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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답만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문제를 봐야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답만 알아서는 적용하기가 힘듭니다.

특별히 세상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답만 외워서는 적용이 안 됩니다. 세상의 문제들이 다양하고 지극히 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추상적이고 공허하게 답 하나만 외운다고, 현실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답 따로 문제 따로 놀 뿐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의 디베랴는 제자들이 돌아간 황제의 호수입니다. 갈릴리였어야 할 곳이 디베랴가 된 곳, 예수님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 곳,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도 반복되는 문제들, 늘 돌아서는 모습들. 그래서 그곳은 세상속의 그리스도인들이 만나는 문제들이 녹아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오늘은 첫 번째 문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문제는 일과 쉼의 관계입니다.

1. 그리스도인들은 ‘일’이라는 문제를 만납니다.

일해야 먹고 삽니다. 예배당에 모여서 매일 예배드리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정말 주님 원하시던 것이라면, 세상속에 교회를 세울 리가 없습니다.

산속 깊은 곳에 사당이나 수도원이 교회라고 하셨겠지만, 그리스도인은 세상속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인지 교회는 세상 한복판에 세워져 있습니다.

2. 하나님은 일에 관심이 있는 만큼 쉼에 관심이 있습니다.

서로 매우 다르지만, 둘은 이어져 있습니다. 쉼을 이해해야 바른 일을 할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진리입니다. 모든 다름은 서로를 이어주고 부족함을 채워주게 됩니다. 나와 너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서로의 다름을 이해해야 합니다.

3. 하루라는 설계에 이미 시간에 대한 하나님 마음이 있습니다.

하루를 살펴보면 만물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처음 만든 첫 날, 설계의 구조를 발견하게 됩니다.

창세기 2장 1절에 하루의 구성을 설명하면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고 하셨습니다. 밤과 아침이 이어집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똑같이 설명하십니다.

하루는 아침에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루의 아침과 밤의 관계를 점검해 보세요. 아침이 됐는데 새 날과 같지 않다? 그건 밤이 엉망이 된겁니다.

가끔도 아니고 늘 그 사람은 밤에 일한다? 둘 중 하나입니다. 낮에 놀았거나, 욕심이 많거나, 밤에 잠이 안 온다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낮에 그만큼 움직이지 않았던 겁니다.

4. 나아가 창세기 2장 2절은 쉼의 시작과 일의 끝남이 언제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곰곰히 들여다봅시다. 하나님께서 하시던 일을 여섯째 날에 마친 것이 아닙니다. 일을 그치고 안식한 날, 일곱째 날의 순간 일이 끝난 겁니다.

즉 쉼의 날, 안식일도 하나님은 일이라고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은 한시도 쉬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상식적으로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이 됐다 해서, 놀고 먹고 자고 하실 리가 만무하잖아요.

5.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쉼에도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그 의미는 안식일을 명령하신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만드시면서 8절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하십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명령입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거룩하게’입니다. 거룩은 구별입니다. 다른 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6일동안 열심히 일하고 비우는 것은 불교도 합니다. 무교인 사람들도 멈추는 것을 합니다. 그저 비우는 것은 우리보다 더 잘합니다.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도 유명하잖아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의 논리는 거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6. 안식일의 설계를 통해, 하루도 볼 수 있고 인생도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에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신 하나님은, 10절에서 손님도 종도 가축까지도 쉬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나아가 신명기 5장에는 안식일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안식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구원하셨음을 기억하고 방법은 간단합니다. ‘손님도 종도 쉬게 해야 해. 그게 안식일이야.’

여러분, 원래 애굽의 노예였던 백성들이 하나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하나님이 복을 내려 주셨다고, 구원해 주셨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갑질하고 아는 척, 잘난 척 하고 살았다면, 멈추는 것. 그것이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자기중심적인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을 멈추는 시간입니다. 그 날은 나 때문에 누군가가 힘들게 일하고 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하면서, 멈추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교회에 모이는 것입니다.

7. 7년째가 되면 안식년이라고 칭하셨습니다.

