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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한복음 1장 16-17절

세례 요한이 주님을 증명하는 부분입니다. 물로 세례를 주는 요한은 주님보다 6개월 먼저 주님이 오심에 대해 전파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에 대해 “내 뒤에 오시는 분”이라고 말하면서, 그의 오심은 놀라운 사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놀라운 은혜, 즉 은혜의 폭발이 되는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이를 중심으로 ‘은혜 위에 은혜’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넘치는 은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16절)”.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은 은혜가 풍성해서 넘친다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을 받아들이는 역사적 사건을 충만함과 연결시켜 ‘은혜 위에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충만한 은혜요, 실로 넘치는 은혜라는 말입니다.

은혜를 사전에서 찾으면,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혜택, 값없이 주는 사랑’이라고 나옵니다. 세상에서는 최고의 사랑을 ‘부모님의 은혜’로 표현합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도저히 값으로 계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바로 계산으로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육체를 입고 오심이 넘치는 은혜입니다. 주님의 육체에는 신성의 특성이 나타납니다. 주님이 육체로 오신 것은 주님의 신성(神性), 신적 특성이 육체로 나타난 사건입니다. 이 넘치는 은혜를 충만으로 표현하는데, 이 넘치는 은혜는 아무리 덜어 내어도 줄어들지 않은, 감소되지 않는 충만함입니다.

마치 햇빛의 빛남이 세월의 흐름에도 오랜 옛날과 같이 여전하듯, 그리고 아무리 가물어도 바닷물이 줄어들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저 벳새다 날 저문 풀밭 언덕에서 굶주린 5천 군중을 모두 배불리 먹이고도 남았던 그 풍성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은혜를 두고, 너무나 풍성하여 감당할 수 없도록 넘치는 은혜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2. 과분한 은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16-17절)”.

주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를 찾아오심은 ‘분에 넘치는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은 감당하지 못할 축복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너무나 분에 넘치는 우리를 위한 사랑이자 축복이라는 말입니다. 더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면, “지금 우리가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다”입니다. 도저히 격에 어울리지 않는 인격적인 대우를 받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전에 족장 야곱이 귀향하던 얍복강 나루에서 밤을 지샐 때,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감당할 수 없사오니 내가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하고 넘치는 은혜에 감격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시골 논두렁에서 쑥 캐다 넘어지던 그 소년이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줄 몰랐습니다. 할머니 치마 폭 잡고 멀리 읍내에 있는 교회를 따라가던 코흘리개 소년이 교수가 되어 가르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 내 인생, 지금은 축복으로 넘쳐 흘러 출렁이는 강물 같습니다. 분에 넘치는 이 큰 축복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노라, 목이 매여 기도하던 야곱이 바로 ‘저’였음을 고백합니다. 저만 아니라, 돌아보면 여러분도 그런 넘치는 은혜를 받은 것으로 고백하실 것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가 실로 과분한 은혜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3. 미래의 큰 은혜

현재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 있을 더 큰 은혜라는 말입니다. 모세로부터 받은 율법은 죄를 알게 만들고, 죄를 들추어냄으로 죄를 깨닫게 합니다. 그리하여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지만, 죄를 용서하지는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제한성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은혜와 진리는 무한한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은혜와 진리는 죄를 용서하여 율법의 제한성을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 위에 은혜’는 넘치는 충만을 담고 있습니다. 나아가 ‘은혜 위에 은혜’, 즉 충만한 은혜란 현재에 국한되지 않고 미래에도 연장이 계속됩니다. 아무리 좋은 은혜라 해도, 아무리 좋은 축복이라 해도 현재에 끝나고 말면 좋은 것이 아닐지 모릅니다. 미래가 보장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 위에 은혜’는 보장성을 담보하는 희망이 넘치는 은혜입니다. 꽃 시절이 저물면서 희망이 점차 사라지는 나이든 노년에는, 생기 넘치는 희망이라고는 찾아보려 해도 어렵기만 합니다. 점차 생명이 말라가면서 죽음의 신호가 자꾸만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래가 보장된 넘치는 희망과 소망이 영혼을 충만하게 감싸면, 전혀 힘이 들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 ‘은혜 위에 은혜’는 주님으로 인해 보잘 것 없는 노년의 삶에도 시들지 않는 영광이 되고, 쇠하지 않는 영광으로 변화시키는 마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김충렬
▲김충렬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4. 정리

코로나로 인한 죽음의 위협이 우리를 엄습해 오는 지금입니다. 이 엄혹한 현실에서도 건재하면서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우리입니다. 가는 인생의 길에 은혜 위에 은혜를 체험하는 넘치는 축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주님! 육신을 입고 오신 넘치는 은혜를 체험하게 하소서, 주님이 나를 찾아 오신 과분한 은혜를 체험하게 하소서, 그리고 미래에도 보장되는 더 큰 은혜를 체험하게 하소서, 육체로 오신 주님을 체험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반드시 복을 내리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충렬 박사(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전 한일장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