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쉬운 여론조작’ 정치공작 대신
진정한 안보 위해 셔틀외교 복원
근대 일본, 군대 위해 나라 존재
전쟁 멈출 수 없어, 팽창 계속해

한국 일본 윤석열 기시다 정상회담
▲지난 3월 16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확대 정상회담에서 한국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악수하고 있다.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4월 미국 방문에 앞서 3월 16-17일 일본을 방문해 기시다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인 5월 7-8일에는 기시다 총리가 한국을 방문해 재차 양국간 정상회담이 성사되었다. 2011년 이후 12년 만에 성사된 한일 셔틀외교다.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를 전후해 이루어진 이번 한일 셔틀외교는 한국 정부가 미국이 재구성하고 있는 아시아-태평양 안보, 경제질서에 적극 동참하고 협력하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코로나 확산으로 가로막혔던 양국 간 여행을 정상화하고 2018년 발생했던 한일 무역분쟁을 종결시켜 양국 간 외교관계가 우호와 협력을 향해 나아갈 것임을 확고하게 시사하고 있다.

이번 셔틀외교를 통해 확정된 한일 무역분쟁 종료, 그리고 지소미아(GSOMIA·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정상화는 한국 정부가 반일 감정을 조장하던 이전 정권의 정치공학을 포기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아시아-태평양 안보·경제동맹 질서에 적극 순응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사실 반일감정 활용은 국내 정치의 차원에서만 본다면 상당히 편리하고 유용한 여론조작 방편이다. 보수와 진보 정권 양측 모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정치적 난관에 처했을 때 언론과 미디어를 통해 반일 감정을 조장하고 국민들 불만을 외부로 돌리는 일을 여러 차례 반복해 왔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정부의 정책 실패나 정치권 부패사범 등으로 급격한 지지율 하락이 발생하는 경우,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왔던 것이 바로 반일 정치공작이었다.

이 반일 정치공작의 중심에는 일제강점기 일본 지도부가 한국인들에게 저지른 여러 제국주의 범죄에 대한 사죄, 그리고 한일기본조약(1965) 청구권 협정을 둘러싼 피해자 배상금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일본은 메이지 유신(1868) 이후 1945년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에게 궤멸적 패배를 맛보기 전까지, 군국주의에 기반을 둔 호전적 팽창주의 정책들을 국정 운영의 기본 방침으로 삼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 사회 체계 전반에 급격한 변화를 초래했지만, 일본 정치의 근대화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1천 년 넘게 이어져 온 무벌(武閥) 중심의 일본 정치문화는 사쓰마 번의 해군, 조슈 번의 육군 중심 번벌 정치로 이어졌다. 근대화 시기 일본은 군대가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군대를 위해 존재하는 나라였다. 군대의 문민통제란 요원한 일이었다.

군대는 전쟁을 통해 예산을 확보하고 조직의 규모를 늘린다. 그리고 장성들과 장교들은 전쟁을 통해 명성을 얻고 계급을 높인다. 따라서 군대가 나라를 다스리던 일본은 어느 한 순간도 전쟁을 멈출 수 없었다. 일본의 군국주의가 전쟁을 통한 제국주의적 팽창욕구를 끊임없이 증폭시키면서 일본을 둘러싼 모든 주변국들은 일본의 전쟁 대상국이자 식민지배 대상국이 되었다.

이 시기 일본은 명백한 전범국이었다. 일본은 가장 먼저 류쿠(오키나와)와 홋카이도 전역을 식민지화하고, 다음으로 청일전쟁을 통해 1895년 대만을, 러일전쟁을 통해 1905년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았다. 일본의 번벌 군부는 국민 전체를 군대의 소모품에 불과한 병사처럼 다뤘다. 그리고 이 군국주의 통치체제를 그대로 대만과 한반도로 이식했다.

일제가 주도한 강제징용과 성노예 범죄는 한반도에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했지만, 일본의 지도자들은 여기에 대해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했다. 애초 일본 통치체제 자체가 전근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일본은 국민을 위한 국가가 아니라 소수의 무벌·번벌 지도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국가였고, 국민국가나 헌정(憲政) 같은 근대적 정치이념이 제대로 뿌리내릴 수 없는 정치적 토양 위에 선 나라였다.

