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문제 부분에 대한 김구원 교수의 입장 (下)

입력 : 2018.09.06 11:16

사무엘상
▲ㅇ

[16]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에게 이르되”라는 구절은 사무엘의 연설이 사울의 대관식, 즉 길갈 집회 중(11:14-15)에 행해졌음을 보여준다. 11:14-15에 묘사된 사건(사울의 왕위 확증을 위한 길갈 집회)으로부터 시간이나 장소가 변했다는 표지가 본문에 없다. 따라서 사무엘의 연설은 길갈 집회에 모인 “온 이스라엘”에게 행해졌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굳이 시간을 따지자면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기뻐한” 직후(11:15)에 연설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울의 왕위 확증을 기뻐한 무리 중에 사무엘의 이름이 빠진 것은 사무엘의 연설 내용을 암시하는 효과를 지닌다. 사울과 백성들의 축제 분위가 잦아든 후 사무엘은 단상에 올라 말하기 시작한다.

Since there is no mention of a change in time or place, we assume that the spatial setting for chap. 12 remains in Gilgal, and the temporal setting is in the immediate aftermath of the ‘rejoicing’ of 11.15.

12장 연설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11장의 마지막 장면과 같다는 것은 삼상 12장 1절에 대한 원문의 관찰에서 합리적으로 추론 가능한 지식이다. 비슷한 관찰을 한 주석으로 다음의 예들을 보라: Vannoy, Covenant Renewal at Gilgal, 9: Gordon, 1 and 2 Samuel, 125; Birch, 1 Samuel, 1060: Woodhouse, 1 Samuel, 213. 다음은 Vannoy의 설명이다. 보드너의 설명과 매우 유사하지만, 보드너는 Vannoy를 인용하지 않는데, 그도 누군가를 인용할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The absence of a time or place designation at the beginning of I Samuel 12 is an indication that it is intended to beunderstood as related to the renewal of the kingdom at Gilgal which was briefly summarized in the last two verses of I Samuel 11. See further Chapter III, Sections 1 and 2 A.

나아가, 김구원 교수는 삼상 12장의 연설이 사울의 대관식의 일부, 즉 왕위의 “확증 단계”에 해당함을 주장하는데 그 관찰을 사용하지만, 보드너는 관찰을 언급하는 것으로 멈춘다.

본문에 대한 관찰과 그로부터의 합리적인 추론의 경우 굳이 다른 권위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은 다음의 예를 통해 알 수 있다.

다음은 사무엘상 15장 9절 (“사울과 백성이…<아각을> 남기고”)에 대한 Alter와Bar-Efrat의 해설이다.

알터의 해설
9. And Saul, and the troops with him, spared Agag. The Hebrew says simply "Saul and the troops spared Agag," but because a singular verb is used with the plural subject, it signals to the audience that Saul is the principal actor and the troops only accessories. (Alter)

바르-에프랏의 해설
Das Verb „es tat ihm leid" steht im Singular, obwohl das Subjekt Saul und das Volk ist. Dies macht klar, dass Saul die Initiative hat und sich das Volk ihm anschließt (Bar-Efrat).

이 두 학자 모두, 본문의 주어는 복수(‘사울과 백성’)인데 동사 ‘남기고’가 단수(ויחמל)인 것을 주목하고 그것에 근거해 사울이 더 책임이 크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하지만 그 둘은 그 주장을 함에 있어서 누구도 인용하지 않는다. 본문 관찰에서 합리적으로 추론 가능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17]
요나단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사울의 아들”로 불린다. 그러나 13장에서 이미 사울의 왕조에 대한 사무엘의 심판이 선포되었기 때문에 사울의 아들 요나단의 미래도 그다지 밝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이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이긴 하지만 사울과 구별되는 면모를 가졌다. 첫째, 등장 인물의 첫 대사가 그 인물의 성격을 규정한다면 “돌아가자”(9:5)라고 말한 사울과 대조적으로 요나단은 본 단락에서 블레셋 진영으로 “건너가자”(14:1)라고 말한다. 요나단은 사울보다 진취적이고 용맹하다. 요나단의 용감한 행위는 나중에 바위 속에 숨은 자들, 도망한 자들, 블레셋에 망명한 자들이 다시 사울의 군대로 “건너오게”하는 역사(21-22절)도 일으킨다. 둘째, 요나단이 자신의 계획을 아버지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사울이 그 무모한 계획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지만, 그것은) 사울과 요나단 사이의 관계에 문제가 발생할 것임을 미리 암시한는 역할도 한다. 이후에 요나단은 아버지를 배반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였음을 인정하고 다윗을 돕는다.

To be sure, the first character mentioned is Jonathan, and on this occasion he is called ‘the son of Saul’. Recalling that Saul’s house will not endure, it is counter-intuitive that the rejected king has a rejected son who will be the catalyst for an Israelite victory against considerable odds…As mentioned in the above analysis of 1 Samuel 9, a figure’s first words can be an important moment for characterization, as Saul’s initial speech (‘Come, let us go back’) illustrates. Here, Jonathan’s first recorded words are: ‘Come, let us pass over…’ Not only does this reinforce the idea of Jonathan as a risk-taker…This wordplay is important because it anticipates a reversal in this chapter: through Jonathan’s endeavors in 1 Samuel 14, those ‘Hebrews’ who previously ‘passed over’ will return to the camp of Israel (see 14.21)… The final clause of 14.1 reports a measure of secrecy in Jonathan: ‘But he did not tell his father’. The motif of screcy is a vital component of the plot in 1 Samuel 14, and it also produces a felex to chap. 10, where Saul does not ‘tell’ his uncle about the matter of the kingdom. It is hard to know if Jonathan’s secrecy signals an estrangement between Saul and JonathanStill in view of the larger narrative there may be hints of the former.

요나단이 삼상 14:1에서 처음으로 “사울의 아들”로 불린다는 사실은 보드너가 최초로 발견한 것이 아니다. 이미 심판을 선고 받은 “사울”의 아들이 곧 벌어질 전투의 영웅이 될 것이라는 것은 저자가 의도한 아이러니이며, 이것도 본문에서 추론 가능한 것이다. 또한 등장 인물의 첫 대사가 그 인물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는 것은 내러티브에 관한 기본 교과서에 반복되어 등장하는 내용이다 (speech를 통한 characterizaiton의 개념). 사울과 요나단 사이의 관계 문제는 14 장 1절 마지막의 “그 아비에게는 고하지 아니하였더라”라는 말에서 추론가능하다. 이 부분에 대해 Woodhouse는 그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But he did not tell his father” (v. 1b). This is the first hint that all may not have been well between this son and his father.

