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피해자 배상 책임 있는 4곳
박정희 정권, 배상금 산업화 사용
일본 정부, 국민 권리 개념 부족
한국 국민들, 성노예 문제 금기시
진보 세력, 반일감정 활용만 관심

일본 기시다 현충원
▲지난 5월 7일 한국을 방문해 현충원을 참배하고 있는 기시다 후미오 총리. ⓒ일본 총리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일관계 회복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된 요인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한일 외교관계 정상화를 선언한 한일기본조약(1965)이 식민지배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채 체결된 점이다. 다른 하나는 조약 체결 후 식민지배 피해자 배상이 실질적으로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강제징용 피해자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에게 배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첫 번째 책임은 식민지배 피해배상금 3억 달러를 수령한 박정희 정권에게 있었다. 이 자금은 분명 한국의 산업화를 위해 소중하게 쓰였지만, 그 대가로 식민지배 피해자들에게 주어진 것은 거의 없었다.

애초 박정희 정권은 피해배상금을 진정으로 피해자를 위해 사용할 생각도 없었을 뿐더러, 일본과의 외교관계 정상화를 통해 얻을 안보상 이익과 경제적 이익을 우선시해 피해배상금의 금액 자체도 이승만 정권에서 주장하던 금액(73억 달러)보다 훨씬 적게 책정했다.

당시 한국 정부가 73억 달러를 일본으로부터 받아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미국은 일본이 태평양 서안에서 공산주의 확산의 핵심 방파제가 되기를 원했고, 이를 위해 일본이 빠르게 경제회복을 이루기를 바랐다. 따라서 일본이 식민지배 피해배상금으로 과도한 경제적 부담을 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리고 당시 약소국이었던 한국은 미국의 이런 바람을 역행해 적절한 피해배상금을 받아낼 외교적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게다가 박정희 정권은 정당한 자유민주주의 절차에 따라 정권을 획득한 것도 아니었기에, 미국의 지지 없이는 정권 유지가 불가능했다.

일제 식민지배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만든 두 번째 집단인 일본 정부는 박정희 정권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박정희 대통령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나온 이력으로 인해, 당시 일본 고위 정객들과 두터운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일본에 대해 호의적이었고, 일본으로부터 배우고 얻어내야 할 점이 많다고 믿었던 그는 청구권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면서 기시 전 총리와 이케다 총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로 인해 일본 정부는 많은 힘을 들이지 않고 피해배상금 규모를 크게 줄여 3억 달러로 책정했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피해자 배상을 위한 조사와 실제 배상을 위한 업무 일체를 박정희 정권에게 떠넘겨, 한반도에서 일제가 저질렀던 수많은 제국주의 범죄와 전쟁 범죄를 덮고 넘어가는 데 성공했다.

사실 이는 국민의 권리라는 개념이 거의 없다시피했던 일본의 전통적 무벌중심 정치문화, 그리고 한국의 전통적 전제군주제 정치문화가 합쳐져 일어난 참사라고 할 수 있다. 지배자들의 이익과 체면을 위해 일반 백성들을 전쟁과 노역에 갈아넣던 비인간적이고 전근대적인 동아시아적 통치문화가 태평양 전쟁 종전 후의 일본, 그리고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의 한반도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일본 고위 정객들 누구도, 일제의 식민지배 야욕과 전쟁욕구로 인해 고통받은 한국 국민들에게는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일본 기시다 현충원
▲지난 5월 7일 한국을 방문해 현충원에서 방명록을 작성하고 있는 기시다 후미오 총리. ⓒ일본 총리실

식민지배 피해자들에 대한 피해배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세 번째 요인은 우리 한국 국민들에게 있었다. 특히 이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을 가로막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유교적 도덕관념이 지배적이었던 1960-70년대 한국에서 성노예 피해자들에 대한 언급은 금기나 다름 없었다. 피해자들은 피해 사실을 드러내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다. 주변인들 모두가 이들을 경멸적 시선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선이 조금이나마 변하게 된 것은 1975년부터 1981년까지 연재된 소설가 김성종의 장편소설 <여명의 눈동자> 덕분일 것이다. 그 이전까지 이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거론하는 작품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 소설은 당시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간 여성들이 얼마나 비인간적 처지에 놓여 있었는지 강렬하게 묘사하여, 이들이 분명한 피해자임을 확인시켜주었다.

