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넷째 주일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어젯밤 꿈을 꾸었습니다.”
“어젯밤 꿈엔 섧디섧게 울었습니다 / 참으로 억울하고 원통해서 / 엉엉 울어댔습니다 / 타 문화권에서 / 선교활동을 하다가 / 수류탄 파편에 맞아 죽어 돌아온 / 한 선교사의 시신을 보고서 말입니다 /
어느 외딴 섬에서 / 당신의 품 안에 그분을 안겨 드리며 / 온몸이 부서진 시신을 보고 / 저는 목을 놓아 울었습니다 / 내가 저렇게 죽어야 했는데 / 내가 먼저 순교하여 / 하늘나라의 영광을 차지해야 하는데 / 내가 저렇게 조각난 주검이 되어 / 하나님의 칭찬을 받아야 하는데 /
왜 나는 저 기회를 빼앗겼을까 / 나는 무엇을 하다 / 저 영광을 놓치고 말았을까 / 내가 그여야 하는 걸 / 하늘 영광은 주검을 덮습니다 / 그의 주검은 / 육신 온전한 내 몸뚱이보다 아름다웠습니다 / 그래서 저는 / 섧디섧게 울었습니다 /
일찍이 저에게 / 홀로서기를 연단시켜서 / 험한 세상 잘 이기며 / 사명 잘 감당하는 / 고고한 한 그루의 소나무로 남아 있게 하신 / 당신 뜻이 고마운 줄 알면서도 / 어젯밤 꿈에는 왠지 섧기만 했습니다 /
당신 만날 새벽에 / 꿈에서 깨었을 땐 / 그 짜디짠 눈물이 / 귓속까지 고여 있었습니다 / 어느덧 익어 가는 세월 속에서 / 이제 저도 조금씩 당신을 닮아가고 / 한 걸음 한 걸음 / 당신 계신 / 영원한 본향에 이를 때가 / 가까움을 느낍니다...(하략)”
위의 시는 저의 첫 시집 ‘어젯밤 꿈을 꾸었습니다’에 나오는 표제시입니다. 지금 보면, 시인으로서의 예술적 심상보다는 활활 타오르는 소명감으로 가득 찬 목회자의 이미지가 더 강하게 느껴지는 시입니다. 특별히 이 시는 프라미스 콤플렉스 건축을 앞두고 설계를 하던 때에 지은 시입니다.
시가 평범한 것 같지만 시적 화자는 이슬람권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수류탄 파편에 맞아 죽은 선교사의 시신을 보고 원통하고 억울해서 엉엉 울었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선교사의 죽음이 원통하고 억울하다고만 하면 산문이지요.
참으로 원통하고 억울한 사연이 선교사의 죽음이 아니라 시적 화자의 순교였습니다. 그의 순교가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너무나 부러워서 엉엉 울어댄 것이죠.
시적 화자의 소원은 “내가 저렇게 죽어야 하는데 / 내가 먼저 순교하여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차지해야 하는데…”에서 보듯이 순교였습니다. 일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시적 화자의 소원이었던 것이죠.
시적 화자는 목양을 하며 큰 교회당 건축을 준비하고 있는 목회자였기에, 현실적으로 이슬람권의 선교사로 가서 죽을 수는 없지요. 그런데도 시적 화자는 섧디 서러운 눈물을 터트리며 순교를 갈망하는 속마음을 ‘꿈’이라는 도구를 통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는 목사이자 시인이었기 때문에 꿈속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시로서 형상화한 것입니다.
저에게 있어 이번 주간은 올해 가장 힘든 고난의 행군이었습니다. 일주일 내내 새학기 새출발을 위한 헤리티지 특별새벽기도회를 인도하고 월요일에는 부산 지역 지도자 신년 만찬회에 참석하여 설교를 하고 왔습니다. 수요일 오전, 저녁 설교, 또 철야기도회 설교와 각종 모임까지 너무나 힘든 일정이었습니다.
그때 저의 뇌리에 이 시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때의 초심을 생각하며 힘을 내었습니다. 온 몸이 찢겨 순교한 이슬람권 선교사의 순교를 바라보며 “내가 왜 그 기회를 빼앗겼을까, 그 영광을 놓치고 말았을까…” 울부짖으며 순교를 갈망하던 목회자의 불타는 소명감을 다시 한번 새롭게 떠올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살아있는 순교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제 한 몸, 시간과 체력 모든 것을 다 던져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살아있는 순교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몸은 천근만근이고 마음은 지쳤지만, ‘어젯밤 꿈을 꾸었습니다’라는 시를 읽으면서 다시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새로운 힘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다시 이 시를 노래하며 행복하게 사명자의 길을 달려갈 것입니다. 아니, 살아있는 순교자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주님이 계신 영원한 본향에 이를 때가 행복한 미소 지으며 달려갈 것입니다.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