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리아누스 안티노우스 동성애
▲로마 5현제의 한 사람인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그 동성애 상대였던 안티노우스의 흉상. (본 사진은 해당 기고와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위키피디아

요즘 동성애 이슈에 대한 크리스천 내의 양분된 목소리를 들어보면, 분명 같은 동성애를 바라보는 관점인데도 양자가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양상이다.

이런 차이를 가져오는 요인엔 성경 말씀에 대한 이해도나 깨달음의 정도와 더불어, 양자의 신학적인 배경 또한 한 몫을 한다고 생각된다.

1. 해방/민중 신학의 약점

최근 한 인터넷 신문에 실린 어떤 이들의 차별에 대한 이슈와 관련된 글을 읽어보면, ‘가부장 문화 위에 바탕한 한국교회’, ‘수구보수 신앙인들에 의해 분단고착에 기여한 한국교회’, ‘배제 혐오를 정당화 하는 문자주의 해석’, ‘노동자의 교회가 아닌 자본가의 교회’, ‘평등과 해방의 신학 외면’, ‘혐오를 사랑으로 왜곡’, ‘젠더평등 외면하는 교단의 여성단체’, 또 ‘인간이 나눈 경계와 편애’, ‘민중 선교를 해 온 기장 교회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등의 표현으로 도배가 되어 있다.

이런 내용들은 대부분 해방/민중 신학 계열이 정통 보수신학 계열에게 가하는 비판의 내용들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시작된 해방신학이 흑인신학, 여성신학, 민중신학등 세계적으로 다양한 상황신학의 원천이 되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상황 신학은 특정하고 구체적인 사회 문화적 환경과 깊이 연관을 맺고 출발하고 있어, 구체적 삶의 정황의 문제를 바꾸는데 무엇보다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해방/민중 신학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한 삶으로의 헌신을 강조한 장점도 있는 반면, 신학의 출발을 ‘바른 말씀 이해’가 아닌 사회적 불의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실천하는 이른바 ‘바른 실천’에 둠으로써, 계시의 말씀에 대한 심도 깊은 성찰이나 영적 깨달음엔 자연히 취약할 수 밖에 없는 약점이 있다.

결국 매뉴얼 없는 실천이라는 지나친 자기 소신에 의존케 되어, 인본주의적인 마인드와 판단의 모호함과 혼동과 혼란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에 대한 한 예가 반동성애적 입장을 견지하는 보수 신학에 “혐오를 사랑으로 포장한다”고 비난하는 경우이다. 이는 해방/민중 신학의 속성상 말씀에 대한 성찰 결여로 ‘죄’와 ‘죄인’을 구분짓는 성경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한 탓이다.

이들에게 ‘죄’란 정의롭지 못한 정치사회적 구조나 차별과 압제, 학대와 같은 파괴적 관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죄’로부터의 해방 즉 ‘구원’이란 이런 ‘구조적인 악’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성경은 창세기 3장부터 요한계시록 22장에 이르기까지 전반에 걸쳐 인간의 죄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고, 죄를 미워하고 죄와 끝까지 싸우되(히 12:4) 죄인을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후 2:5-11).

그러나 해방/민중 신학은 기록된 말씀에 따라 동성애를 죄로 규정하는 보수 신학을 ‘배제 혐오를 정당화’하는 ‘문자주의 해석’이라 비판한다. 그러면 같은 성경을 읽는데, 왜 이렇듯 다른 주장이 나오게 되는 것일까?

2. 문자적인 해석 거부

첫째로, 해방/민중 신학 계열은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권위로부터 나온, 성령의 영감으로 씌여진 영원한 진리의 살아있는 말씀이라는 믿음을 거부하고, 성경 해석에 있어 기본이 되는 문자적 해석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말씀의 권위와 가치를 비유나 상징 또는 신화로 오독하고 평가절하하는 인본주의적인 해석을 낳는다.

