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외화를 벌기 위해 독일로 간호사를 파견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UBF 창립자인 이사무엘 선교사는 3명의 간호사를 찾아가 7일간의 선교사 훈련을 시키고 손으로 쓴 임명장을 건넸다. 오병이어처럼 초라해 보이고 부족한 이 순간이 바로 UBF(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해외 선교의 시작이었다.

40년이 흐른 지금 UBF는 전 세계 79개국에 1,567명의 선교사를 파송(2008년말 현재 KWMA 통계), 국내 모든 교단과 선교단체를 통틀의 2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얼마 전 독일 에링거펠트에는 각지에서 UBF 회원 1,200여명이 모여 수양회를 열었다. 수양회 주제인 ‘The Hope of God’(출 19:5~6)은 故 이사무엘 선교사가 생전에 여러 차례 전했던 말씀으로, UBF 평신도 선교사들이 자비량으로 어렵게 사역하면서도 그 정체성 지키며 40년 가까이를 달려올 수 있었던 힘이 됐다.

이 자리에 故 이사무엘 선교사가 참석했다면 그의 감회는 어땠을까. 故 이사무엘 선교사의 동역자로,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조력하며 42년을 함께했던 이그레이스 선교사를 만나 UBF의 방향와 미래, 故 이사무엘 선교사, 현재의 사역 등에 대해 긴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UBF의 시작과 간호사 선교사 파송에 이르기까지 UBF 50년 역사의 산 증인이다.

▲이그레이스 선교사.
이그레이스 선교사는 “70년대 초부터 (유럽에) 여러 차례 왔어요. 수양회 때마다 거의 따라왔는데 이화자, 설동란, 서인경 선교사님을 잘 알죠. 그 선교사님들이 서울에 오셔서 재훈련을 받고 결혼해서 미국으로도 가고……”라며 그때를 회상했다.

이 선교사는 유럽 UBF 개척 40년 역사를 소개한 영상에 대해 “처음 보는 분은 그냥 사진이 금방 금방 지나가니까 잘 모를 수 있는데 저는 초기 시절 선교사님을 잘 아니까 감회가 새로웠어요”라는 소감을 전했다. 그러면서 혼자 참석하셔서 어떠시냐는 조심스러운 질문에 “그립죠. 눈물이 얼마나 나요. 40년의 역사를 보는데, 당신 어디 있어요. 나 혼자 와서 여기 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어 “독일 역사가 오병이어인데 오병이어의 큰 역사들을 후세에 가르치게 되는 게 감사해요”라며 “닥터 리(이그레이스 선교사는 이사무엘 선교사를 ‘닥터 리’라고 불렀다)는 자기 시대 40년을 섬기는 것으로 만족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40년 역사를 계승해야죠”라고 말했다.

성경공부는 테이블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UBF의 방향과 미래에 대한 의견을 부탁했더니 그녀는 시대에 따른 적절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UBF의 사명이 대학생 선교이고 세계선교인데, 시대가 바뀔수록 스타일이 바뀌는 게 사실”이라며 어린 세대들이 하는 일을 비판하거나 적대시한다면 잘못이라고 했다. “변천은 하지만 메인(사명)은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이 선교사는 한 예로 성경공부 방식을 들었다. “성경공부를 테이블에서만 안해요. 밥을 먹으면서, 걸어가면서, 버스 안에서도 하는데 그것이 틀렸다고 비판하면 안 돼요.”라며 손녀의 일화를 전했다. 대학교 2학년이라는 이 선교사의 손녀는 대학선교의 전도 방법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단다. “‘성경공부 하지 않을래요?’, 그렇게 하면 안 된대요. 프렌드십으로 대화를 많이 하고 마음을 열도록 두세 달 준비된 상태에서 해야지 바로 성경공부하면 다음에 안 온대요.”