요나단이 사울에게 말하지 않고 공격 나갔다는 본문이 그 둘 사이의 험난한 관계에 대한 힌트가 된다는 Woodhouse의 설명은 보드너의 설명과 대략 일치한다. 하지만 보드너는 Woodhouse를 인용하지 않는다. 누구의 권위에 의존해 말할 필요는 없는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반적 내용을 해설함에 있어 필자가 사용한 표현도 보드너의 그것과 다른 점이 많다.

[18]
3절은 사울을 수행하는 제사장 아히야의 족보를 소개한다. 아히야는 엘리의 증손, 비느하스의 손자, 이가봇의 형 아히둡의 아들이다. 이 족보는 삼상 1-4장에 기록된 엘리 가문의 비극적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상기시킨다. 엘리 가문도 (사울의 가문처럼)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받았었다. 본문은 버림받은 제사장 가문과 버림받은 왕의 가문이 함께 일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In addition to the 600 men, there is another member of the king’s retinue: ‘Ahijah son of Ahitub, Ichabod’s brother, son of Phinehas son of Eli, the priest of the LORD in Shiloh’. At the very least, this long description of Ahijah and his pedigree evokes a host of narrative memories

삼상 14장 3절(“아히야는 에봇을 입고 거기 있었으니 그는 이가봇의 형제 아히둡의 아들이요 비느하스의 손자요 실로에서 여호와의 제사장이 되었던 엘리의 증손이었더라”)에 대한 관찰이다. 족보에 언급된 인물을 보라: 특히 “이가봇, 비느하스, 엘리”는 1-4장에 그려진 비극의 주인공들이다. 간결체가 주로 사용되는 성경 내러티브에서 이들을 언급한 족보가 사용된 것은 언제나 설명을 요구한다. 나열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많은 주석들이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더구나 필자의 표현은 보드너의 표현과도 많이 다르다. 다음의 삼상 14:3에 대한 Woodhouse의 설명을 보라.

We might have thought it was good that Saul had the priest Ahijah there with him with the possibility of seeking God’s guidance, if it were not for the fact that the narrator so pointedly reminds us that this priest’s uncle was Ichabod. Who could forget Ichabod (1 Samuel 4:21, 22)? “Where is the glory?” He also reminds us of Ichabod’s father, Phinehas. Can we forget those wretched brothers Hopni and Phinehas (1 Samuel 2:12-17)? Add their father, Eli, whose whole family fell under the terrible judgment in 1 Samuel 4 that in many ways lay behind everything that was now happening (see 1 Samuel 2:27-36; 3:11-14; 4:12-22). The “glory” departed from Israel then (1 Samuel 4:22), and here with Saul, the king was rapidly losing his kingdom, was the nephew of “where is the glory?” It is a scene with too many memories! (214)

보드너가 Woodhouse의 글을 요약한 듯한 느낌이다. 특히 마지막 표현은 어떠한가? His pedigree evokes a host of narrative memories (보드너) vs It is a scene with too many memories! (우드하우스). 이런 유사성들이 (그 표현이 토시까지 똑같지 않은 한) 문제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본문에 대한 공통의 관찰, 그 관찰에서 합리적으로 유추될 수 있는 결론이기 때문이다.

[19]
그러나 문제는 사울이 아말렉 왕 아각을 생포했다는 것이다. 그는 아각을 살려두었다. (개역개정에서 “사로잡고”라는 한 단어로 번역된 히브리어 원문은 두 단어로, 즉 “산채로”[하이 חי]와 “포획하다”[타파스 תפש]로, 표현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산채로”라는 말에 강세가 온다.) 이것은 아말렉에 속한 모든 것(“그들의 모든 소유”)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위배되는 것이다. 사울이 모든 백성은 진멸하였지만, 왕만은 살려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사무엘과 좋은 관계에 있지 않았던 사울은 자신의 왕권에 대해 늘 불안해 했을 것이다. 백성들 앞에 자신의 건재함을 보여줄 수 있는 이벤트가 필요했는데, 아각의 생포가 그 일에 매우 적합했을 것이다. 아각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 알려진 왕이다. 발람 선지자의 예언 중에 이스라엘의 왕이 “아각보다 위대하여질 것이다”(민 24:7)는 대목이 있다. 아각을 생포한 사울은 그 유명한 예언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성취하려 했을 것이다.

What would be Saul’s motive for taking Agag alive? For an already rejected king with a fragile confidence, it is possible that a captured king would provide quite a spectacle and give a needed boost. Peter Miscall (1986: 101) suggests an analogy with the king of Ai in Joshua 8, as that king is captured alive, brought before Joshua, and later hanged on a tree. Curiously, Agag’s reputation precedes him, since he makes a cameo appearance in Balaam’s oracle of Num. 24.7: ‘his king will be greater than Agag, and his kingdom will be exalted’. On this basis, one could infer that Saul would have quite a trophy.

이 두 패러그래프는 “왜 사울이 아각을 살려두었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그리고 그에 대해 필자는 보드너와 조금 다른 답을 주고 있다. 보드너는 민수기 24:7을 인용하며, 아각이 사울의 “Trophy”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보드너만의 것이 아니라 주석가라면 본문에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Klein도 민수기 24:7을 언급하면서, 비슷한 제안을 한다:

“Why did Saul spare Agag, the only Amalekite mentioned by name in the Bible (cf. Num 24:7)?.... did he wish to use Agag as a trophy of war (cf. 1 Sam 18:6–7)?” (1 Samuel, 150).

하지만 필자는 민수기 24:7을 성취하기 위해 사울이 아각을 살려두었다고 조금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이다. 필자의 촛점은 전리품으로서의 아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아각 예언에 대한 성취자로 만듦으로서 백성들로부터 잃어버린 권위를 회복하려는 사울의 시도에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trophy”나 “전리품”이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히브리 표현의 악센트에 근거해 “생포”라는 점을 독자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필자가 보드너를 인용할 필요가 전혀 없다.

