 말라는 것이고 자기 앞에서의 외식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의식하면서 자기 앞에서 사는 사람은 우월감과 자만에 빠져 살거나 열등감과 좌절에 빠져 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앞에서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판단을 의식하며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고전4:3,4). 오늘 아침 예수님은 자기 앞에서 사는 삶을 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3. 셋째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꼬람 데오)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다 들어내 놓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신자의 삶인데 다윗이 그렇게 살았고 수가성 여인이 그렇게 살았고 세리 마태가 그렇게 살았고 사도 바울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칼빈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칼빈의 삶의 원리가 바로 하나님 존전 즉 꼬람 데오 였습니다. 이런 사람은 솔직합니다. 진실합니다. 단순합니다. 말을 많이 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를 솔직하고 단순하고 직설적으로 합니다. 이런 사람은 구제를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소리 없이 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를 망할 죄인으로 여기며 살고 남을 자기보다 낳게 여기며 삽니다. 이런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 설 때 자기는 망할 자라고 고백했고 다윗은 하나님 앞에 설 때 자기는 계명을 범한 망할 죄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메시야 앞에 설 때 자기는 남편을 다섯이나 둔 더러운 여자라고 고백했고 세리 마태는 예수님 앞에 설 때 자기는 남들의 물건을 토색한 도둑놈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아직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망할 죄인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한 일이 없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하나님 앞에서 살지 못하고 사람들 앞에서 살거나 자기 앞에서 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은 자유함을 누립니다. 떳떳함과 기쁨을 누립니다. 사죄의 은총과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삽니다. 주의 앞에 있는 사람은 자기를 있는 그대로 나타냅니다. 자기의 약함도 자기의 부족함도 자기의 허물과 실수도 있는 그대로 나타내며 삽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약함과 궁핍과 곤난을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아침 우리들을 향해서 "하나님 앞에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기도도 하고 구제도 하라고 분부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행복입니다. 하나님 앞에 숨겨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다 들어내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하나님 앞에 다 들어내놓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복 있는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일 설교를 들은 두 사람이 화요일 강변 홈 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소감의 글을 올렸다.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지난 주일은 어떤 주일보다도 제 마음이 맑아지고 순수해짐을 느꼈습니다. 성찬식에서 많이 울어서 집에 와서 세수를 했습니다. 무엇을 더 보태지 않으시고 약함 그대로를 순수하고 진실하게 드러내시며 예배를 인도하시는 목사님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우셨습니다. 목사님의 말씀 선포는 저의 모든 감각과 가슴을 전율하고 난 후에 영혼의 저 깊숙한 곳까지 생수의 잔을 넘치게 부으셨습니다. 비단 저뿐만 이 아닐 것입니다. 변화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목사님에게서 발견한 성도들은 끝없이 거듭나고 변화되고 성화되고자 하는 마음을 지니고자 애를 쓸 것입니다. 목사님을 사랑합니다. 목사님을 저의 목자로 주신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감사하는 성도 올림" "감사하는 성도의 글은 꼭 제가 올리고 싶었던 글과도 같습니다. 강변교인들 모두 귀하신 분들이고 김목사님께서도 아주 귀하신 목사님이십니다. 아주 많이 사랑합니다. 강변교인 드림." 목회자의 보통 설교를 가슴과 영혼을 활짝 열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받아드리며 깊은 은혜를 받는 성도들 때문에 설교자는 큰 위로와 기쁨을 누리며 설교를 계속하는 것 같다.

나는 새벽기도회 때도 수요일 저녁에도 비교적 단순하고 소박하게 설교한다. 나는 최근 새벽에는 다윗과 예레미아의 절대 순종과 참회의 고백을 나의 순종과 참회로 여기며 설교했고 수요일에는 사도행전을 단순하고 소박하게 설교했다. 사도행전 12장을 본문으로는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기 위해서는 1) 야고보가 칼로 죽임 당하는 일과 2) 베드로가 잡혀서 옥에 갇히는 일과 3) 교회가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비는 일이 필요했다고 설교했고 사도행전 16장을 본문으로는 선교는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바울이 1) 루스드라에서는 디모데를 만났고 2) 빌립보에서는 루디아를 만났고 3) 빌립보 감옥에서는 간수를 만났다고 설교했다. 그런데 그런 보통 설교에도 깊은 은혜를 받고 감사를 표현하는 성도들이 있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감사의 글을 나에게 전해준 분들의 글을 여기 실린다. "사랑하는 목사님께. 새벽마다 목사님을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목사님이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하늘까지 사무치는 찬송 같아요. 하나님은 새벽에 저를 깨워주셔서 아침 이슬 같은 말씀을 가슴으로 듣게 하시고 온 종일 은혜를 주십니다. 사람들과 만나서 얘기하다가도 말씀이 떠 오르고 남편과 저녁 먹다가도 떠 오르고 설거지 하다가도 떠 오르고 … 목사님의 진솔하신 말씀을 듣고 있으면 다윗의 시편처럼 깊은 감동을 주시고 눈물을 주시고 뜨거운 가슴을 주십니다." "지난 수요 예배 시간에 목사님께서 어린 아이 이름을 일일이 부르시는 것을 보고 목사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많은 분들의 이름도 많을 텐데 저 어린 아이들까지 … 제 속에 생각이 많았어요. 그날 말씀에 크게 감명을 받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선교사들이 생사를 거는 고난을 당하는 글을 읽으실 때 제 마음이 몹시 아팠습니다. 목사님께서는 '핍박이 그립습니다' 박해가 그립습니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셨습니다. 저는 말씀을 듣고 고난 받는 자들을 무관심하여 돌아보지 않았던 것을 애통하며 회개했습니다."

나는 분명히 설교를 잘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설교를 너무 잘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설교의 스트레스는 받지 않는다. 그저 설교를 좀 쉽고 좀 단순하게 하려고 한다. 성도들에게 필요한 말씀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고백적으로 간증적으로 하려고 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항상 강조한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힘쓴다. 그런데 나의 부족한 설교를 가슴과 영혼을 활짝 열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받아드리며 깊은 은혜를 받는 성도들 때문에 나는 설교자로서의 기쁨과 행복을 누린다. 물론 모든 신자들이 다 깊은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니다. 일부 신자들은 아직도 설교가 어렵다고 말하고 일부 신자들은 아직도 열린 마음과 감사와 겸손과 사모의 마음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나의 설교에 은혜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예수님의 설교나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듣고도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설교를 잘해서 모든 사람들의 인기를 얻게 된다면 그것은 설교자에게 복이 되는 것보다는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나에게 보통의 설교의 은사 아니 부족한 설교의 은사를 주신 것도 하나님께 감사한다.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