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김재성 박사
▲김재성 박사(한국개혁신학회 전 회장,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전 부총장).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 15:8-9)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은 교회의 예배를 전면적으로 개혁하면서, 성도들로 하여금 순결한 믿음을 갖추도록 양육해 나갔다. 칼빈과 종교개혁자들의 목양사역은 사회적 변화를 갈망하던 자들과 함께 정치적이며, 민중적인 열망을 성취하려 했던 운동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은 중세 말기 교회 안에서 자행되던 부패와 오류를 시정하려는 신학적이며, 신앙적인 회복 운동이었다. 윤리적 갱신이라고 해석한다거나, 반항자들의 분파운동으로 격하시켜서는 안 된다. 종교개혁자들은 잃어버린 복음을 성경에 기록된 대로 회복하고자 바른 교리를 제시했다. 루터는 성경을 번역했고, 츠빙글리는 강해설교를 전면적으로 실시했으며, 칼빈은 일관된 신학을 담아서 성경주석을 남겼다.

특히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본질적인 성경해석을 제시하면서, 구원의 길을 왜곡하고 있던 중세 말기 로마 가톨릭의 교리들에 대해서 신학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루터에게서 시작된 면죄부에 대한 이의제기, 츠빙글리가 폐지한 미사, 칼빈이 제시한 새로운 예배의 내용들이 유럽 각 지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특히 영국에서 일어난 박해를 피하여 유럽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은 성경적 예배의 내용들을 확정하는데 힘겨운 투쟁을 펼쳐 나갔다. 전면적인 예배의 개혁을 시도하던 종교개혁자들과 성도들은 교황으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견뎌야 했다.

중세 말기에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피터 롬바르드(Peter Rombard, 1090-1160)가 초대 교부들의 글에서 임의로 편집한 『명제집』(the Sentences)을 지침으로 삼았다. 하나님의 거룩성을 담고 있는 숫자가 일곱이며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하루를 안식하셨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롬바르드는 하나님의 선물들을 완전하게 제시하는 일곱 가지 성례들을 고안해 냈다. 이로 인해서 예배의 초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없어지고, 자기 자신의 공로를 쌓아나가면서 스스로 선행을 의존하려는 종교인들의 집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특히 고해성사와 미사, 화체설이라는 신비적인 성만찬 교리 등은 성경보다 더 높은 권위를 자랑하는 교황과 전통이라는 탈을 쓰고서 무지과 타락의 늪에 빠져들었다. 루터가 건강 악화로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하던 그의 노년기에, 이미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가 카펠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젊은 목회자요 신학자인 칼빈이 1536년 여름부터 제네바에서 설교하면서, 성경적인 예배를 정착시켰다.

칼빈은 당시 로마 가톨릭에서는 그저 헛된 종교적인 행위를 반복하고 있음을 일일이 열거하였다; 두 손을 합장하는 것, 성만찬을 받기 위해서 무릎을 꿇는 것, 제단에 나와서 무릎을 꿇는 것, 제단의 귀퉁이에 입맞춤을 하여 존경을 표현하는 것, 손으로 십자가 성호를 긋는 것, 두 손을 높이 들어서 크게 펼치면서 외적으로 신앙심을 드러내는 행동, 양손을 접어서 살아있는 자를 언급하며 높이는 것, 손으로 진행자를 향해서 높이는 것, 성물이나 거룩하다는 제단에 펼쳐진 헝겊을 손을 닦는 것, 두 손을 높이 올리는 것, 가슴을 한 번이나 세 번 때리는 것, 성작 혹은 잔을 덮었던 것을 열어놓는 일, 성만찬에 제공되는 빵에다가 세 번 성호를 긋는 것, 제병을 담은 그릇의 밑바닥이나 중간이나 또는 윗부분에 손을 대거나 입과 두 눈을 비벼대는 것, 등등.

어떤 이들은 이런 식으로 예배에 참여한 기독교인의 외적 행위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의 본질을 벗어나서, 그저 각 사람의 지극히 감상적이며, 주관적인 행위들로 마치 공로를 쌓아가도록 부추기는 것과 내용이 없이 그저 남들에게 보여주려고 몸을 움직이는 갖가지 종교적 제스처에 대해서 무심히 넘어갈 수는 없다. 다시 말하지만,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행위들과 각종의 예식들에 참여하는 자들의 제스처를 철저히 금지시켰는가? 이런 제단 위에서의 이런 행동들을 위선적으로 수백 번 실행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을 유효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배는 그저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 신부들은 외적인 것들을 시행하는 일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었으나, 칼빈은 성경에서 가르친 예배의 “본질적인 것”에 대해 차별화된 안목을 제시했다.