[20]
이새의 집에 사무엘을 보내시면서 하나님은 기름을 “뿔”에 채워 갈 것을 명하신다. 사울에게 기름붓는 장면에서는 그런 지시가 없었다. 다만 우리는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 부을 때 기름병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안다(10:1). 그리고 이것은 사울의 왕됨이 온전한 것이 아님을 암시하는 문학적 장치였다(10:1에 대한 해설 참조).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이 새로운 왕을 찾아 나서는 사무엘에게 기름을 뿔에 채우라고 지시하신 것은 이새의 아들은 기스의 아들과 전혀 다른 왕이 될 것임을 보여준다. 또한 뿔에 대한 언급은 한나의 노래에 등장하는 왕도 상기시킨다. “여호와께서….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는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2:10). 물론 한나의 노래에서 “뿔”은 힘을 상징하는 은유어지만, 뿔에 담긴 기름을 머리에 뒤집어 쓸 이새의 아들도 예언하는 듯 하다.

Following the mild chastisement of the prophet’s immobility, the LORD’s specific instructions commence: ‘Fill up your horn with oil and go! I am sending you to Jesse of Bethlehem, because I have seen among his sons a king for me.’ It is notable that God commands Samuel to fill his horn. Earlier in chap. 9, Samuel is simply told to anoint Saul, with the instrument of anointing left unspecified. When anointing Saul in 10.1, we recall that Samuel does not use the horn but rather a vial of oil, raising the possibility a deficient anointing. Here in chap. 16, one gets the sense that things are going to be different from the outset: this new king will not get the vial treatment from Samuel

이 두 패러그래프는 주제적 유사성만을 가진다. 그리고 그 주제적 유사성은 동일한 본문에 대한 해설이라는 점으로 설명할 수 있다. 또한 기름 “병”과 기름 “뿔”의 차이와 관련한 내용 또한 보드너의 독특한 것이 아니다.앞서 [14]에 대한 설명을 보라.

[21]
한편 하나님은 사울을 택하고 버림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한 후, 사무엘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신다. 기름을 뿔에 채워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가라고 지시하신다. 이새의 아들 중 하나를 하나님이 “보았기”(ראה 라아) 때문이다. 여기서 “보았다”는 의미는 점찍어 두셨다, 예선(豫選)해 두셨다는 의미이다. (각주1: “보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아(ראה)는 삼상 16장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장의 주제는 인간이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의 관점을 대표하는 사무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나중에 가서야 사무엘은 하나님의 비전(“봄”)을 공유하게 된다. 이것은 사무엘이 처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사무엘상 3장을 연상시킨다. 그 때 사무엘은 몇 번의 실패를 거쳐 하나님의 음성을 인식하게 된다.)

After the modest rebuke and the anointing instructions, God’s opening speech to Samuel also includes the rationale for sending the prophet: he has ‘seen’ a king for himself. The verb ‘see’ (ראה) is a keyword in this chapter, and one senses that it has to do with spiritual perception and discernment. Just as the verb ‘hear’ is a keyword in chap. 3 (when Samuel is initially called), so now ‘see’ is the focus (where Samuel must anoint God’s chosen one). In chap. 3, the accent is on Samuel’s deficient hearing. Here in chap. 16 the stress will be on Samuel’s faulty vision

이것도 주제적 유사성만 있을 뿐 전혀 다른 글이다. 삼상 16장의 키워드가 “보다”(히브리어 ‘라아’)이고 삼상 3장의 키워드가 “듣다”(히브리어 ‘샤마’)임은 굳이 주석가가 아니라도 누구다 관찰 가능한 내용이다. 독자들이 판단하기 바란다.

[22]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가라는 여호와의 말씀에 사무엘이 즉각 순종하지 못한다. 사무엘은 “내가 어찌 갈 수 있겠습니까? 사울이 알면 나를 죽일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얼마 전 길갈 집회에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설교한 사무엘이 자기 목숨이 두려워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 순종하지 못하는 모습은 아이러니하다. 이스라엘 백성과 사울 왕 앞에서는 사무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하나님 앞의 사무엘은 불순종하는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실수하는 죄인일 뿐이다. 실제로 본문은 지금까지 그려진 완벽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사무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A brief glance across the range of biblical literature yields the following principle: when God gives a direct command, it is best to listen. After all, ‘obedience is better than sacrifice’, as we have recently had occasion to hear. In fact, since it is Samuel himself who utters those words, it is rather ironic when—in response to God’s direct command to go to Bethlehem—the prophet raises objections: ‘How can I go? Saul will hear, and he will kill me!’ Given the recent emphasis on absolute compliance with the word of God in this narrative, Samuel’s non-compliance here raises an eyebrow.

이 두 글은 삼상 16장 2절에 대한 해설이라는 점을 제외하고 전혀 다른 글이다.

사무엘이 이르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하니….

그 구절에 대한 해설적 재진술일 뿐이다. 본문에서 합리적으로 추론 가능한 내용이다. 이름의 의미부터 “순종”인 사무엘이, 또한 사울에게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 순종하지 못한 것을 “아이러니”하다고 해설한 것이 어찌 문제가 되는가? 보드너가 똑같은 본문에서 합리적으로 유추 가능한 내용에 대해 ironic이라는 표현을 했다고, 그를 인용해야 하는가? 더구나 보드너는 사무엘이 불순종하려 했다는 관찰에서 멈추지만, 필자는 그것에 근거해 사무엘도 비록 리더였지만, 다른 백성들과 똑같은 죄인임을 강조한다.

[23]
14절 전반부의 히브리어 구문(w X qatal, cf. ורוח יהוה סרה מעם שׂאול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여호와의 신이 다윗에게 임하는 사건(13절)과 그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는 사건(14절)이 동시적이라는 사실이다. 사울에게서 여호와의 신이 떠난 후 여호와의 부리시는 악령이 그 자리를 채웠다(14b). 악령은 사울을 “번뇌케” 하였다. 많는 학자들이 악령 들린 사울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하려고 한다. 사울의 번뇌가 어떤 심리적 상태였는지 모르지만, 성경은 그것의 원인이 외부로부터 온 것임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악령이 사울을 번뇌케 하였다. “번뇌케 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비아트(בעת)는 욥기에 집중적으로 사용된 단어다. 욥에게 닥친 환란, 신체적 고통, 친구들의 몰이해, 그리고 침묵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생기는 정신적, 신학적 혼란이 비아트라는 용어로 표현된다(욥 7:14, 9:34, 13:11; 15:24, 18:11, 33:7). 이것은 악령이 사울에게 주었던 고통이 깊이와 크기를 암시해 준다.

