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흔히 ‘상속자’ 하면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아 이마에 땀 흘리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 혹은, 고급 외제차를 타고 유흥가를 전전하며 흥청망청 아버지 재산을 탕진하는 부잣집 도련님 따위를 연상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떠올리는 하나님의 아들 ‘상속자’ 개념도 대개 이런 왜곡된 이미지와 매치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성경의 말하는 ‘상속자’모습과는 괴리가 진다.

◈아들은 ‘상(上)일꾼’이다

‘상속자’가 됐다 함은 ‘특권’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의 유업(遺業)을 물려받아 관리할 ‘책임’을 맡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가 관리자로서의 책임은 팽개치고, 그것을 향유하려고만 한다면 정상적인 상속자의 모습이 아니다.

그가 받은 ‘유업’을 얼마나 잘 관리하느냐에 따라 그것을 ‘확장’ 혹은, ‘파산’시킬 수 있기에, ‘상속자’의 책임이 중차대하다. 이런 이유로 과거 봉건시대 유럽의 부호들은 상속자가 될 아들에게 어려서부터 몽학선생(tutor)을 붙여 후계자 수업을 시켰다.

성도를 ‘하나님의 상속자’라 함도 성부의 유업을 물려받은 ‘특권자’인 동시에, 그것을 유지 확장해야 할 ‘책임자’ 지위를 부여받은 자라는 뜻이다(성도가 받은 유업은 ‘의와 영생’, ‘복음’, ‘하나님 나라’이다).

그런데 오늘 ‘상속자’인 성도들이 지나치게 ‘특권자’ 의식에만 경도돼 있고, ‘책임자’ 의식은 결여돼 있는 듯하다. 사실 어느 시대든 ‘상속자’는 ‘특권 향유자’라기보다 오히려 ‘보통 일꾼(a ordinary worker)’을 상회하는 ‘상일꾼(a reliable worker)’이었다.

유업(遺業)을 유지, 확장해야 하는 ‘책임감’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자기에게 할당된 임무만 완수하면 되는 ‘일꾼’과는 달리 ‘상속자’는 무한 책임을 떠안고 있기 때문이며, ‘노력한 만큼 재산도 붓는다’는 ‘노동비례법칙(law of works proportion)’을 알기 때문이다.

‘출퇴근 시간을 보면 그가 직원인지 주인인지 알 수 있다’는 시쳇말도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땡’ 하는 시간에 맞춰 칼같이 들고 나면 그는 그냥 ‘직원’이고, 남보다 한발 먼저 한발 나중에 들고 나면 그는 주인이라는 뜻이다.

‘상속자’는 누구의 지시 따라 일하거나, 누가 본다고 열심히 하고 안 본다고 게으름을 부리거나 하지 않는다. 이는 그 일이 자기의 ‘업(業)’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아버지에겐 ‘상속자’ 아들보다 든든한 일꾼이 없다.

성부께 성자 그리스도가 그랬다. 그는 하나님 아들이시면서, 성부의 뜻을 받들어 죽기까지 충성했다. 인류 역사상 그런 아들은 없었다. 성경은 ‘성자’ 그리스도의 충성이 ‘종(從)’의 그것 같다 하여, 그를 ‘인자(고난당하는 ’종말론적 메시아‘ 혹은 성부의 뜻을 이루고자 목숨 바쳐 충성한 ‘종’이라는 뜻이다)’라고 표현했다.

성자 그리스도는 성부의 ‘진노의 고통(pain by wrath)’을 풀어드리려 스스로 종으로 비하(Humiliation, 卑下)하여 화목제물이 되셨다(빌 2:6-8). 저 유명한 “고난당하는 종의 모습(사 53장)”은 ‘성부에 대한 성자의 충성’을 그린 것이다.

성경은 ‘성자 그리스도’와 ‘모세’를 비교하여, 모세가 하나님 집에서 ‘사환(a servant)’으로 충성했다면, 성자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a son over God's house)’로 충성했다(히 3:5-6) 고 했다.

성경이 성도에게 ‘하나님의 아들(요 1:12)’, ‘종(계 19:5)’이라는 상호 모순되는 듯한 복칭(複稱)을 부여한 것은 그가 ‘상호 이질적인 두 신분’을 공유했다는 뜻이 아니라, 성자 그리스도가 그랬듯 ‘아들’이면서도 ‘종’처럼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라는 뜻이다.