1. 개신교회의 예배 모범을 정립한 칼빈의 제네바

종교개혁 이후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의 개신교회가 공적으로 드리는 예배의 내용들은 칼빈의 제네바 교회로부터 확산된 것이다. 칼빈은 제네바의 목회자로 부름을 받아서, 설교의 사역에 모든 초점을 맞추면서도 가장 성경적인 예배의 구성요소들을 회복해냈다. 로마 가톨릭의 미사와 성례를 철저히 폐지한 후,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그리고 초대교부들의 근거에 의거하여, 공적인 예배의 내용들을 개혁하였다. 이러한 노력들은 단순히 보이는 예배의 회복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칼빈이 성경적 신학 사상 중심축으로 하는 종합적인 교리체계가 뒷받침을 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칼빈이 지속적으로 참된 예배의 회복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순수한 신앙과 단순한 성경적인 신학을 확고히 정립하였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칼빈이 제네바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동안에 종교개혁의 최전선에서 나서서 참된 예배의 구성과 외적인 예식들을 바꾸는데 힘썼다는 사실들이다. 로마 가톨릭과의 민감한 대립적 상황에서 각종 예배에 관련한 문제들이 발생할 때마다, 칼빈은 개혁주의 진영을 대표하여 정확한 가장 성경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필자는 오늘날 우리 개신교회의 예배가 형성된 역사적 과정들과 그 원천에 관련한 탐구를 하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칼빈과 청교도 지도자들이 주고 받은 편지의 내용을 통해서, 예배의 내용들이 정리되어가던 과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칼빈이 단지 하나의 도시, 제네바에 있는 교회만을 위한 목회자로 그친 것이 아니라, 소용돌이치고 있던 당시 유럽 지역의 거의 모든 지역들을 지도하면서, 종교개혁의 예배 원리와 목회적 적용을 위해서 헌신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루터와 츠빙글리가 서거한 후, 다음 세대의 지도자로서 유럽 여러 지역들의 문제들에 대해서 칼빈이 자문하고 조언하였고, 그의 결정적인 기여로 인해서 가장 성경적인 예배내용들이 정착되었다. 특히 칼빈이 남긴 가장 결정적으로 중요한 공헌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청교도들의 교회 개혁에 있어서 원천이자 모델이 되었다는 점이다.

영국에서 메리 여왕(1553-58 재위)이 즉위한 후 로마 가톨릭으로 교회체제를 완전히 재구성하려 하자, 이를 거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녀의 박해를 피해서 바다를 건너서 유럽 대륙으로 피신을 갔던 청교도들은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로마 가톨릭의 예식들을 거부하다가 수많은 지도자들이 순교했고, 살아남은 지도자들도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이미 역사적인 종교개혁의 수레바퀴를 전진시켜온 지도자들 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1554년 6월 2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건너갔다. 이들은 로마 교회의 미사와 각종 예식들, 성공회의 타협적인 예배 내용들을 전면 거부하였다. 오직 성경 말씀에 따라서 자신들의 선한 양심을 다바쳐서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노력했다.

독일에서는 이미 루터파의 개혁운동이 확산되었기에, 다양한 개신교회의 모임들을 허용하고 있었다. 특히, 프랑크푸르트시 당국에서는 프랑스 난민교회도 허가해 줘서 정기적으로 예배당(The Church of the White Ladies)에서 집회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잉글랜드에서 온 청교도들은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루터파 교회들이 자신들이 추구해온 예배 방식과 상당히 다른 것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곧바로 발견하게 되었다. 잉글랜드에서 건너 온 피난민들 중에는 성공회 국가교회체제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청교도 신앙을 가진 지도자들과의 논쟁이 점차 가열되었다. 잉글랜드 피난민들이 잠정적으로 채택한 주일 공예배의 내용들은 매우 단순했다:

성경 본문의 낭독과 권고
죄의 고백 (칼빈주의적 기도–성공회 예식서에서 나온 것과는 다름)
시편 찬송-평범한 곡조
성령께 대한 기도
(성경 봉독이 이어지는) 설교
일반 기도
사도신경
시편 찬송
축도

위에 예배의 순서는 다분히 칼빈의 제네바 교회 주일예배의 내용과 비슷하다. 일부는 성공회의 기도서에 나오는 예배 순서들과 거의 비슷하지만, 성만찬과 세례식의 내용은 상당히 차이가 났다. 당시에는 성만찬에 대한 신학이 달라서, 예배의 중요하 내용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영국 성공회에서는 가톨릭의 ‘화채설’과 루터파는 ‘공재설’ 중에서 중간입장을 채용하고 있었고, 청교도들은 칼빈의 ‘영적 임재설’을 따르고자 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