The syntax of 16.14 can be construed as the Hebrew equivalent of a pluperfect verb. Thus, one gets a sense that at the same time the divine spirit comes upon David, the divine spirit departs from Saul himself. The verb ‘torment’(בעת) has never been used so far in the Bible, suggesting a new and terrifying experience. Statistically, the highest concentration of this verb (בעת) is in the book of Job,

14절을 원문으로 보면, 그 구문이 소위 대과거 구문임을 알 수 있다. 히브리어 ‘비아트’는 14절에 사용된 단어이다. 필자는 보드너보다 이 두 사항에 대한 더 자세하고 전문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구문이 나타날 때마다 필자는 동일한 해설을 제공하고 있다([5]에 대한 설명을 참조). 비아트는 히브리어 사전(The Dictionary of Classical Hebrew 참조할 것)만 보아도 그 쓰임이 욥기에 집중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이 사실을 언급하는데 보드너를 인용할 필요가 없다. 주석을 읽는 독자들이 기대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본문의 구문적 특징과 중요한 어휘에 대한 설명일 것이다. 필자는 그 일에 충실하고 있다. 앞의 두 글은 주제적 유사성 이외에 전혀 다른 글이다.

[24]
아울러 “소년 중에 하나”라는 표현(18절)은 사울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사건에서 사울을 동행한 사환을 연상시킨다. 본 단락의 소년과 삼상 9장의 사환은 모두 원문 상에서 “소년 중의 하나”(에하드 메하느아림 אחד מהנערים)라는 말로 표현되었다(삼상 9:3 참조). 또한 소년과 사환은 모두 자신의 처소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각각 사무엘과 다윗)에 대해 비교적 자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또한 그 둘 모두는 이야기 속에서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대사를 할당받는다. 그 둘 모두 장면을 주도하는 역할을 한다. 삼상 9장의 사환은 사울을 사무엘에게 이끄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고, 16장의 사환은 다윗을 사울의 궁에 들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두 무명의 종들은 삼상 9장에서나 16장에서 모두 하나님의 역사 개입의 통로로 작용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구속 역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심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In my analysis of 1 Samuel 9 above, I mentioned that there are notable comparisons between Saul’s unnamed servant lad there, and the servant lad here in chap. 16. In the first instance, the same phrase is used to introduce them both (‘one from the lads’, אחד מהנערים). Further, both servant lads are knowledgeable about people who live out of town (Samuel and David), and both servant lads speak way too much. Both servant lads are cognizant of things that Saul is not, and in both cases the servant lad takes initiative. In chap. 9, it is the servant lad’s bright idea to go to Samuel (a decision that, arguably, does not accrue to Saul’s benefit), just like in chap. 16, where it is servant lad’s idea to mention the son of Jesse. There is one slight difference: the lad of chap. 9 speaks about a prophet, whereas the lad of chap. 16 speaks like a prophet.

이 두 글 역시 ‘에하드 메하느아림’이라는 표현에 대한 해설이라는 점에서만 유사하다. 그 표현은 사무엘상 16장 18절에 사용되었다. 또한 이 장면에서 사울 궁에 있던 무명의 소년이 이새의 말째 아들 다윗에 대해 어찌 그리 자세하게 알 수 있는지, 더구나 그 소년의 말은 후대의 다윗의 모습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은 수많은 주석가들에 의해 관찰되었고, 종종 이 구문이 후대 편집 부분이라는 증거로 인용되기도 한다. 그리고 본문을 동일한 단어 ‘나아르’가 사용된 사무엘상의 다른 문맥과 연결시키는 것은 성경 해석법의 기초로 누구의 것이라 말할 수 없다. 필자는 보드너를 인용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다. 더구나 보드너는 16장의 소년과 9장의 소년을 필자보다 더 자세히 비교한다. 하지만 필자는 그 둘의 유사성을 요약적으로 설명한 후 그로부터 ‘신학적 결론’을 도출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구속 역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심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즉 필자는 일반적인 본문 관찰에 있어만 보드너와 일치하고, 그 메시지에 있어서는 보드너와 차별된다.

[25]
소년의 제안대로 사울은 부하를 이새의 집에 보내어, “양 치는 네 아들 다윗을 내게로 보내라”고 명령한다(19절). 이 명령에서 사울은 소년이 언급하지 않는 두가지 사실, 즉 그 이새의 아들이 목동이며 그의 이름이 다윗이라는 사실을 언급한다. 다윗을 추천한 소년이 그의 이름과 직업을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러나 사무엘상 저자는 추천의 문맥이 아니라, 사울이 다윗을 왕궁으로 초정하는 문맥에서 다윗의 이름과 직업을 밝힌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목동 다윗의 입궁이 다름 아닌 사울 자신의 초청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함같다. 부지중에 사울도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에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무명 소년을 사용하여 다윗이 추천되게 한 하나님이 이번에는 사울을 사용하여, 다윗을 궁으로 초청한 것이다. 사울 왕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고려하면, 사울 사건도 이스라엘 왕정 역사에 불필요한 우회적 사건이 아니라, 다윗 왕의 등장을 준비시키는 필수적인 과정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The servant lad of chap. 16 says many things about the son of Jesse, but there are two rather important items that he omits: namely, he does not mention the name ‘David’, nor does he mention David’s known vocation at this point in the story, that is, shepherding. This is worth mentioning, because when Saul sends word to Jesse, he asks for David who is with the sheep to be sent! Of all things, Saul only mentions details that his servant does not tell him. How does Saul know that the ‘son’ is named David, and that he with the sheep? Saul is the first character to use the name ‘David’ in the story, and, in his desperation to be comforted from the torment of the evil spirit, Saul unwittingly invites his successor to the court.