문자주의적 해석은 모든 일반 장르의 문헌에서처럼 통상적이고 자연적이며 정상적인 해석 방법으로서, 결코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배경을 도외시 하지 않는다. 문자주의적 해석은 알레고리적 해석이나 모형적, 상징적이고 신비적인 다른 차원의 해석들의 토대가 되기에, 의미의 오독이나 무리한 비약을 차단하는 최우선적으로 중요한 기본적 해석이다.

창세기에 기록된 바, 에덴 동산에서 최초의 인류는 동산의 모든 실과를 다 먹을 수 있도록 창조주 하나님으로 부터 허락을 받았으나 오직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은 금했을 때, 이를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인간의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불순종 행위는 무엇이 옳고 그름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특권에 대항하는 죄악으로 간주되었다. 오늘날 주어진 성경말씀 또한 하나님의 계명으로, 크리스천에겐 이를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가 주어진다.

동성애에 대한 금기의 말씀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이를 해방/민중 신학이 ‘배제 혐오를 정당화’하는 ‘문자주의 해석’이라 비난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몰이해요, 판단의 심각한 오류이다.

 3. 죄에 대한 통찰력 결핍

둘째로, 죄에 대한 통찰력에 있어 해방/민중 신학과 보수정통 신학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해방신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구스타보가 이해하는 출애굽기의 ‘유월절’은 구속의 은총에 대한 메시지와는 무관하게 온전한 정치적 해방만을 의미하고, 구원 또한 하나님의 왕국이 상징하는 역사적 인식의 충만함으로만 해석된다.

그러나 보수정통 신학에서 통전적인 성경적 통찰을 바탕으로 이해하는 ‘유월절’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과 아울러 장차 죽임당하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영적인 이스라엘이 되는 세계 만민을 구원하실 복음에 대한 예표이다.

죄와 해방과 보혈에 대한 함의를 이해함에 있어, 양자가 이렇듯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사회적 불의와 압제 등 관계적 파괴를 가져오는 구조적인 죄를 죄의 근원으로 간주하는 해방/민중 신학은 사회적인 죄가 인간 개개인의 죄성의 산물이란 것을 간과한다.

죄는 잘못된 행동을 하도록 우리 안에 달라붙어 있는 내재적인 기질(inherent inner disposition)이다. 이런 점에서 죄의 행동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죄를 낳는 내적 동기이다.

죄는 영적 무기력을 수반하며 신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 안의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한다. 악한 개인들이 모여 생겨나는 결과가 사회 악이다.

그러므로 사회-집단적인 차원의 죄를 논할 때는 먼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죄 또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 우리와 타자들과의 관계까지 멀리 영향력을 미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사회적 구조로부터 죄의 원인을 찾으려는 해방/민중 신학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개인의 치유 대신 사회적 여건을 변화시키는 것에 더 주력하게 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목하 한국의 해방/민중 신학은 동성애를 심각한 죄로 보지 않기에, 동성애로 인한 동성애자 개인 차원의 정신적-신체적 불이익뿐 아니라 향후 가정과 사회질서의 전도, 에이즈 확산, 출산율 감소등의 범 사회적-국가적으로 끼치는 손실등 여러 폐해에 무감각한 실정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동성애를 막는 사회적 여건 변화에 주력하는 대신, 오히려 포괄적 차별금지법 같이 동성애를 부채질하는 역기능적 사회적 여건을 가속화 하는데 더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4. 편애냐 박애냐

죄성에 대한 민감성이나 포괄적 분별력이 없는 해방/민중 신학에게 동성애자는 그저 무언가/누군가를 반대하고 불안을 조장하면서 자기 정체성 내지 자기 정당성을 구현하려는 보수신학에게 정죄의 시선으로 차별받는 마이너리티일 뿐이다.

그러나 보수 신학이 보기에 동성애자는 비정규직 노동자, 장애인, 과부, 고아, 이주민(나그네)과 동질적 성격의 소수가 아니다. 동성애는 비정규직 노동자, 장애인, 과부, 고아, 이주민 그외 누구나에게 미칠 수 있는 정신심리적, 도의적인 병폐를 안고있는 심각한 보이지 않는 이슈이다.

