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승
▲권혁승 교수 ⓒ권혁승 교수 블로그
여호수아서의 마지막 세 장(22-24장)은 여호수아에 의한 세 종류 고별사를 다루고 있다. 곧 22장은 요단 동편 지파들을 보내면서 전한 고별사이고, 23장은 이스라엘 전체 백성을 향한 여호수아의 고별연설사이다. 24장은 전체 백성들로 하여금 언약갱신의식에 참여케 하면서 마지막으로 전한 고별사이다. 여호수아가 행한 세 차례의 고별사 모두에는 전체 백성들을 향한 축복의 기원, 여호와를 따르라는 권면, 그리고 불순종으로 인해 생기게 될 무서운 결과들을 경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가나안 정복과 정복한 땅들을 각 지파에게 분배하는 일을 마친 다음, 여호수아는 그동안 가나안 정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요단 동편 지역 지파들을 그들의 본토로 되돌려 보냈다. 가나안 점령을 앞두고 여호수아는 요단동편을 차지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그들의 땅을 떠나 가나안 점령에 참여할 것을 당부한 적이 있었다(수 1:12-15). 그들은 기꺼이 여호수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수 1:16-18). 가나안 정복을 마친 후 그들은 더 이상 요단 서편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들을 떠나보내면서 여호수아가 당부한 것은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충성이다(수 22:5). 그것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면서 여호수아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권면의 말씀이기도 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의 가장 크고 우선적인 첫 계명 곧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이다(신 6:5; 마 22:37-38).

요단 동편 지파들이 자신들의 거처로 떠나가면서 이스라엘 공동체에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문제의 발단은 이들이 요단강 언덕에 큰 제단을 쌓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스라엘 온 회중은 실로에 모여 이들과 싸울 것을 결의하였다. 요단 언덕에 제단을 쌓은 것이 무슨 문제이기에 그런 위기가 닥친 것일까? 왜 가나안 땅에 남아 있던 다른 지파들이 그렇게 민감한 반응을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문제의 핵심은 요단강 언덕에 쌓은 '보기에 큰 제단'이었다. 후에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를 중심으로 각 지파 대표들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들이 쌓은 제단은 제사를 위한 제단이 아니라 요단강을 사이에 둔 지파들 사이에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갈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기념비 성격의 단이었다(수 22:25-29). 오해에서 비롯된 일종의 해프닝이었던 셈이다.

그런 오해가 생긴 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제단을 쌓았던 장소와 제단의 규모 때문이었다. 성경 본문에서는 제단이 세워진 곳을 '요단 언덕 가'라고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곳은 한때 이스라엘의 중심지였던 길갈일 가능성이 크다.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와 처음으로 진을 쳤던 곳으로 요단강에서 가져온 돌로 기념제단을 쌓고 할례를 행했던 곳이었다. 또한 실로에 성막을 세우기 이전까지는 온 이스라엘 회중들이 머물렀던 중심지였다(수 4:19-20; 5:9-10). 그런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에 요단 동편 지파들은 거대한 제단을 쌓은 것이다.

여호수아서 본문은 그들이 쌓은 제단을 '보기에 큰 제단'이라고 표현하였다.(수 22:10) 그들이 큰 규모의 제단을 쌓은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제단이 세워진 곳은 요단강 서쪽 편이다. 그리고 제단을 세운 목적은 요단 동편을 차지한 지파들도 요단강 서편을 차지한 지파들과 똑같이 여호와께 받은 분깃이 있음을 확실하게 보장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목적 때문에 요단 동편의 먼 지역에서도 잘 보이도록 제단의 규모를 크게 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요단 서편 지파들의 즉각적으로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민감하게 반응을 보인 것은 성막 이외에서는 어떠한 제물이나 제사를 드릴 수 없다는 하나님의 명령(레 17:8-9)과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보다 일반적인 계명(신 13:12-15)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를 어길 경우는 모두 사형에 해당되었다. 좋은 의도로 시작된 일이었지만 오해가 되어 지파간의 내전으로 확대될 뻔했던 위기가 되었다.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일이라 하여도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조심해야 하며, 여호와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려는 것도 지나치게 일방적이지 않도록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권혁승 교수(서울신대 구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