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투 DB
개혁신학에서 반틸(Cornelius Van Til, 1895-1987)의 ‘전제주의(Presupposition)’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전제’의 핵심은 ‘하나님의 창조’이며, 이를 성경 해석의 중요 고리로 삼는다. 이 ‘창조’에서 ‘하나님의 영광, 죄, 심판, 구속’ 등이 따라 나온다.

곧 하나님이 창조주이기에 피조물인 인간과 만물은 그를 섬기고 그를 영화롭게 해야 할 당위성을 요구받고, 그것을 안 할 때 죄가 된다. 죄의 결과로 인간은 심판을 받고, 그를 심판에서 건지기 위해 ‘구속의 필요성’이 요구된다. 이 ‘창조론적 전제’가 무너지면, ‘하나님 영광, 죄, 구속’같은 핵심 교리도 함께 무너진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죄로 타락한 인간은 ‘창조’에 대해 무지해졌기에, 인간에게 더 이상 ‘창조론적 전제’가 먹혀들지 않게 됐다. 다만 그것은 신학을 전개해 나가는 하나의 논거가 되고 있을 뿐이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만물에 하나님의 신성(神性)이 나타나 있지만, 하나님을 알게 하기엔 충분치 않다(단지 핑계할 수 없게 할 정도)라는 사실과 궤를 같이 한다(롬 1:20). 설사 ‘하나님의 창조’를 죄인들에게 알려준다 해도, 죄인이 그것을 듣고 구원을 받지 못한다.

죄인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야만 구원을 얻는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따라서 그들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죄인을 살리는 ‘구속의 복음(the gospel of redemption)’이다. 이 원칙은 ‘죄인의 성경 읽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연대기적’ 순서를 따른다면(무죄하다는 가정 하에서) 맨 앞의 ‘창세기’부터 읽어야 하겠지만, ‘죄인’에겐 ‘복음서’부터여야 한다.

‘구속(redemption, 救贖)의 지식’이 결여된 ‘창세기 독서’는 ‘유대인의 성경읽기’에 불과하여, 그것이 구원으로 이끌지 못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39-40).

이 ‘구속’의 전제는 ‘전도의 내용과 방향’에도 영향을 미친다. 어떤 사람들은 전도할 때 ‘하나님은 창조주시기에 피조물인 인간은 자기를 창조해 준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당연하니 그를 믿고 섬기라’고 한다.

일견 성경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인 전도 방법으로 보이나, 이런 ‘전도 내용’은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서만 통용 가능하다.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전도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다만 가설을 세운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심판 아래 있는 죄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요구받기 전에, 먼저 구원부터 받아야 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창조주 하나님 지식’ 이전에 ‘구원의 지식’이다. 만일 그들이 구원받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의무부터 요구받으면 ‘그 당위성’에 부응하여 구원을 받으려는 ‘율법주의’가 그들 안에 배태된다.

그리고 그들이 구원받은 후, 그리스도인으로서 요구받는 ‘당위(當爲)’도 ‘창조론(創造論)적인 전제’보단 ‘구속론(救贖論)적인 전제’에 더 의존된다. 곧 자신을 구속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읍하여 그를 사랑하고 섬기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사랑의 발분에 의한 섬김엔 당연히 기쁨과 감사가 수반된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삼상 29:15)”.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찌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찌어다(시 10:1-2)”.

◈구속으로 말미암은 창조

연대기(年代記) 순으로 본다면, 당연히 ‘창조(創造)’가 ‘구속(救贖)’을 앞서지만, 창조의 동기 면에서 보면 둘의 순서는 역치(易置)된다. 성경은 ‘창조’를 하나님이 ‘아들 그리스도를 위해 하신 것’, 곧 ‘구속의 결과물’로 말씀한다.

아래 성경 본문은 ‘아들 그리스도의 구속’과 ‘창조’를 연결지우며 그것을 시사한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4-16)”.

하나님이 장차 아들 그리스도가 구속을 성취할 것을 내다보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만물을 창조해 주셨다는 말이다. 다음 구절 역시 ‘구속’을 ‘창조’이전의 경륜으로 돌리며, 위의 논거를 정당화한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3-5)”.

따라서 역사적인 순서는 ‘창조-구속’이지만, ‘하나님의 구속 예정’ 안에서 본다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이 ‘창조’를 앞선다.

이 ‘구속으로 말미암은 창조’는 엄마가 아직 임신도 안했는데 아기가 입을 옷, 장난감 등을 미리 준비하는 것에 비견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아들 그리스도가 이룰 구속(redemption, 救贖)을 내다보시고, 거기에 대한 보상으로 만물을 창조해 주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4-5).”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