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해석 방만해졌을 때, 축소함으로써 본질로 다가가야

입력 : 2018.02.06 17:27

[이영진의 기호와 해석] ‘사람들의 어부들’과 해석

요나
▲Jonah and the Whale, by Alma Sheppard-Matsuo. @wafflesushi

※이 글은 연세대 신약학 석사과정에 있는 박우석 씨가 필자의 글 '사람들의 어부들'에 관해 반론을 한 것에 대한 답으로 내는 글이다.

1.
통상 해석이라는 작용이 일어나려면 다음 세 가지 단계가 발생한다. ①도상(icons) ②색인(indexes) 그리고 ③기호(symbols).

2.
가령 '사람을 낚는 어부'라 하였을 때, 도상은 '(고기 잡는 풍경의) 어부' 또는 '물고기'일 것이고, 색인은 ἁλιεῖς ἀνθρώπων 또는 fishers of men일 것이며, 기호는 우리 몸 속 '해석체'와 결합하는 바로 그것이다. 이 통상적인 해석의 작용에 하나를 더 덧붙여 읽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경전 해석에 다다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윤리체'이다.

3.
현대적 의미의 성서신학 전공자들은 두 번째 단계 즉, 스스로 '색인 기술자'로 전락하면서 성서신학이라는 신학의 궁극적 요체를 문헌 정보학으로 전락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오늘 이 반론자께서도 그런 분 중 하나일 듯 싶다.

4.
나는 마가복음 1장 17절의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표현이 '잘못된 번역'이라 주장한 적이 없다. 그런데 이 반론자는 그렇게 규정하였다. 해석의 1차 오독이다.

나의 취지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표현의 과잉을 지적한 것이었다. 본래의 기호가 아닌 전혀 다른 기호로 점용당한 나머지, 경전 해석의 원리로 응하지 못하는 세태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5.
반론자는 fishers of men 또는 ἁλιεῖς ἀνθρώπων의 '관용적 표현'을 입증하기 위해 여러 색인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마치 내가 이르기를 'fishers of men이 아니다'라고 한 것처럼 혹은 'ἁλιεῖς ἀνθρώπων라고 기록되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처럼 역시 과도한 규정을 하였다. 해석의 2차 오독이다.

6.
나는 어디에서도 fishers of men 또는 ἁλιεῖς ἀνθρώπων 색인을 부정한 사실이 없다. (you) fish for people라는 번역도 있듯 관용적 표현이란 어느 정도 번역자의 소질이며, 이는 꾸란과는 상이한 기독교 경전의 형성 원리이자 권능이다.

7.
문제는 앞서 언급한 해석의 3단계 중 해석의 궁극적 지점인 '기호'의 문제일텐데,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도상은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닌데도 본래의 텍스트를 전혀 다른 상징, 곧 '영혼 낚시질'의 공여자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이런 사태에 직면했을 때는 다시금 색인으로 돌아가, 그릇된 기호의 오남용을 흔들어줘야 하는 것 아니던가? 그것이 성서신학의 본령이 아니었던가? 색인의 식자공으로 전락한 현대 성서신학이 오히려 3단계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

8.
'사람들의 어부들'이라는 말은 ἁλιεῖς ἀνθρώπων 혹은 fishers of men, (you) fish for people 등 그 어떤 색인을 겹쳐놓아도 그릇된 표현이 아니다. 그리하여 다시 색인을 가해서 일으킨 이 추상적인 '도상'을 요나의 물고기 도상으로 정정을 해준 일은, '사람을 낚는 어부들'이라는 관용적(한글로서의) 표현을 입혀대는 것만큼이나 정당한 해석의 한 과정이다. 해석이 방만해졌을 때는 그것을 축소(reduced)함으로써 본질에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

9.
'사람들의 어부들'의 본말인즉, '사람을 낚는 어부'의 진정한 기호는 '사람을 건지는 어부'의 표식이 아니었던가?

10.
대개의 색인 기술자들은 (어떠한 이슈가 제기되었을 때 흔히) "반증적인 문헌학적 근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즐겨 쓴다. 이게 이 사람들의 한계다. 그래서 말인데, 원하는 대로 이 반론자가 자신의 문헌학적 근거로 제시한 텍스트를 이 기호 본질의 근거로 제시한다.