결코 ‘종(從)’ 개념이 ‘아들’ 개념을 희석시키지 않는다. 죄인 탕자를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 삼아주시니 백골난망하여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눅 15:19)”라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이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귀에 구멍을 뚫은 자원하는 종(출 21:6)’, 사도 바울이 말한 ‘자유자이나 스스로 종된 자(고전 7:22)’개념과 일맥상통한다.

◈아들 같은 종, 아들 같지 않은 아들

반면 ‘상속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종(從)’인 자들도 있다.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큰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 집에서 게으름이나 조금의 말썽도 부리지 않았고, 가산을 축내는 일도 없이 꿍꿍 열심히 일만 했다(눅 15:25, 29). 그러나 그는 은혜의 경륜에서 배제된 자이다.

일견 그의 충성스런 모습이 1등 효자로 비쳐지게 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들’보다는 오히려 일당치기 ‘노비’의 이미지에 더 가깝다.

그런 정황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아버지가 거지꼴로 귀환한 동생을 환대한 것을 시기하거나, 자기에게는 ‘염소새끼’ 하나 잡아주지 않았다고 불평하는 태도는(눅 15:28, 30) 넉넉한 ‘상속자’나 ‘형’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이런 그의 모습에서 배타적인 ‘선민의식’과 ‘율법적 열심’이 특심했던 유대인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들의 종교적 열심은 얼핏 그들로 하여금 신실한 하나님 백성처럼 보이게 하나 그들은 단지 ‘율법의 종’이었을 뿐이다.

그들의 ‘율법적 열심’은 대가를 받아내려는 애처러운 ‘종’의 몸짓이었지, ‘주인의식’과 ‘여유로움’이 담긴 ‘상속자’ 아들의 그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율법적 열심이 결코 그들을 ‘상속자’로 만들지 못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종의 여자 하갈(Hagar)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Ishmael)을 집에서 쫓아내게 한 것은(갈 4:30), 혈연으로 엮여 그렇게 함께 오래 동거했음에도 그들에게 책정된 유업(遺業)은 없었다는 뜻이다. 유업은 오직 ‘상속자’ 아들의 몫(히 11:9)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속자 ‘아들’의 충성은 ‘종’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점도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무언가를 받아내기 위함이 아닌, ‘아버지 것이 내 것’이라는 ‘아버지와의 동일시’에서 나온 것이며, 그러한 ‘동일시’에서 나온 충성엔 반드시 애착이 수반된다.

‘애착 없는 열심’은 ‘종의 열심’일 뿐이다. 비유컨대, 애굽의 학정(虐政)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이 ‘짚 없는 벽돌’을 찧어 바로에게 충성을 바친 것과 같다(출 5:7-12).

마지막으로, ‘아들’이지만 ‘아들 같지 않은 이들’도 있다. 그들은 아버지의 유업을 보존, 확장하는 데는 관심이 없고 그것을 향유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아버지에게서 자기 ‘분깃(portion, 分衿)’을 타내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며 재산을 허비한 ‘탕자’ 같은 이들이(눅 15:13) 그들이다.

이런 아들은 아버지에게 수치만을 안겨주고 오히려 종들의 다스림을 받는다(잠 17:2). 한 마디로 아들이긴 하나, 아들답지 못한 아들이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진짜 효자 노릇하는 아들은 그렇게 아버지의 속을 썩인 그들 탕자이다(눅 15:12-32).

철부지 시절 자신들의 만행(?)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한 없이 겸손케 해, 그에게 효도하게 만든다(눅 15:16-20).

마태복음 21장에 나오는 작은 아들의 예도 그러하다. 그 역시 탕자처럼 처음엔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했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돌아와 제대로 된 아들 노릇을 했다(마 21:28-31).

순종하겠다고 말만 하곤 거역한 큰 아들과는 대조적이다. 큰 아들은 유대인을, 작은 아들은 이방인을 예표 한다. 우리 모두는 어쩌면 아직도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철부지 작은 아들일 수 있으며, 그것이 때론 우리를 좌절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탕자가 그랬듯, 우리 속에는 언제까지 철부지 작은 아들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오기(傲氣)가 있고, 하나님께 제대로 한 번 효자 노릇 해보겠다는 결기(決起)도 있다.

그 결기가 만개할 날을 다시 한 번 기대하며, 또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그렇게 해 주실 것을 믿는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