동성애는 구스타보가 말하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편파적인 사랑에 해당하는 범주에 속한 성질이 아니기에, 해방 신학이 추구해 온 가난한 자들의 포괄적 해방을 도모하는 것과는 본질상 종류가 다르다.

한편 어떤 이는 복음의 정신이 편애를 말하지 않는 무차별적 사랑인 박애라고 주장하지만, 이 또한 스스로 해방/민중신학의 자기 모순성을 스스로 노출하는 격이다.

왜냐하면 해방신학의 구스타보는 일찌기 빈자에 대한 하나님의 편애를 주장함에 있어, 정통 보수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보편적-무차별적 사랑을 대립관계에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스타보의 편애적 사랑 또한 어디까지나 성경에 있고, 보편적 사랑 또한 그러하다. 성경엔 ‘박애’도 있고, ‘편애’도 있다.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박애’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와 ‘나(예수)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더욱 사랑하시는 것은 ‘편애’이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경계와 편애뿐 아니라 인간 편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즉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편애를 받는 삶을 살아갈 것도 간곡히 주문한다.

주님께서 인생들을 위해 이 땅에서 베푸신 사랑의 돌봄은 복음을 전하심과 가르치심과 치유하심의 사역으로 나타났다. 동성애의 치유는 성령의 개인적 터치를 통한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서 온다는 귀중한 진실을 결코 외면해선 안 될 일이다.

크리스천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 안에서 우리 이웃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삶을 살도록 권면, 인도, 경책, 훈계하며 섬기라는 것이 성경의 지침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궁극적인 이웃 사랑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곡해하여 인간이 나눈 경계와 편애를 허무는 것만이 복음이라는 식의, 아무런 경계와 편애의 기준설정 조차 없이 허공을 치듯 막연한 도올 식의 미혹된 주장을 펴는 것은 영혼에 대한 돌봄의 개념이 없는 까닭이다.

보수 신학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것은 원시적 안목에서 동성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저들을 가르치고 치유하며 돌보기 위한 최선의 방식이요, 안전장치인 것이다.

5. 동성애는 존엄적 인권에 역행

동성애는 해방/민중 신학의 주장과는 반대로,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천부적이고 보편적인 존엄성을 유린하는 자해적인 행위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은 한국 사회를 바야흐로 일반 시민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비도덕적이고 비상식적이고 불건전한 사안에 대해 자유롭게 자신의 신념을 피력하고 주장하는 것을 금지하게 하므로 표현의 자유와 교육적 역량과 기능에 심한 제약과 타격을 주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해방신학은 대중들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복음의 메시지의 함의를 이해할 수 있고 역사에 변화를 줄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결국 동성애 이슈에서 보듯 말씀의 매뉴얼 없는 실천으로 인한 방향성 상실로 혼동과 혼란을 부채질하는 역기능적 역할만을 한껏 감당하고 있는 형국이다. 

 

6. 동성애 반대가 가진 자의 횡포인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의 해방/민중 신학 계열은 도올을 비롯해 예외없이 동성애 이슈와 관련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문제에 대한 보수 신학 계열의 반대에 대해 하나같이 가진 자의 횡포로 몰아 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막스의 이론에서 변증법적 과정에 의해 구질서의 지배사회 계급이 자신들의 자리와 세력을 고수하려 하자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는 분연히 이렇게 일갈했다. “성소수자를 치료 대상으로 보고 정죄하는 것이 창조 정신과 교회 질서를 지키는 일이라고 정말로 확신한다면, 지금의 지위와 교회를 비롯해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광야의 요한처럼 나와서라도, 혐오를 사랑이라 외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가진 것을 내어놓고 외칠 수 있다면 진정성이라도 신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으리라. 가진 자의 타자 혐오는 자기 것을 지키려는 기획된 증오이기 때문이다.”

위 질문자가 주장하듯 가진 자의 ‘타자 혐오(잘못된 표현이다. ‘동성애 혐오’가 맞다)’가 자기 것을 지키려는 기획된 증오라면, 필자와 같이 가지지 않은 자의 동성애 혐오는 과연 무엇일까 묻고 싶다.

