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 이창우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키에르케고어의 '선물' 개념을, 키에르케고어 전문가 이창우 목사님이 야고보서의 저자 야고보 사도의 목소리로 들려 드립니다. 이번 주는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맞아, '성찬'에 대한 내용입니다. -편집자 주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 22:15)."

여러분, 이보다 더 큰 사랑을 본 적이 있습니까! 사랑은 이 만찬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사랑이 "나를 기념하라(눅 22:19)"며 제정한 성찬입니다.

사랑은 배신자와 함께 간절히 식사하기를 원했습니다. 가룟 유다, 그는 배신자입니다. 그는 돈을 받고 사랑을 팔아 넘겼지요. 먼저 배신자를 식탁에 초대한 분은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배신자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초대했을까요?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사랑은 이미 배신자가 돈을 받고 자신을 팔고 그 자리에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배신을 당했다면, 배신자를 만찬에 초대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사실 사랑은 배신자들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겁니다. 이 배신은 사업하다 망한 정도의 배신이 아닙니다. 배신자로 인해 죽게 된 사건이지요.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괴물같은 지식이죠.

사랑은 배신자들 때문에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배신자와 식사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여러분이 배신자 때문에 죽게 되었다면, 배신자를 만찬에 초대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가룟 유다만 배신자인가요? 사랑이 체포될 때, 그의 친구들은 다 어디에 있었나요? 다 도망가지 않았나요? 그렇다면, 그들 역시 배신자 아닌가요?

사랑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 호산나" 외치며 왕으로 오신 사랑을 축하했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나중에는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돌을 던졌지요.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배신자들 아닌가요?

절대로 사랑을 부인하지 않겠다 호언장담했던 베드로, 그는 세 번이나 부인하고 심지어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는 배신자가 아닌가요? 만약 가룟 유다가 첫 번째 배신자라면, 마지막 배신자는 베드로이고, 그 사이에 있었던 동시대 사람들은 전부 배신자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배신자들을 초대하여 유월절 만찬을 함께 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누가 먼저 이 식사를 간절히 원한 걸까요?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배신자들과 함께 있었다면, 만찬을 간절히 원할 수 있었을까요?

만약 여러분들이 그 당시에 군중들과 함께 현장에 있었다면, "그분은 사랑이다. 돌을 던지지 말라!"라고 말할 자신 있습니까? 조금이라도 그럴 자신이 없다면, 온 인류는 사랑의 배신자입니다. 저 역시 그 당시에 사랑이 고난당할 때, 현장에 함께 하지 못했다는 것을 부끄럽게 고백합니다.

그 당시 사랑의 친구들 중에서, 누구도 성찬의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왜 이 성찬을 기념하라고 하는 것인지 묻지도 않았습니다. 사랑의 친구들, 아니 말을 잘 못했습니다. 사랑의 배신자들이지요. 원래는 배신자인데, 사랑이 그들을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나중에 그분이 부활하시고 난 후, 늦게서야 성찬의 의미를 알았지요.

사랑은 친구들이 배신했다고 화를 내지도 않았습니다. 사랑은 친구들이 성찬의 의미를 모른다 해서 꾸짖지도 않았습니다. 사랑은 자신이 이해받지 못했다 해서 설명하는 데 급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랑은 이 세상에서 배신자가 쉴 수 있는 유일한 나그네의 주막집이었으니까요.

그 당시에 배신자들을 초대했던 사랑의 성찬, 그 사랑이 얼마나 허비되었습니까? 누구도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 했으니까요. 사랑이 그 성찬을 그렇게도 간절히 원했건만, 누구도 그 성찬을 간절히 원하지 않았으니까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제 시대가 많이 흘러갔습니다. 제가 하늘에서 보니, 지금도 사랑이 제정한 성찬을 거행하고 있군요. 게다가 이번 주는 고난주간이군요. 사랑은 그토록 원해서 성찬을 베푸셨건만, 여러분은 얼마나 성찬에 대한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까?

여러분이 성찬에 대한 간절한 소원이 없다면, 배신자를 간절히 초대하기 원했던 사랑은 오늘날도 얼마나 낭비되고 있는 건가요? 간절함이 없이 어떻게 성찬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찬에 참여하려는 여러분의 소원이 있다면, 이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바람은 불고 싶은 방향으로 붑니다. 여러분은 그 소리를 듣고 있지만, 어디에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간절한 소원, 하나님을 향한 소원, 사랑을 향한 소원도 이와 똑같습니다. 이 소원은 잡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잡아서도 안 됩니다. 여러분은 단지 소원을 활용해야 합니다.

상인이 상거래의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이용하여 수익을 내지 못했을 때 책임을 져야 한다면, 선원이 순풍이 불 때 그 기회를 이용하여 배를 움직이지 못해 책임을 져야 한다면, 이 소원이 일어날 때 그 소원을 베풀어준 기회를 이용하지 못한 자의 책임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물을 낭비하면 안 된다고 경건하게 말합니다. 하지만 깊은 의미에서 사랑을 향한 소원, 그로 인해 생긴 무한한 빚(채무 의식)만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재물, 건강, 명예, 존경 같은 것들보다 깊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단지 이 선물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선물과 함께 자기 자신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제대로 성찬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성찬에서 사랑의 소원은 얼마나 낭비되고 있나요? 사랑은 얼마나 많이 최고의 선물을 당신께 주고 계신데, 어쩌면 그렇게도 미련하게 그 선물을 모조리 낭비하고 있는지! 사랑이 줄 수 있는 선물이 있다면 사랑 말고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당신이 성찬 가운데 배신자도 품을 수 있는 이 사랑을 선물로 받는다면, 그래서 당신이 사랑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이제는 당신이 사는 것이 아니고 당신 안에 사랑이 산다면(갈 2:20), 그래서 당신 역시 사랑함으로써 사랑의 무한한 빚을 진다면, 세상을 이길 믿음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요 5:3).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