일곱째 해가 되면, 땅을 안식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포도원을 가꾸지 말고, 소출을 나누어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안식년은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이제 땅마저 쉬게 하는 겁니다. 시간의 멈춤으로 공간을 회복하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런데 ‘거룩한 안식일’의 구현이 없어서인지, ‘거룩한 안식년’의 구별도 없어진듯 합니다. 안식년이 그냥 쉬는 것으로 인식된 겁니다.

안식년만 되면 많은 목회자분들이 휴양지로 떠납니다. 하필 안식년에 쉬는건 좋은데, 굳이 비싼 돈을 들여서 유럽 여행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요. 여행을 가는 건 좋은데, 꼭 안식년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까요.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데 말입니다. 쉼을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진정한 안식년을 구현하려면, 나의 쉼으로 누군가가 고통받지 않아야 합니다. 나의 쉼으로 오히려 평등해져야 합니다.

8. 그래서인지 희년의 구현은 아예 교회에서 사라졌습니다.

안식년이 7번 반복되는 49년이 지난 다음 해, 오십년째를 ‘희년’으로 칭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해도 ‘거룩하게’ 구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해는 말 그대로 기쁨의 시간을 가진 해여야겠지요.

왜 기쁠까요? 쉬어서요? 놀아서요? 어디 먼 곳으로 떠나서요? 아닙니다. ‘그 땅의 모든 주민을 자유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인간은 구조적으로 불평등해지게 됩니다. 누군가는 소유가 많아지고 누군가는 적어집니다. 50년째가 되면 모두가 평등해지라는 겁니다. 그게 참 자유랍니다. 종들을 자유케 하랍니다.

왜 우리는 안식일도 강조하고, 안식년도 챙기면서, 희년은 버릴까요. 혹시 희년을 시스템화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교회들이 있어서는 아닐까요.

9. 50년쯤 되어서 교회들이 모두 평등해진다면?

크고 작은 교회 없이 모두가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형태를 갖추기 위해서 교회와 노회와 총회가 존재한다면 참 좋겠다 싶습니다.

왜 한국교회에서는 이런 논의를 할 수 없을까 호기심이 들지만, 그러나 결국 이런 희년이든, 안식년이든 하루를 잘 보내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은 제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10.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참된 쉼을 쉬고 계십니까? 요한복음 21장에서 텅 빈 그물을 쥔 채 밤새도록 눈이 벌개졌을 베드로와 일행들을 생각해 보세요.

왜 쉬지 않고 그토록 일을 하고 있으신가요? 그렇게 일해도 텅 빈 그물은 아니시던가요? 여전히 쉬고 싶어도 못 쉬는…, 벌써 아침이 다가온….

그런데 그때 주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얘들아, 고기는 잡았니?”

그때 여러분은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이미 시간은 다 가고, 다 망치고 텅 비어있는데…. 사실 그때가 주님을 만날때 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순간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텅 비어야 정신 차리는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쉬지 못하고 일하는 청년들, 그러다 어느덧 일을 한다고 주님을 놓쳐버린 텅 빈 그물의 소유자들….

여러분이 회복해야 하는 것은 쉼일까요, 일일까요? 이제 잠시 고민해 보십시다.

여전히 여러분은 왜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요? 여러분의 일함으로 여전히 평등과 자유가 사라진 세상은 확장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여전히 여러분이 있는 곳은 왜 화려한 디베랴인가요? 거기서 뭘 얻고 싶은 건가요? 왜 멈추지 못할까요? 여러분에게 쉼은 무엇인가요? 그냥 일하다 놀고 영화 보고 쉬고 잠자는 것인가요?

여러분에게 예배는 무엇입니까? 모여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 듣고 식사하는 것이 예배인가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위해 일하시고 멈추시고, 구원하시고 화평케해 주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처럼, 이제 우리도 내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일하던 것을 멈출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다.

아무리 일해도 텅 빈 그물을 움켜쥐고도 놓지 못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물어보십니다.

“얘들아 고기는 잡았니?”

그 질문 앞에 내 경험과 내 지식을 내려놓고, 이제 누군가를 위해 나를 멈출 줄 아는 그리스도인으로, 갈라진 사이를 위해 기꺼이 나를 희생하고, 더 얕은 물가로 낮아질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