이 질문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기 것’엔 지위나 경제적 소득만이 해당되는가? 그러나 적어도 하늘의 유업의 상속을 기다리는 크리스천이라면 그런 소유관을 드러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

필자의 동성애 혐오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천지는 없어져도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신 성경의 말씀(마 5:18)을 지키고, 동성애 당사자를 돌이키고, 우리의 이웃을 지키고 싶은 거룩한 영적인 연대감과 책임감에 연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기존 교회에 여러 바람직하지 않은 문제들이 있어왔다손 치더라도, 적어도 보이지 않는 궁극적 진리의 실체와 그 가치를 인지하는 자라면,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의 구분은 하여야 마땅하다고 본다.

해방/민중 신학이 유물론적 사회주의와 믹스되어 그런 프레임으로 동성애 이슈에 반응하는 보수 신학을 보게 되면 이와 같이 복음의 본질과 동떨어진 비논리적이고 정황상 무리하고 어색한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7. 문화적 상대주의와 도덕적 위태

죄를 미워하되 죄인을 사랑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는(고후 2:5-11) 동성애 이슈를 대함에 있어, 죄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포괄적인 치유 방법을 강구할 필요가 있는 동시에, 사회적 법령 제정에 있어서는 개별적 차별금지법 차원에서 특수하게 다뤄져야 하는 것이 바르고 바람직한 것이다.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 본연의 고유한 양성적 가치를 해체시키고 ‘젠더(gender, 사회적 성)’라는 성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시키려는 시도이다.

미국의 의약품이나 식품에는 거의 웬만하면 NON-GMO 표기가 되어있다. 젠더 질서의 도입은, 마치 GMO(유전자 변형 생물)의 구축이 유기 농업에 치명타를 가하거나 생태계의 교란을 유발케하는 역기능적 위험성을 내포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것은 해방/민중 신학이 보편적, 객관적, 절대적 진리인 말씀의 통찰보다 먼저 성급히 신념에 따른 행함을 앞세우고 자신함으로써, 행함의 기준이 되는 말씀에서 벗어나 결국은 도덕적인 해절드(위태)로 귀결되는 문화적 상대주의로 빠져 버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예수님이 싸우신 것은 해방/민중 신학이 주장하듯 그저 간단히 유대인의 선민의식이 아니라, 선민 즉 택하신 백성(오늘날의 크리스찬)의 주인, 주권자이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성을 부인하고 예수의 말씀을 무시하고 부인하던 영적으로 소경된 저들의 무지와 교만과 아집이었다.

주님의 근심과 구원의 대상은 특정 소외계층이나 민중뿐 아니라 목자 없는 양–예수의 영이 없는 신앙 지도자, 말씀 없는 신자–같이 유리하고 방황하는 그 누구나이며 그 모두인 것이다.

목하 기독교의 허울만 쓴 도올식 해방/민중 신학은, 노동과 평등이란 구호를 유독 내세우며, 진리가 그룹의 목적 부합성에 따라 정의되고 목적이 진실보다 앞서는 실용적 상대주의적 노선을 걸으며, 친 사회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문재인 정부와 빚어내는 시너지 효과가 다방면에 걸쳐 극에 달한 느낌이 든다.

모쪼록 한국의 해방/민중신학이 동성애 이슈와 관련한 법 제정에 직면하여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에서 진정한 해방의 의미를 성경에서 재발견하고, 이 법의 제정이 향후 개인과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미칠 영향력에 대해서 보다 신중하고 세밀한 분석과 숙고를 함으로써 바른 실천을 행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박현숙
▲박현숙 목사.

박현숙 목사
인터넷 선교 사역자
리빙지저스, 박현숙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9awEs_qm4YouqDs9a_zCUg
서울대 수료 후 뉴욕 나약신학교와 미주 장신대원을 졸업했다. 미주에서 크리스천 한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해 왔다.
시집으로 <너의 밤은 나에게 낯설지 않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