이 두 글은 삼상 16:19절의 사울의 명령에서 사울이 (신하가 언급하지 않은) 다윗이라는 이름과 그의 직업(목동)을 언급했다는 내용을 제외하면 서로 상이한 글이다. 그 유사한 부분도 보드너가 처음한 관찰이거나, 그에 대한 유일한 관찰자도 아니다. 다음의 Woodhouse의 해설을 보라.

But Saul knew more than we could, at this stage, have guessed. Listen to him: “Therefore Saul sent messengers to Jesse and said, ‘Send me David your son, who is with the sheep.” Saul knew David’s name! As the narrative is unfolding this is a surprise. Saul—of all people!—is the first character in the narrative to name David. The explanation for Saul’s surprising knowledge may again lie in the chronological sequence of events, which (we have noted) could differ from the sequence of the narrative….Be that as it may, the irony of this scene is palpable. Saul invited David (by name!) into his court.”

Woodhouse의 주석에서도 내러티브 순서 상 사울이 목동 다윗의 이름을 처음 언급한 인물이라는 점, 따라서 그가 다윗을 초청했다는 점이 아니러니로 관찰되고 있다. Woodhouse와 보드너는 다음의 경우 표현에 있어서도 거의 일치한다.

(보드너) Saul is the first character to use the name ‘David’ in the story
(우드하우스) Saul—of all people!—is the first character in the narrative to name David.

보드너가 우드하우스를 표절한 것이 아닌 이유는 그것이 본문에 대한 관찰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런 일반적인 관찰에 근거하여 보드너와 다른 신학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 즉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를 말한다. 보드너는 사실 관찰에만 머물고 있다. 따라서 필자가 보드너를 인용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판단된다.

[26]
사울의 궁에 입성한 다윗은 즉각적으로 사울의 사랑을 받는다. 나중 역사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다윗을 사랑한 최초의 인물이 사울이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사울을 시작으로 궁에 사는 사울의 가족(요나단과 미갈)과 신하들이 모두 다윗(“사랑스러운 자”)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다윗을 사랑할수록 사울은 다윗을 점점 더 질투하게 된다. 어떤 학자(버치, 1103)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다윗 때문에 찢어진 것은 사울의 왕국뿐만이 아니다. 사울의 가슴도 갈기갈기 찢어졌다.” 여하튼 사울의 사랑을 받은 다윗은 단순한 음악가에 머물지 않고 왕의 무기드는 자로 승진한다. 병기드는 자는 일종의 왕의 경호원으로, 용기있고 재능있는 전사들 가운데 선발되었다. “용감한 자를 보면 모두 자기에게로 불러모았던”(14:52) 사울이 “호기와 무용”을 겸비한 다윗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이제 다윗의 재능과 사랑스러움을 확인한 사울은 다윗의 아버지 이새에게 다시 사람을 보내어 다윗이 자신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정식으로 요청한다. “그가 내게 은총을 얻었느니라”는 표현은 다윗이 사울의 마음에 쏙 들었다는 뜻이다.

David is obedient to his father’s bidding, and duly arrives at Saul’s court ‘and stood before him’. The next sequence is translated by the NRSV as ‘Saul loved him greatly’, but the Hebrew text does not name the subject. Of course, it certainly could be inferred that Saul loves David, but exploiting the ambiguity, some scholars opt for David as the one who loves Saul. In my view, it is most likely Saul who is the subject here, a notion that is enhanced when we see that a larger pattern is set in motion here: everybody loves David. This is the first of numerous occasions where someone will be said to ‘love David’. By contrast, David will hold his cards close to his chest, and act in a very circumspect manner in the court of Saul even while he grows in popularity. But Saul is the first to love him, although as time goes on, an inverse proportion will be noticeable: in the ensuing chapters, the more that people love David, the more manic Saul becomes.
Burce Birch (1998:1103) gives a thoughtful summary. “Alongside the public story of emerging kingship in Israel there begins here a personal story of relationships between David and the household of Saul. The tragedy of Saul’s insane jealousy toward David at a later point in the story is compounded by this simple statement of Saul’s great love for David. It is not only Saul’s kingdom that is torn (chap. 15) but his heart as well.”
An immediate sign of Saul’s favor—so it would seem—is David’s rapid promotion to the position of ‘armor bearer’. Before long, David is retained for more reasons that music. The servant lad claimed that David was ‘a man of battle’, and one recalls at the end of chap. 14 that Saul was always on the lookout for such individuals: ‘whenever Saul saw a warrior or a man of courage, he gathered him to himself’ (14.52). Once more Saul sends to Jesse, asking that David continue to ‘stand’ before him, as he has ‘found grace’ in the king’s eyes

분량을 보더라도 이 두 글은 매우 다른 글임을 알 수 있다. 필자의 해설은 삼상 16장 22-23절의 개역개정에 나타난 어구들의 순서를 따른다. 그럼 그 내용은 어떠한가? 사울이 다윗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보드너는 매우 장황하게 설명 혹은 주장하고 있는데, 필자는 그 사실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다. 그 이유는 개역개정역에서 다윗을 사랑한 주체를 사울로 명시하기 때문이다. 개역개정을 보는 한국 독자를 염두에 둔 필자는 보드너와 달리 그 사실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윗이 사울 가족의 사랑과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과 사울이 다윗을 질투한다는 사실은 성경 독자들은 누구의 도움없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필자가 버치를 인용한 것은 그의 문학적 표현 때문이다. 필자가 보드너를 통해 버치의 표현에 대해 인지했더라도 반드시 보드너를 인용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필자는 버치의 책을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설사 보드너가 인용한 것을 2차적으로 인용했더라도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먼저, 보드너의 인용과 범위가 다르다. 둘째, 버치의 인용부분을 따옴표로 처리하여 그것이 인용임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은총을 얻었느니라”라는 성경 구절에 대해서도 필자의 해설은 보드너의 것과 매우 다르다. 보드너의 표현은 ‘find grace’ in king’s eyes로 히브리어 원문(מצא חן בעיני)을 직역한 것에 불과하지만, 필자는 그 히브리어 표현의 뉘앙스를 설명한다. 그것(מצא חן בעיני)을 “마음에 쏙 든다”라는 의미로 확장 해설 해준다.

이상의 이유로 필자가 보드너의 글을 참조했더라도 필자의 인용 원칙에 따라 인용하지 않았다. 비슷한 예를 보려면 [13]에 인용된 쿠걸과 베이든의 글을 참조하라.

