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승 교수.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막 15:34)

시간대별로 구성된 가상칠언의 구조적 특징은 첫 세 말씀과 마지막 세 말씀이 균형을 이룬다는 점이다. 앞부분은 다른 사람을 위한 말씀이라면, 뒷부분은 예수님 자신과 관련된 말씀이다.

첫 번째 말씀인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는 전 인류를 위한 것이라면, 두 번째의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개인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리고 세 번째의 “보라 네 어머니라”는 가족인 어머니와 제자에게 주신 말씀이다.

마지막 세 말씀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자신과 관련된다. 다섯 번째인 “내가 목마르다”는 육체과 관련된 것이고, 여섯 번째인 “다 이루었다”는 삶의 목적과 관련된 문제이며, 마지막 일곱 번째의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는 영혼과 관련된 것이다.

이들 두 종류의 말씀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네 번째 가상칠언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대칭구조라는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 말씀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사용하였던 아람어이다.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같은 어군에 속한다. 그 내용을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이다.

네 번째 가상칠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중심단어, 곧 ‘버렸다’와 ‘어찌하여’의 정확한 의미 파악이 필요하다.

첫째로 ‘버렸다’로 번역되는 아람어 ‘사박크’는 히브리어로 ‘아자브’이다. ‘아자브’는 ‘내어버리다’는 뜻인데, 단순한 내어버림이 아니라 완전히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유기하다’로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예수께 완전히 등을 돌리셨고, 예수께서는 영적 소외감과 고독감으로 탄식하며 부르짖은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라는 용어 대신 ‘하나님’을 사용한 것과도 연관이 있다. ‘아버지’는 개인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용어라면 ‘하나님’은 공적이고 법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용어이다. 지금 예수께서 부르짖고 있는 탄식의 상대인 하나님은, 더 이상 개인적인 친분관계에 계신 분이 아니다. 오히려 법정과 같은 공적인 자리에 계신 분이시다. 이것은 예수와 하나님 사이가 개인적 감정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이고 법적인 엄정한 관계가 우선하는 분위기임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아들이신 예수께 그렇게 냉정하게 등을 돌리신 이유는, 우리를 향하여 사랑과 은혜의 얼굴을 드시기 위함이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5-26) 예수에게서 얼굴을 돌리신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그 얼굴을 드시고 얼굴빛을 비추어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시 67:1)

둘째로, ‘어찌하여’에 대한 해석이다. 여기에서 ‘어찌하여’는 예수께서 사실을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하는 것은 구약 전체에 걸쳐서 예언되고 강조되었던 것이라 매우 잘 알고 있는 자명한 일이다. 예수께서는 누군가가 남을 위하여 죽어야 한다는 대속의 원리도 잘 알고 계셨다. 매년 대속죄일마다 한 마리 양을 아사셀 양으로 삼아 사막 먼 곳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것도 잘 알고 계셨다. 지금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영원히 용서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그 일을 직접 수행하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어찌하여’라고 물으신 것일까? 히브리어에는 두 종류의 의문문이 있다. 하나는 몰라서 묻는 것이다. 이때 사용되는 의문사는 ‘왜’라고 번역되는 ‘마두아’이다. ‘안다’라는 뜻의 ‘야다아’에서 파생된 ‘마두아’는, 사실을 알고 싶어서 물을 때 사용한다. 또 다른 의문문은 내용은 잘 알면서도 더 깊은 차원의 이유를 알고 싶을 때 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사용되는 의문사는 ‘라마’이다. ‘라마’는 ‘라’와 ‘마’의 결합인데, 히브리어 ‘라’는 ‘for’로 번역되는 전치사이고 ‘마’는 ‘what’으로 번역되는 의문사이다. 그러므로 ‘라마’는 ‘for what?’이란 뜻이다. 목적과 의도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찌하여’는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집행하시는 현재의 그 일에 대한 동의와 인정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자신에게는 일시적인 고통이 따르지만, 그 일로 인하여 온 인류에게 주어지는 죄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내다보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는 부르짖음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예수께서도 그 일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평생 동안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그리고 지금 그 일이 구체적으로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외친 ‘어찌하여’ 속에는 인간 구원과 그 결과로 주어질 복에 대한 선언과 찬양이 함께 담겨 있다.

권혁승 교수는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B. A.)를 나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Hebrew University, Ph. D.)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고 엔게디선교회 지도목사, 수정성결교회 협동목사, 한국복음주의구약신학회 회장,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권 교수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고전 4:16)을 목적으로 ‘날마다 말씀따라 새롭게’라는 제목의 글을 그의 블로그를 통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