11.
플루타르크(Plutarch)의 'On Being a Busybody'의 한 대목으로 반론자가 발췌한 것보다 조금 더 양을 늘려서 옮겨보면,

ἐξ ἀποδημίας προσιὼν ἠρώτησε, "μή τι καινόν," ἐζημίωσαν αὐτόν. ὡς γὰρ οἱ μάγειροι φορὰν εὔχονται βοσκημάτων οἱ δ᾿ ἁλιεῖς ἰχθύων, οὕτως οἱ πολυπράγμονες εὔχονται φορὰν κακῶν καὶ πλῆθος πραγμάτων καὶ καινότητας καὶ μεταβολάς, ἵν᾿ ἀεί τι θηρεύειν καὶ κατακόπτειν ἔχωσιν. (Plutarch, 'On Being a Busybody', Moralia, 519)

이런 내용이다.

"마을 밖으로 나갔던 사람이 와서는 물었다. '뭔 소식 있어?' (그러자) 그들은 그를 벌금형에 처했다. 요리사들이(μάγειροι) 풍부한 재료 공급을 위해 '갓 부화한 물고기(ἰχθύων)를 낚는 어부들'의 훌륭한 수확을 기원하는(εὔχονται) 것과 마찬가지로, 참견하기 바쁜 사람(πολυπράγμων)은 재앙에서 좋은 수확을, 고충 속에서 좋은 수고를, 그 참신함과 변화를 위해 기도한다. (저) 요리사들과 어부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언제나 뭔가를 낚거나 도살자들을 가질 수 있다."

12.
반론자는 나더러 저 플루타르크 본문의 ἁλιεῖς ἰχθύων(새끼 물고기 낚는 어부)를 '사람들의 어부'로 적용해 보라고 할 게 아니라(이 사람 얘기로는 '사람들의 어부'가 저 문법 예시에 안 맞는다는 것), 보다시피 '사람을 낚는 어부'를 적용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 지 스스로 잘 살피시기를 바란다.

'어린 새끼 물고기들을 (아무런 가책 없이) 낚아대는 어부'가 바로 그 본말이 아닌가 말이다. 이것이 해석의 세 번째 단계의 오류이다.

13.
따라서 ἁλιεῖς ἀνθρώπων을 '사람들의 어부들'이라 부르는 것은 전혀 부당한 기호가 아니다. 능히 가능한 '읽기'이다.

14.
뿐만 아니라, 통상 우리가
'이방의 빛-'(φῶς ἐθνῶν)이라 하였을 때,
φῶς(빛)은 동사의 영향을 받은 대격이고 ἐθνῶν(이방)은 속격으로서의 그 흔한 예시가 아니고 무엇인가?

"너를 세워...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라(70인역)-"
(ἔδωκά σε εἰς διαθήκην γένους εἰς φῶς ἐθνῶν)

이 말은 '이방의 빛'이 되어 이방인을 덮치고 점령하는 것인가? 말 그대로 '이방(인들)의 빛'이 되리라는 것이 아니던가?

마찬가지로 ἁλιεῖς ἀνθρώπων를 '사람들의 어부'라 했다 하여 그 의미를 훼손한 것 처럼 사법적 태도로 일관하는 것은, 해석학에 관한 한 역사적 성서신학의 맹아적 관습에 기인한다.

15.
우리는 이와 같이 해석의 세 번째 단계에 이를 때, 리바이어던의 한 유형인 요나의 물고기 도상은 '사람들의 어부'라는 신성한 신분으로서의 해석체와 부딪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또한 비로소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의미체가 갖는 본질이 축소 형태로 안전하게 유지되는 것이다.

게다가 저 플루타르크의 글에 나오는 참견꾼(πολυπράγμων) 같은 낚시꾼들까지도 잘 걸러낼 수 있다.

이영진 기호와 해석
▲이영진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16.
이것이 ἁλιεῖς ἀνθρώπων의 참된 기호이다.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이다. 다양한 인문학 지평 간의 융합 속에서 각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보수적인 성서 테제들을 유지해 혼합주의에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신학자로, 일반적인 융·복합이나 통섭과는 차별화된 연구를 지향하고 있다.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홍성사)', '영혼사용설명서(샘솟는기쁨)',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 등의 저서가 있다.

<저작권자 ⓒ '종교 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