윤석열 기시다 한국 일본 대통령 총리
▲(왼쪽부터) 지난 5월 7일 G7 정상회의를 앞두고 답방 형식으로 한국을 방문한 기시다 총리와 윤석열 대통령이 악수하고 있다. ⓒ대통령실
태평양 전쟁 패배 및 원폭 피격
당한 끝에, 군국주의 통치 마감
日 식민지배 배상 책임 있는 이들
박정희, 일본, 한국인 다수, 진보

한국이 전근대적 군주제 전통을 스스로 포기하지 못한 것처럼, 일본은 군국주의 전통을 자발적으로 포기하지 못했다. 결국 태평양 전쟁에서의 참혹한 패배, 두 번의 원폭 피격을 통해 겨우 강제적으로 군국주의 통치체제를 버려야 했다.

전범국 일본이 주변국에 끼친 피해는 막대했다. 특히 대만과 한국은 일본 열도 바깥에 최초로 생겨난 일본 식민지였기에, 다른 지역보다 훨씬 오래 일제의 학정을 겪어야만 했다. 이 학정을 직접 겪은 한국인들이 해방 후 일본에 대해 가졌던 적개심과 분노는 대단한 것이었다.

다만 한국전쟁을 통해 한국인들의 적개심이 북한과 중공, 소련으로 분산되면서, 일제의 학정은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게 되었다. 그리고 냉전으로 한국·대만·일본이 미국이 주도하는 동맹체제 안에 포섭되면서, 한국 정부는 안보와 경제협력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본과 외교관계를 정상화해야 했다.

1965년 한일기본협정 체결은 냉전이라는 잔혹한 안보현실 속에서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택해야 했던 선택지였고, 그 선택지는 후대에 와서 돌이켜보건대 한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최선의 선택지 가운데 하나였다. 한국과 일본의 외교관계 정상화 조치는 국가 안보와 경제발전 측면에서 우리나라에 대규모의 장기적 이익을 안겨다 주었다.

그러나 한일 기본조약이 한국에 가져다준 장기적 이익은 일제강점기 중 부당하게 고통받은 다수 국민들과 강제징용 피해자들, 그리고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책임을 방기한 덕분에 확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조약으로 인해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받은 식민지배 배상금과 차관 중 극히 일부만이 강제징용으로 인해 사망한 이들에게 지급되었을 뿐이고, 그 외에 일제의 식민지배 피해자 거의 모두는 어떠한 실질적인 배상도 받지 못했다.

여기에는 크게 네 집단의 책임이 존재한다. 첫째는 한일 기본조약 협상과 체결을 추진한 박정희 군사정권, 둘째는 박정희 군사정권과 외교관계 정상화 협상에 나선 일본 정부, 셋째는 강제징용 피해자들과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에 대한 무관심과 멸시를 당연시한 다수 한국인들, 마지막으로는 피해자들의 아픔과 고통을 빌미로 정치·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진보정치 세력이다.

먼저 박정희 군사정권은 한일 기본조약 체결 후 식민지배 배상금과 차관을 직접 수령하였으나, 피해 실태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배상을 이행하지 않은 책임을 갖고 있다. 사실상 가장 주도적으로 피해배상을 가로막은 집단이라 볼 수 있다. 물론 그럴 만한 명분은 가지고 있었다. 피해자 배상 전에 국가의 근대화·산업화가 먼저라는 명분이다.

이 시기 추진된 국가경제 근대화·산업화의 과실 대부분은 정권 수뇌부와 재벌들에게 돌아갔지만, 그 중 일부는 소소하게나마 국민들에게도 분배돼 그들에게 빈곤 탈출과 사회적 신분상승의 기회를 부여했다. 이 점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부정할 수 없는 공로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경제가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도 일제 식민지배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것은 명백하게 국가가 국민에게 저지른 폭력으로 규정할 수 있다. 국가가 피해자 배상을 위해 수령한 자본을 임의로 다른 목적으로 전용하여 피해자들에게 일방적 희생을 강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박정희 군사정권이 일제강점기 식민지배 피해자들에게 행한 이 정치적 폭력은 오늘날까지 우리가 한일 외교관계를 논할 때 잘 거론되지 않는다. 이 폭력의 책임을 인정하면 일본의 추가적인 사과 및 배상을 요구할 명분과 근거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식민지배 피해자들의 일방적 희생을 바탕으로 경제성장의 과실을 누린 우리 국민 다수에게 양심의 가책을 자극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계속>

제17회 교회법 세미나
▲박욱주 박사. ⓒ크투 DB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