[27]
골리앗은 위협적인 신장의 거인이었지만, 죽는 것이 무서웠는지 자신의 온몸을 갑옷으로 감싼다. 뿐만 아니라 방패 든 자를 앞 세워 적의 공격에 한 치의 틈도 주려하지 않는다. 사무엘서 저자는 실제 전투보다 골리앗의 갑옷에 대한 설명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이것은 전투의 이야기의 긴장감을 극대화시키려는 의도같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즉 머리, 몸, 다리 순으로 골리앗이 입은 갑옷을 묘사한 후, 골리앗의 무기—놋 단창, 창, 그리고 방패—도 하나하나 설명한다. 저자는 특히 갑옷과 무기의 무게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주목할 사실은 골리앗의 다리를 두른 놋 각반은 구약성경에서 한 번 밖에 언급되지 않지만 그리스 세계에서는 매우 흔한 갑옷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베틀 채와 같은” 놋 창도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그리스 세계에서는 자주 발견되는 창이다. 실제로 골리앗의 갑옷과 무기는 일리아드에 묘사된 그리스 영웅들의 그것과 일치한다. 이것은 골리앗에 대한 묘사에 가드 지방의 거인 전통과 그리스의 군대 전통이 통합되어 있음을 잘 보여준다. 즉 골리앗은 가나안 지방과 그리스 지방의 장점을 통합한 영웅인 셈이다.

The lengthy description of Goliath’s military hardware begins at the highest point—the bronze helmet on the giant’s head—and proceeds downward from the coat of mail to the ‘greaves’ on his legs. Even the weights of several pieces are provided, and the weight is substantial…… ‘greaves are mentioned only here in the Old Testament, though they were commonplace in Aegean world…... Goliath is clothed as a Homeric hero and represents the best of the Hellenistic martial culture. If this is plausible argument, then it buttresses the above argument that ‘Goliath’ is presented as a composite portrait that showcases the best of the old (Anakites) and new (Achilles).

이 두 글은 삼상 17:5-7(골리앗의 갑옷과 무기에 대한 묘사)에 대한 설명이다. 골리앗의 갑옷에 대한 묘사가 일리아드에 묘사된 그리스 영웅의 모습과 유사하다는 사실은 이미 학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점을 언급했다는 것 이외에는, 표현과 설명의 상세도에 있어서도 두 글은 매우 다른 글이다.

“놋 각반은 구약 성경에서 한번 밖에 언급되지 않지만 그리스 세계에서는 매우 흔한 갑옷이었다”는 진술은 “역청(koper, 창 6:14)은 구약 성경에서 한번 밖에 언급되지 않지만 메소포타미아 세계에서는 매우 흔한 방수제였다”라는 구절처럼 일반적 사실이다. 앞서 여러 번 예시한 것처럼 일반적 사실은 그 표현이 토시까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한 비슷해도 관행적으로 문제되지 않는다([25]에 제시된 예시를 참조할 것).

골리앗의 무기와 갑옷과 그리스 영웅의 그것이 대한 유사하다는 사실은 블레셋인들이 본래 에게 해에서 이민 온 그리스인들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인하며, 골리앗의 갑옷과 호머의 영웅들의 유사점을 지적하는 논문과 글들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예를 들어, 이 부분에 대한 MacCarter의 주석을 보라(1 Samuel 17, 105, 292).

[28]
골리앗의 신장과 외모는 빈틈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처럼 골리앗이 엄청난 전쟁 장구를 갖추고 나왔다는 것은 그가 전쟁의 승리를 물질적 요건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잠시 후 다윗이 고백하는 것처럼 전쟁의 승리는 창과 칼에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주목하는 것은 외모가 아님을 배웠다(16:7 참조). 골리앗이 겉으로는 정복 불가능한 거인처럼 보이지만 외모에 압도당하지 않는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 거인의 약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의 갑옷과 무기에 대한 설명에서 사무엘서 저자는 골리앗의 약점과 종말을 암시하는 두 가지를 본문에 언급한다. 하나는 골리앗이 머리와 온 몸과 다리를 놋으로 둘렀지만, 얼굴은 아무 방어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중에 다윗이 던진 돌이 골리앗의 유일한 약점인 이마에 떨어지게 된다. 또 하나는 사무엘서 저자가 골리앗의 무기 중 “검”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검은 지금 골리앗의 몸에 있지만, 나중에 다윗의 무기로 역할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검에 골리앗의 목이 베일 것이다

Goliath’s heavy metal is appropriate, I suppose, in light of the Philistine’s cornering of the metallurgical market—a monopoly sufficient enough to cover almost all of Goliath’s person. The reader has been cautioned in the previous chapter not be misled by outward appearances (this is Samuel’s mistake with the height of Jesse’s firstborn, Eliab). So, despite the apparent inviolability of the Goliath fortress, there may be a ‘water shaft’ in this description (see 2 Sam. 5.8); that is, there might be one defenseless place— an Achilles’ heel as it were—that a clever opponent could exploit. As Kyle McCarter (1980: 292) notes: ‘The description of the giant’s armor serves not only to emphasize further the inequality of the coming contest but to divulge to the alert reader the one vulnerable spot on the giant’s body, viz. his forehead. His head, body, and legs are well-shielded; only his face is exposed.’ Furthermore, if the NRSV is correct in rendering כודון as ‘javelin’ (slung between his shoulders), then—despite this seemingly comprehensive description—Goliath actually has one more weapon that is not mentioned, but it will later have grave consequences for its owner: his sword.

이 두 글은 골리앗의 갑옷이 이마를 노출 시켰다는 점, 저자가 그의 칼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 이외에는 표현과 설명에 있어 전혀 다른 글이다. 그리고 그 둘도 본문에 대한 정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결론이므로 굳이 누구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이다. 보드너가 인용하는 맥카터도 바로 이점을 말하고 있다. 맥카터는 주의깊은 독자들이라면 골리앗의 이마가 약점이라는 점을 발견할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The description of the giant’s armor serves…to divulge to the alert reader the one vulnerable spot on the giant’s body, viz. his forhead.”