그러면서 이그레이스 선교사는 이번 수양회에 대해 2세들이 소망과 비전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번에 2세들이 메신저로 나왔는데 (2세들에게) 아픔이 많이 있었어요. 선교하느라 애들은 베이비시터에게 맡기고, 오직 양 치고 캠퍼스 선교하니까 애들 소감에 ‘부모는 양이 오면 고기를 주는데 자기들은 라면만 준다’고……. 천 명 이상 모이는 큰 대회인데, ‘엄마 아빠가 하는 일이 이런 일이었구나. 열심히 이런 일을 했구나. 이것이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우리도 부모의 유산을 받아서 우리도 이런 일을 해야겠다.’라며 소망과 비전을 받는 수양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라고 했다.

이어서 이 선교사는 아들이 어릴 때 자동차가 없다고 불평했다며 그런 아들이 자랑스러운 것이 한 가지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작년 모스코바 UBF의 초청으로 아들이 말씀을 전하면서 ‘아버지는 좋은 바이블 학생이고 좋은 성경선생이었다’는 거예요. 감사했어요. 지금 죽어도 여원이 없어요. 그런 믿음의 유산을 받는 것이 중요하잖아요. 아무 것도 줄 것이 없지만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가르치는 2세, 3세 선교사가 되게 하는 것이 기도제목이에요.”

故 이사무엘 선교사에 관한 비판들에 대해

故 이사무엘 선교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 때문에 오해가 많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고충을 알죠. 남편의 눈빛만 봐도 알죠. 목자님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훈련을 시키고 어렵게 했다고 하지만 남편으로서 부드럽고 자상했어요. 그렇게 젠틀한 남편은 없다고 생각해요.”라고 회상했다.

그녀는 “저를 아내로 생각함과 동시에 동역자로서 먼저 편지를 주시고 모든 것에 숨김이 없었어요. 다른 분들도 목자님을 도왔어요. 잘 동역을 이루었는데 40년 동안의 역사 가운데 어려움과 비판이 없을 수 없죠. 사탄이 얼마나……. 잠잠할 날이 없었어요, 40년 동안. 저는 남편 편을 드는 것보다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것을 위해 기도했어요. 세상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알기에 핍박이 있다는 것을 알고 도와주실 것을 믿었어요. 이명박 대통령을 세워도 100% 찬성하고 따르는 것은 아니잖아요. 세계선교도 어려움이 많았어요. 지나 보면 하나님께서 선을 이루신 것을 체험하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들어서 알게 되었다고 해서 감사해요. 다 하나님이 해결해 주셨다고 믿어요.”라고 담담히 말했다.

“선교 위해 편지하는 일… 이게 내 오병이어”

▲그레이스 선교사가 보여준 편지와 북한 엽서, 그리고 가족사진. 엽서에는 남북이 하나되는 나라가 되도록 기도를 요청하는 글이 적혀 있다. 9명의 손자 손녀와 함께 한 사진 뒷편엔 “이들이 모두 할아버지의 믿음 유산을 기억하고 3세 선교사들이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적혀 있다. ⓒ남윤식 기자
70년 초부터 편지 사역를 시작한 이그레이스 선교사는 이사무엘 선교사를 대신해 선교사들에게 편지를 보냈고, 세계 각지에서 보내온 수많은 기도제목들은 그를 거쳐 다시 세계로 보내져 함께 기도의 끈을 이었다. 그런 가운데 세계 선교의 비전이 생기고 선교사들과의 친밀해진 이 선교사는, 덕분에 차츰 선교지의 기도제목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고 기도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인터넷 시대인 요즘은 이메일을 통해 600여명의 선교사들에게 편지하고 있다며 “세계 선교를 위해 편지하는 일, 아주 작은 일, 이게 저의 오병이어에요. 제가 가진 가장 작은 것으로 세계 선교 지원을 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이그레이스 선교사는 몇 년 전부터 북한을 방문해 북한의 캠퍼스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있기도 하다.

남편의 죽음 뒤 2개월, 부활의 예수를 만나다

이그레이스 선교사는 남편을 잃은 이후 하나님께서 소망을 선물로 주셨다고 말한다. 이사무엘 선교사의 갑작스런 사망 이후 2개월을 울었다는 그녀는, 성경을 읽으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고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남편이 없어도 씩씩하게 잘 살아요. 한국과 미국에 구름떼 같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제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동역자들이 기도해주시니 감사하며 살아요. 새 믿음을 가지고 항상 찬송해요. 씩씩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