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히브리어로 남자(이쉬)나 여자(이솨)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단지 성별(性別) 차이일 뿐입니다. 따라서 비록 여자가 남자에게서 유래되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서로 동등한 존재입니다.

실제로 성경에서는 많은 여성들의 활동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많은 여성들이 주님을 따랐으며, 주님의 복음 사역에도 여성들이 최전선에서 두드러지게 활동하는 모습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주님께서 십자가 형틀에 달리셨을 때, 주님 곁에 있던 제자들은 이리저리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주님께 생명을 얻으며 병 고침을 받았던 많은 사람들도 오히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르며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따르던 여성들은 주님께서 운명하시기까지 그 곁을 지켰습니다. 주님께서는 사흘 후 부활하셨을 때, 맨 먼저 그들에게 자신의 몸을 보여주시며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여성에 대한 차별이 만연되고 있음은 너무나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세계 많은 나라들 중 남녀의 차별 없이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들은 하나같이 문명국이며 잘 사는 나라들입니다. 우리 옛 조선시대처럼 여성들을 집안에 가두고 바깥 활동을 금기시했을 때, 우리나라는 후진성을 면치 못했고 외부의 침략으로 비통한 삶을 살았습니다. 

현재 세계의 추세로 보면, 여성들의 힘이 점점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큰 별 대처 수상은 보통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강력했던 노동조합을 상대로 “스스로 돕고 이웃을 돕는 것은 여러분들의 의무입니다”, “삶이란 주고받는 것이며, 받을 생각만 해도 안 됩니다”, “1페니도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지 않습니다. 스스로 벌지 않으면 얻을 수 없습니다”라고 거침없이 내뱉었습니다. 개인에게 주어진 자유를 존중하며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는 생각은, 대처의 영혼을 지배했습니다.

세계 인류 역사에는 여성들의 위대한 활약으로 나라와 백성을 구한 사건들이 많습니다. 많은 나라들에 여성 대통령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최초로 여성 대통령이 탄생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사랑으로 품으시고, 사랑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셨습니다. 그 사랑에는 질서와 공명과 평등이 깔려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주님 앞에서 공평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자유롭고 민주적이어야 할 교계에서 아직 조선의 틀을 깨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분명 남자와 여자를 평등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남자의 부족한 면을 여자가 메우고, 여자의 부족한 모습에 남자가 협력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러한 참 뜻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한국교회는 남성우월주의에 빠져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교회 속 여전도사들의 일상들을 가만히 보면, 깊숙한 감동 그 자체인 경우가 많습니다. 교구와 구역 식구들을 위해 노심초사 기도하며, 일일이 심방하여 그들의 문제와 고통을 함께 나누고 믿음과 용기를 심어주고 있습니다. 교회학교를 맡아 어린 영혼들과 교사들을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교회에 손님이 오거나 행사를 할 때도 늘 일선에서 수고하십니다. 새 신자를 안내하며, 그들의 신앙상담도 도맡아 합니다.

때로는 결혼식이나 행사에서 담임목사님께 필요한 비품들을 챙기기도 합니다. 이렇듯 교회 안에서 많은 일들을 담당하고 있지만, 그 수고에 비해 너무나 인색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착잡합니다. 요즘 여성 목사·장로들이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하지만 ‘여전도사’는 늘 뒷전입니다. 복음이 이 땅에 처음 들어왔을 때 여전도사들의 눈부신 활동의 사역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렇게 선교를 많이 하며 다른 나라에 도움을 주는 나라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늘 그림자처럼 주를 위해 일하셨건만, 여전도사에 대한 예우는 남성들과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어찌 보면 담임목사님 비서 같기도 합니다. 저는 여전도사에게도 담임목사와 같은 처우를 해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례금을 담임목사님처럼 대우하라는 얘기가 결코 아닙니다. 같은 사역자, 한 인격자로 대우하자는 것입니다.

예장 통합총회 헌법에는 당회 구성원을 목사, 부목사, 장로들까지로 제한했는데, 이제 전도사도 함께할 수 있도록 건의하고 싶습니다. 담임목사는 20년 시무하면 원로·공로 목사로 예우하지만, 여전도사에 대한 예우는 헌법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연금제도도 담임목사만이 아니라, 부목사와 전도사 모두에게 공평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는 노동조합이 있어 불공평한 것을 바르게 고칠 수 있지만, 교회라는 특수성 때문에 그들은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한숨만 쉬며 말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담임목사는 소임과 책무를 다해야 할 텐데, 마치 여전도사들을 하수인 같이 대합니다. 매년 정책당회에서도, 여전도사 처우 개선에 대해선 모른 체합니다. 교회 재정이 어려우면 모두 동참하면 될 텐데, 여전도사 처우에는 등을 돌리면서 담임목사에 대한 논의만 하는 것을 볼 때, 정말 ‘이건 아니다’ 싶습니다.

특히 여전도사들은 성도 앞에서 함부로 표현하지도 못합니다. 표정관리도 잘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해 담임목사의 눈 밖에라도 나면 교회를 떠나야 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기에, 정직한 건의를 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분들은 눈치만 볼 뿐입니다. 교회 지도자는 항상 언로를 열어 교회 부흥과 성도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는 잘못된 점을 서로 인식하며 함께 기도하고 해결하는 모습들을 보여야 하는데, 바르게 진언하다 담임목사의 눈 밖에 나서 교회를 떠나시는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나라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었듯, 교계에서도 담임목사와 장로들의 열리지 못한 사고가 교회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여성들이 탁월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야 합니다.

특히 교회는 공정과 평등, 원칙주의에 입각해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특히 여성들에게는 남성들이 가질 수 없는 모성애라는 위대한 마음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그들은 어머니로서, 교사로서, 그리고 누나, 언니로서 역할을 합니다. 특히 교회 안팎의 양들을 위해 자신들의 아픈 몸도 뒤로한 채 양들을 보살피며 사랑을 쏟는 아름다운 마음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따뜻하고 포근한 손길로 다른 이들을 위로해 주고 있습니다. 말없이 일한다 해서 그들의 고통을 ‘나 몰라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늘 미소를 짓는 그들의 마음속에는,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해야만 하는 간절한 외로움이 있다는 사실을 교회 지도자들과 모든 성도들이 알아야 합니다. 그들도 같은 인간입니다. 모두가 주님의 거룩한 제사장들임을 명심하시기 바라면서, 공정한 세상은 교회 안에서 모든 일들이 성경적으로 실현되어야 하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이효준 장로(부산 덕천교회,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