즉 보드너가 인용하는 맥카터 자신도 골리앗의 이마가 보호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할 따름이다. 그리고 그 관찰은 매우 일반적인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무엘서 저자가 칼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저자가 골리앗의 칼을 언급하지 않은 것을 후에 다윗이 그 칼을 사용할 것이라는 점과 연결시키는 것은 Kuruvila의 논문(“David VS Goliath (1 Samuel 17)” JETS 58 (2015): 501, 각주 48)에서도 언급된다.

Goliath has five pieces of equipment (17:5–7; his sword, which David employed in 17:51, is not mentioned, perhaps to retain the balance of numbers, or perhaps to ignore its ambiguous status—after all, it did end up being of use to David)

그는 이 내용을 말하면 보드너를 인용하지 않는다. 본문에서 합리적으로 유추 가능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필자도 새로운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을 필자의 언어로 해설하고 있다.

[29]
식량을 가지고 전장터로 떠나기 전에 다윗은 아침 일찍 일어나 자신의 양을 양 지키는 자에게 맡긴다. “맡긴다”는 말로 번역된 히브리어 나타쉬(נטשׁ)는 “버린다”의 뉘앙스를 가진다. 일부 학자들은 이 말에서 상징적 의미를 찾아낸다. 즉 이번 심부름과 함께 다윗은 목동 일은 “버리게” 될 것이다. 다윗은 더 이상 양을 치러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In accordance with Jesse’s instructions, David arises early and proceeds on his journey. Before leaving, he ‘abandons’ the flock under the care of a watchman, and several commentators note the symbolic dimension here: David will not be returning again to his shepherding career after this errand is over.

두 글은 사무엘상 17장 20절 (“다윗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양을 양 지키는 자에게 맡기고”)에 대한 해설이다. 필자의 첫번째 문장은 그냥 성경 구절을 반복한 것이고, 그 다음 문장들은 “맡기고”로 번역된 히브리어 “나타쉬”가 다른 문맥에서는 “버리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에 착안한 해설로, 이미 많은 주석가들이 언급한 내용이다. 보드너 자신도 그것이 자신의 고유한 주장이 아니기 때문에 “several commentators”라고만 말할 뿐 특별한 인용없이 그 내용을 사용하고 있다. 더구나 필자는 개역 개정의 “맡기고”라는 표현을 주해하고 있다. 그 표현에 대한 히브리어(נטש)를 제시하고, 왜 주석가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지를 밝히고 있는 반면, 보드너는 히브리어 인용없이 처음부터 “abandon” 이라는 영어 번역을 전제하고 해설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두 글은 다른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글이며, 그 내용의 구성 또한 전혀 다른 글이라 할 수 있다.

[30]
다윗이 전쟁터에 이르렀을 때 형들은 막사에 없었다. 이미 두 군대는 전투 진영을 갖추고 서로를 마주보며 대치하고 있었다. 막사에 형들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윗은 자신의 짐(형들의 식량과 천부장을 위한 치즈)을 짐지키는 자의 손에 맡기고 달려가 전투 진에 합류한다. “짐” (켈림 כלים)이라는 말은 삼상 10:22에서 행구(켈림) 사이에 숨은 사울을 연상시킨다. “짐들” 속에 숨은 사울과 대조적으로 다윗은 짐은 짐꾼에게 맡기고 (숨지 않고) 현장으로 달려간다. 막내 다윗이 어느 순간 “장성한” 형들과 나란히 전투 진에 서 있다. 물론 여기에 오기까지 그는 적어도 두 가지를 벗어 버려야 했다. 하나는 목동으로서의 직업이(“양을 양 지키는 자의 손에 맡기고”)고 다른 하나는 아비의 심부름꾼으로서의 낮은 자존감(“짐을 짐 지키는 자의 손에 맡기고”)이다. 나중에 골리앗과 일대일로 맞서기 전 다윗은 사울의 갑옷 마저 벗어 버려야 한다.

For the second time, David ‘abandons’ something under the care of a watchman; previously he entrusts the flock to a keeper, and this time he deposits the ‘equipment’ (most likely the cheeses and supplies) with the keeper of the ‘baggage’. One is reminded of Saul hiding among the ‘bag.gage’ during a national assembly, but by contrast, David ‘runs’ from the baggage area to the battle lines. It is here that David ‘asks his brothers about shalom’, and if he is about to get a token of their safety for Jesse, such matters are interrupted by the entrance of Goliath.

이 두 글도 동일한 본문 (삼상 17:22)에 대한 해설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유사점 이외에는 서로 상이한 글이다. 다윗과 사울의 왕의 등극 과정을 비교하는 것은 그 둘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사용된 동일한 키워드는 주석가들의 관심을 끌게 되어 있다. 22절에서 다윗이 “짐을 짐 지키는 자의 손에 맡겼다”는 대목에서 사울이 짐 속에 숨은 것을 연상하는 것은 당연하다. 예를 들어 Woodhouse의 다음의 주석을 보라.

We might notice a curious contrast here between this small lad abandoning his burdensome load to “the keeper of the luggage” so he could run forward to the scene of the action and a rather bigger lad who had earlier tried to hid himself “among the baggage” to avoid the action (see 1 Samuel 10:22)!

Woodhouse도 보드너와 똑같이 “짐”과 관련하여 다윗과 사울의 경우을 비교하고 있지만, 보드너는 우드하우스를 인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주장을 하기 위해 어떤 다른 권위에 의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같은 논리가 필자의 글에도 적용된다. 오히려 필자의 설명이 보드너의 그것보다 훨씬 구체적임에 주목하라. 이것은 필자가 보드너를 비롯한 여러학자들의 글을 비평적으로 참고한 후, 필자 나름의 전문지를 가지고 성경 본문을 한국 독자를 위해 해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31]
형들을 만난 다윗은 그들의 안부를 묻는다. 이제 징표만 얻으면 다윗의 임무는 끝난다. 그런데 이 단순한 다윗의 사명을 복잡하게 만든 일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다윗이 골리앗의 도발을 듣게 된 것이다. 23절에 골리앗의 이름과 함께 그의 역할, 특징, 소속을 가리키는 별명—즉 “싸움 돋우는 사람”, “가드 사람,” “블레셋 사람”—이 모두 사용되었다. 골리앗의 도발 목적이 싸움을 돋우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싸움 돋우는 사람”이라는 번역이 나쁘진 않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의 히브리어 구절 이쉬 하베님(אישׁ הבינים)은 “중간자”라는 의미에 더욱 가깝다는 것이다. 전쟁에서 그의 역할은 싸움을 돋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진영을 대표하여 일대일 대표전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외에 “가드 사람”이라는 말은 골리앗의 거대한 신장을 연상시키고, “블레셋 사람”이라는 말은 그가 그리스 정신을 구현한 전사임을 말해 준다. 다윗이 도착한 날도 골리앗은 여느 때와 같은 말로 이스라엘을 모욕하고 도발했다. 또한 여느 때와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 중 아무도 골리앗에 맞서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도망갔다. 골리앗이 매우 두려웠다. 그러나 그 날에는 여느 날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전투 진에 있었고, 그가 골리앗의 도발을 들었다는 것이다.

