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지저스 아미 2019년 9월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힘써 기도하시는 예수님. ⓒfreebibleimages.com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4-35)”.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1-42)”.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세 번을 우셨습니다. 3이라는 숫자는 예수님과 제자, 우리 신앙인들에게 익숙한 숫자이기도 합니다.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으신 후, 마귀에게 이끌리어 광야에서 세 번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베드로에게 닭 울기 전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주님 말씀에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씩 부인했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것과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의 눈물의 기도로 땅에서의 마지막 사명을 다하시면서, 성경에서 3이라는 숫자는 신앙인들에게 친근하게 와 닿는 숫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하러 올라간 산에서 용모가 변화 되셨기에 그 이름을 변화산이라고 보통 부릅니다. 제자들이 산 이름을 기록하지 않아 그곳이 어딘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성경 기록들을 통해 다볼산이 변화산이라는 견해들이 많습니다.

이곳 변화산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세 사람을 데리고 기도하기 위해 산으로 오르셨고 그 산에서 용모가 변화되는데, 그 광경을 목격을 한 제자 역시 세 사람이었습니다(눅 9:28-36).

다니엘서 3장에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자신들이 가장 사랑하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신앙의 큰 위기를 맞이합니다. 우상에게 절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의지할 것인가 묻는 이들에게, 바벨론 제국 황제인 느부갓네살 왕 앞에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생명을 걸고 한 판 승부를 벌였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마치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두고 위기에 처했던 한국교회와 같은 상황이었는데, 당당하게 승리를 거뒀습니다.

조선 시대 일본의 침략을 당했을 때도 진주대첩, 행주대첩, 한산대첩 등 세 번의 대첩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 사람들도 3(셋)이라는 숫자를 좋아합니다. 승부를 세 번 만에 결정짓는 삼세판은 우리 문화와 깊은 연관이 있으며, 무슨 일이나 운동 시합을 한다거나 가위바위보를 해도 3판 2선승으로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더구나 셋째 딸은 선도 안보고 혼인시킨다는 옛말도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총 세 번 울음 중 가장 먼저 우신 베다니의 나사로 무덤 사건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우는 것과 그녀와 함께 있던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 11:35).

이 예수님의 눈물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병마에 힘없이 쓰러진 나약한 한 친구, 나사로를 향한 깊은 연민의 정과 더불어, 오빠를 잃은 두 자매의 억제할 수 없는 슬픔 앞에서 함께 고통을 나누시는 예수님의 깊고 깊으신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째 우신 것은 예루살렘 입성 중,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면서입니다. 이 눈물은 동족인 이스라엘을 향한 눈물로, 민족을 향한 뜨거운 애국심이 담겨 있는 눈물일 것입니다.

애국심 자체가 신앙이 될 수는 없지만, 우리 신앙 안에는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심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나라와 국경을 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에(행 17:27), 신앙 안에서 하나님 주신 조국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조국을 뜨겁게 사랑했음을 의심치 말아야 하겠습니다.

한일 정상회담 태극기 일장기 경례 KBS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가 양국 국기 앞에서 목례하고 있다. 기시다 총리가 더 깊이 허리를 숙인 모습이나, KBS는 윤 대통령이 일장기에만 고개를 숙였다고 보도했다. ⓒ대통령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신앙인들은 애국심이 이상하리만치 변질되어, 나라를 위하는 마음과 행동이 저마다 다른 점에서, 교회로서의 역할이 미흡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어느 집사님이 보내신 문자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나라를 위해 기도하면 됩니다. 한일 관계에서 외교는 완전 제로, 빵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희 집 조부님 제자들 중 일제 때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하여 큰아버님 15세 때쯤 강제로 일본에 끌고 가 지금까지 행방불명, 아들 하나 남은 저희 아버님을 데리고 전국에 떠돌아다니시며 숨어 지내다 배신한 제자들에 의하여 일찍 두 분 다 돌아가시고 해방되자 배신한 저희 조부님 제자분 도지사, 시장, 경찰서장 등이 (일제 앞잡이 노릇한 분들임) 저희 아버님께서 와서 스승께 큰 죄를 지었다며 사죄하더라는 겁니다. 일본이 우리에게 피해를 주었으면 보상을 제대로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윤 대통령이 빈손으로 와서 어제는 모든 언론들을 통해 중계방송까지 하며 해명했다는 겁니다. 저는 중도보수파인데, 중도 입장에서 보면 아무 얻은 게 없으니 구걸 외교라는 겁니다. 그리고 피해자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겁니다. 물론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 입장에서 보면 다르겠지만요.’ 이런 문자가 와서 너무 황당하고 놀라웠습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거니와, 일제강점기 시대 신앙인들의 활약상은 다 어디로 가버리고 자신의 집안과 좌파들의 말에 현혹되어 나라를 사랑하고 애국하는 마음 자세가 오염이 되었는지, 앞으로 이 나라의 미래가 참으로 걱정이 됩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께서 기도함으로 세워진 나라이며, 주님의 이름으로 피와 땀과 눈물로 기도한 신앙인들과 이 땅에서 주를 위해 순교한 순교자들의 눈물의 기도가 있었기에 절대로 좌파나 주사파, 공산당에 넘어가지 않을 줄 확실히 믿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단 위에서 말씀을 전하시는 주의 종들과 장로들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밖에 없으며, 교회 지도자들의 나라 사랑하는 애국심은 주님을 사랑함 같이 되살아나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우신 것은 겟세마네 동산이었습니다. 이곳은 기드론 시내 동쪽 감람산 기슭의 작은 동산입니다. ‘겟세마네’는 기름을 짜는 곳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종종 이곳을 찾아 기도하러 오셨고, 마지막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이곳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의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히브리서 5장은 말씀합니다. 이 눈물 속에는 인류의 절망적 운명을 뒤바꿀 십자가 복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순절 막바지, 우리 신앙인들의 자세는 예수님께서 흘리신 눈물이 우리에게도 필요함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저마다 자유 대한민국을 위해, 신앙인들의 영적 각성과 비신앙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긍정적인 눈물이 말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시련과 고통을 겪을 때 예수님은 멀리 계시고 무심하게 침묵하시는 듯 보이지만, 실상 내가 겪는 모든 삶의 국면에 깊이 동참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늘 우리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계심을 깊이 마음으로 느껴야 합니다.

우리 주변 신앙인들을 비롯해 비신앙인들은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날 때, 예수님을 찾기보다 다른 존재나 수단을 먼저 떠올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것을 넘어, 나에게 정말 필요하고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일깨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나와 우리를 위하여 세 번의 눈물을 가슴 깊이 감동으로 적시고 사랑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우는 사이를 이뤄가는 것이 우리가 한평생 누리며 간직해야 할 믿음의 눈물임을 사순절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고 감동하며, 다가오는 종려주일을 주님의 눈물로 맞이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