이후 1991년 故 김학순 선생의 실제 피해실태 증언, 그리고 비슷한 시기 방영된 김종학 PD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김성종 소설의 드라마판)는 우리 사회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을 바라보던 경멸적인 시선을 본격적으로 반성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여기서 주지해야 할 점은 우리 사회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을 진정한 피해자로, 배상과 위로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한 시기가 생각보다 오래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1990년 이전까지 무려 4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본군 성노예 피해배상이 이루어지지 못한 데는 분명 피해자들을 ‘환향녀’ 취급했던 우리 국민 전체에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책임에 있어서는 오늘날 이 문제를 그들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는 진보정치 세력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그들 또한 식민지배 피해보상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만든 책임을 진 네 번째 집단으로 지목된다.

1990년에 현 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연) 전신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가 발족하기 전까지, 586세대로 대표되는 진보정치 세력은 강제징용 혹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다. 군사정권 타도와 주한미군 철수가 그들의 지상과제였기 때문이다.

진보정치 세력의 관심이 항일 독립운동가나 식민지 피해배상 문제로 이전된 것은 1987년 6월 항쟁이 승리를 거둔 후의 일이다. 6·29 선언은 586 세대에게는 커다란 승리였지만, 동시에 커다란 위기이기도 했다. 투쟁의 구심점이 사라져 진보정치 세력 전체가 이전투구 분열 양상으로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열상 덕에 1997년 12월 치뤄진 제13대 대선에서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어부지리로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진보정치 세력이 생존의 자구책으로 내세운 것이 반일감정이었다.

정대협의 정식 발족일은 1990년이지만, 단체 설립 준비는 1988년부터 이루어졌다. 바로 노태우 정권이 출범한 시점이다.

진보정치 세력의 식민지배 피해배상 노력이 전혀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진상조사도 이전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피해배상과 관련된 소송을 통해 피해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과 배려도 이끌어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나 배상 노력에 진정성이 없는 만큼, 진보정치 세력의 식민지배 피해배상 문제에 대한 태도 역시 진정성이 없다.

애초 그들의 항일 독립운동 신성화 작업과 반일감정 고조를 위한 식민지배 피해자 쟁점화 작업은 진정으로 피해자들을 도우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박정희 정권의 유지를 이어받은 보수 정권을 정치적으로 압박하고 진보정권 내부의 결속을 다지려는 의도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정의기억연대 윤미향
▲지난해 서울시청 인근 도로에서 열린 한일정상회담 규탄 시위에 참여한 정의기억연대. ⓒ크투 DB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대협 이사장이었던 윤미향 의원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후원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게다가 정대협은 1995년 7명의 피해자가 일본 민간에서 모금된 위안부 피해자 성금을 수령하자, 이들을 매춘부라고 부르며 피해자 명단에서 제외해 버렸다.

그리고 2015년 12·28 위안부 합의에 따라 일본 정부가 10억 엔을 내고 피해자들에게 1억 원씩 피해배상을 하겠다고 제안했을 때도, 배상금을 수령하지 말도록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압박을 가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진보정치 세력이 식민지배 피해자들을 어떤 태도로 대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단적 사례이다. 이들은 실제 피해자들의 배상 여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들의 정치적 명분과 이익만을 따진다.

마치 6·29 선언 이후 군사정권에 대한 투쟁의 구심점이 사라져 버린 것처럼, 어떠한 형태로든 식민지배 피해자 배상이 이루어지면 자신들의 정치적 자산이 사라질까 두려운 것이다.

생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한맺힌 세월에 대한 배상을 받으려 하는 식민지배 피해자들의 바람을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우습게 짓밟아 버리는 진보정치 세력의 행태는, 오늘날 실질적인 식민지배 피해배상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만드는 주 요인 중 하나이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