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40대 중반 전기설비공 A씨가 있다. 작년 3월이었다. 우연하게 초등학교 동창생인 B씨 집에서 1개월 동안 함께 살게 되었다. 어느 날 A씨는 팬티만 입고 자고 있었다. 그 광경을 B씨가 사진을 찍어서 여자 동창생 5-6명이 가입한 SNS에 올렸다.

A씨가 팬티만 입고 자는 사진을 본 여자 동창생들은 A씨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행동 똑바로 하고 다녀라." 게다가 "B씨가 술에 취할 때마다 A씨에 대해 험담한다"는 소식까지 첨언했다. 그런데 여자 동창들은 반라 사진을 봤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A씨 입장에서는 영문도 모르고 당하는 일이다. 화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A씨는 1월 1일에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게 되었다. 1일 저녁 새해를 맞아 남자 동창 4명이 초등학교 모교 부근에서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 그때 친구들이 "여자 동창생들이 네 나체 사진을 봤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친구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너무 치욕스러웠다. 그래도 감정을 추스르고 화를 참았다. 혼자 살고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친구들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에서 떠나질 않았다. 너무 분해서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 날 택시를 타고 친구 집으로 달려갔다. 10여 분 후에 친구 집에 도착하자마자 "네가 사진을 올렸느냐?"며 폭행했다. 이들은 실랑이를 하면서 30여 분 동안 싸웠다. 그런데 B씨가 끝까지 발뺌을 하는 게다. "친구들에게 험담을 하고 여자 동창생 SNS에 사진을 올린 사실이 있지 않느냐"고 다그쳤다. 그러나 B씨는 전혀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A씨는 흉기로 친구의 복부를 찌르고 말았다.

B씨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친구가 죽은 것을 보고 A씨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난 뒤 그 자리를 떠났다. A씨는 경기도 지역에서 도피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5일 오후 지구대의 아는 경찰을 찾아가서 자수를 했다. 

A씨는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자신이 살인 외에 방화 혐의까지 받고 있다는 기사를 보게 됐다. 지인들에게 법적 자문을 구한 후 결국 자수를 결심하게 되었다. 자수하여 광명을 찾았는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치러야 할 대가는 여전히 남아 있다. 서로 불행하게 된 셈이다.

어떤 사람도 불행을 원하지 않는다. 자신의 불행은 물론이고 남의 불행도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말이나 행동을 자주 하곤 한다. 남을 불행하게 만들고 나면 자신도 불행하게 된다. 인생은 부메랑이니까.

2016년을 내디딘 지 열흘 정도 지났다. 이제부터라도 마음에 다짐을 해 본다. '불행을 불행하게 만들자!' 불행에게 먹이를 주어서는 안 된다. 불행은 아예 굶겨 죽여야 한다. 앞에서 본 사건을 통해 불행을 굶겨 죽이기 위해 몇 가지 통찰을 얻으려 한다.

B씨는 '무심코' 친구의 반라 사진을 올렸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무심코~' 이게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흉일 수 있다. 무심코 한 말, 무심코 한 행동. 특별한 악의는 품지 않았을 수 있다. 한번 웃자고 그렇게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 맞아 죽는다.' 남을 배려하지 않고 무심코 한 일이 어떤 사람에게는 치명타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SNS, 좋게 사용되면 참 좋은 도구이다. 서로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다. 서로의 삶을 나누면서 더 깊은 친분과 교제를 형성할 수도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잊고 지내던 지인들과 연락이 닿기도 한다. 그래서 행복을 만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나쁘게 사용되면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흉이다. 요즘 인터넷 댓글이나 유튜브로 인한 폐해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SNS를 통해 일어나는 범죄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올리지 말아야 할 자료를 올려서,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거나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그로 인해 일어날 결과를 한 번쯤 예측해 보면 어떨까? 내 기분과 감정이 중요하다면, 남의 감정과 입장도 배려해야 할 게 아닌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드러내려 하는 게 불행을 부추긴다. 노아가 실수를 했을 때 둘째 아들 함은 이를 드러냈다. 결국 그는 저주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달랐다. 그들은 아버지의 실수를 감추어 주고 덮어 주려 애썼다. 불행을 죽이기 위해서는 좋지 않은 소리를 듣고도 더 알려고 하거나 보려고 하지도 말아야 한다. 사실 인간은 남의 실수나 잘못을 들으면 이상야릇한 흥미가 발동한다. 그래서 더 알고 싶어하고, 드러내고 싶어하고, 구설수로 삼고 싶어한다. 불행을 불행하게 만들려면 그런 욕구를 아예 죽여야 한다.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다. 그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반응이 중요하다. 한 사람의 실수를 교정하고 돌이키기 위해 적절한 조언을 해 주면 불행을 막을 수 있다. 만약 B씨가 그런 실수를 했을지라도, 그렇게 하지 말라고 바른 길로 안내해 주는 친구들만 있었어도 좋았을 텐데, 그걸 즐기고 있었으니 불행에 불을 붙인 격이다. 불행을 죽이려면,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을 볼 때 중간에서 더 나쁜 상황으로 치닫도록 부추겨서는 안 된다.

실수를 하고 죄를 지었을지라도,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면 용서가 된다. A씨가 찾아와서 따질 때 B씨가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텐데. 좀 두들겨 맞더라도, 어쩌면 고소를 당할지 몰라도, 다른 사람의 감정에 불을 질렀던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했더라면 격했던 감정도 풀리지 않았을까?

극단적 감정처 리가 불행을 불러일으킨다. 아무리 속상해도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다. 아무리 감정이 격해져도 할 수 있는 행동이 있고, 해서는 안 될 행동이 있다. 절대로 극단적 행동은 금물이다. 상대방이 악으로 대할지라도 악으로 갚지 말고, 예수님처럼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 칼과 몽치를 들고 온 사람들에게 베드로처럼 칼을 빼들 건지, 사랑으로 포박되든지 복음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생각과 감정을 통제할 수 있기에 다른 동물과는 차별화된다. 화가 난다고 다 말해서는 안 된다. 속상한다고 아무렇게나 행동해서는 안 된다. 쉽지는 않아도, 성령의 열매인 절제의 미덕을 발휘해야 한다. 참을 인 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 욱하는 순간을 잠시 통제하면 불행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