The re-introductions of 1 Samuel 17 continue, as the Philistine giant is again labeled a ‘champion’ (man of the in-between), and referred to as ‘Goliath by name’. While Goliath speaks his customary words of derision, a crucial difference is that this time David ‘hears’. The reaction of the soldiers is to flee, but as they are busy running away, both David and the reader can overhear their conversation: ‘Do you see this man who is coming up? Indeed, he comes up to insult Israel! But the man who strikes him the king will make very rich, and his daughter he will give to him, and his father’s house will be granted exemption in Israel.’ This substantial matter of reward has not been previously reported, and surely the timing is not coincidental: just as David arrives on the battlefield, the information about a generous reward surfaces.

이 두 글은 골리앗이 히브리어 본문에서 ‘이쉬 하베임’ 즉 “중간자”로 불린다는 설명 이외에는 전혀 다른 내용과 구성의 글이다. 이것은 본문에 대한 단순한 관찰일 뿐 아니라, 필자는 히브리어를 인용하고 그것을 직역하여 “중간자”로 표현한 반면, 보드너는 히브리어에 대한 인용없이 “champion”이라는 전통적인 의역을 소개한다. 원문을 암시하는 “man of the in-between”은 괄호로 표기할 뿐이다. 필자의 “중간자”라는 표현은 보드너의 표현 “man of he in-between”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원문 איש הבינים을 직역한 것이다.

[32]
그 날 다윗이 들은 것이 그것뿐은 아니었다. 이스라엘을 날마다 모욕하는 골리앗을 죽인 자를 사울 왕이 후히 보상할 것이라는 소문도 들었다. 소문은 매우 구체적이다. 첫째, 골리앗을 죽인 사람에게 왕이 많은 재물을 하사할 것이다. 둘째, 그에게 딸을 주어 사위로 삼을 것이다. 세째, 아비의 집[가족]의 세금을 면제해 줄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가장 기본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가족이었기 때문에 세금도 개인별이 아니라 세대별로 매겨졌다. 이 때문에 “아비의 집”(베이트 아브 בית אב)이 언급된 것이다. “아비의 집”은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 단위이다(배경 설명 ‘고대 이스라엘의 사회 구성’ 참조). 이 세가지 약속은 병사들의 입소문에 의해 전해진 것이므로 과장이나 부정확한 내용이 들어있다고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후의 이야기 전개를 볼 때, 소문의 내용이 상당히 정확하게 사울의 약속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Notably, Saul himself is not reported as saying these words or dispensing these promises. The reward issue is raised by the (fleeing) troops, and hence this is a general utterance from Israel’s soldiers. Either Saul has made such an offer, or this is an example of military hyperbole from the soldiers.

이 매우 다른 구성의 두 글에서 굳이 비슷한 부분을 찾자면, 밑줄 친 부분들이다. 먼저 사울이 보상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성경 본문에서 명확하다. 따라서 그 보상에 대한 ‘소문’이 참인지 과장이 섞인 것인지를 의심하는 것은 그로부터 합리적으로 추론 가능한 이야기이다. 더구나 필자는 이 내용을 보드너와 전혀 다른 논리적 문맥에서 사용하고 있다. 또한 보드너와 달리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소문의 내용이 상당히 정확하게 사울의 약속을 반영하고 있다. 반면 보드너의 글에는 이런 결론이 없다.

결론

지금까지의 논의로 충분히 분명해 진 것은 필자의 사무엘상이 홍성사 주석 시리즈의 저술 목적에 충실하게 쓰여졌다는 것이다. 즉 필자의 전문성을 발휘하여 성경 개역 개정 본문을 학계의 대체적 견해와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한국 평신도들도 이해하기 쉽게 나름대로 해설하였다는 것이다. 필자는 참조한 책들의 내용 가운데 나름의 판단에 따라 인용의 여부를 결정하였다. 즉 원문에서 유추 가능한 관찰, 그 관찰로부터 내려질 수 있는 합리적인 추론, 학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내용 등은 필자가 참조한 책에 수록되어 있다해도 굳이 인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저자의 양심과 사무엘상 주석 시리즈의 편집 방향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설사 보드너의 책과 유사한 부분이라고 문제 제기된 부분을 이성하 목사측의 주장 그대로 인정하더라도, (물론 앞서 설명은 그럴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것은 보드너 책의 약 2.33%(3678/158240 words), 필자 책의 2.23%(2700/118923 words)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97%는 다르다는 말이다. 평신도용 성경 해설서를 포함한 정보전달의 참고서들은 중복되는 내용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보면, 필자의 사무엘상은 보드너의 책과는 사용된 언어, 책의 구성, 내용 등에서 전혀 다른 책이라 할 수 있다.

이성하 목사 측와 필자의 견해 차이는 표절의 정의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예가 표절에 해당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지금까지 이성하 목사 측은 표절을 판별하는 ‘가이드라인’을 마치 ‘법칙’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였다. 다시 말해, 저술 ‘현장’에 대한 충분한 이해없이 그 ‘법칙들’으로 현장을 다스리려 한 것이다. 하지만 표절에 대한 판별은 몇개의 ‘법칙들’을 기계적으로 적용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전문적이고 종합적 판단이 요청되는 대목이다.

성경 해설서와 같은 참고서에서 무엇이 ‘인용없이 사용 가능한 지식’인가에 대한 판단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 사이의 대체적이며 암묵적인 동의의 문제이다. 그 동의가 보편적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동일한 내용이라도 학자들 사이에 ‘각주’의 유무와 내용이 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과 다른 판단을 했다고 ‘도적질’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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