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이 글은 김명혁 목사님께서 4월 17일 ‘조국평화통일기원 오산리기도원성회’에서 전할 메시지를 정리한 것입니다. -편집자 주

“통일과 십자가의 영성”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기 전에 북한에서 목회하시다가 순교하신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와 저를 사랑하시던 저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와 그리고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북한에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진실하게 목회 하시다가 1950년 6월 23일경 45세에 순교하신 분이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이십니다. 아버지는 평남 안주 출신인데 일본으로 가서 법학공부를 하시다가 신학공부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의학전문을 나온 여의사와 결혼을 해서 저를 낳았습니다. 아버지는 동경신학교를 마친 후 한경직 목사님의 초청으로 1938년부터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목회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함께 가지지 못했습니다. 목회 일에 바쁘셨을 뿐 아니라 신의주에 계실 때나 평양에 계실 때 주로 감옥에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제나 공산체제와 타협하지 않으며 신앙의 절개를 지켰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신의주에 있을 때 이따금씩 저를 칭찬해 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아물거립니다. 신의주 감옥에 갇혀 계시던 아버지를 뵙기 위해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감옥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아버지를 직접 만나 뵙지 못했고 담밖에 서서 목소리를 돋우어 “뜸북 뜸북 뜸북 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새 숲에서 울제”를 부르거나 소리쳐 “아버지!”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1938년부터 1946년 5월까지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8, 9년 동안 목회 하시다가 1947년 평양 서문밖교회로 옮겨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947년 11월 18일 평양에서 투옥되었다가 사동 탄광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복역하시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와 함께 사동 탄광을 찾아가곤 했는데 죄수 복을 입으신 아버지를 몇 번 만나 뵌 기억이 납니다. 저는 아버지로부터 신앙적인 감화를 은은하게 받았습니다.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는 고난도 감수해야 한다는 교훈을 실제로 받았습니다. 제가 평양 제5 인민학교를 다닐 때 일요일에 학교에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월요일마다 벌을 서고 때로는 정학을 당하면서도 주일성수를 끝까지 고수했던 이유도 바로 이와 같은 아버지의 신앙적 감화와 교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48년 7월 사동 탄광에서였습니다. 제가 주일성수와 신앙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씀 드렸을 때 아버지는 저를 한참 바라보시더니 그러면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음 달인 8월에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해서, 11살 나이에 38선을 넘어 월남했습니다. 같이 오던 어른들은 38선을 넘다가 모두 인민군에게 붙잡혔고 저만 혼자 남쪽을 향해 달려서 월남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 최봉석 목사님 김화식 목사님 등과 함께 평양에서 순교 하시여 천국으로 가신 아버지를 그리며 오래 전에 아버지에게 감사와 존경과 사랑의 글을 띄운 일이 있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아버지!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말이 아닌 고난의 삶과 순교의 죽음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고 예배하고 섬기는 삶이 무엇인지를 순수하고 진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아버지가 저의 이름을 명혁(明赫) 즉 밝고 빛나는 사람이 되라고 지어주셨는데 부족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밝고 빛나는 한 평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동경에서부터 유학생들 모임의 ‘총무’의 일을 하셔서 그랬는지 저도 학생 때부터 평생 ‘총무’의 일을 자주 하면서 심부름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말씀대로 아버지가 ‘강직’하시고 ‘진실’하셨는데, 저도 강직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동탄광에 계시면서 같은 탄광에서 노동하는 죄수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베푸셔서 저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하셨는데, 저도 부족하지만 고통을 당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펴면서 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는 것을 저의 삶의 소원과 기도로 삼고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먼저 가 계시고 어린 아들이 먼저 가 있는 천국을 늘 그리워하고 사모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만간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천국에서 반갑게 만나 뵙고 품에 힘껏 안기겠습니다.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1997.10).”

저의 어머니(유춘택 어머니)는 저를 너무너무 사랑하시던 너무너무 고마운 분이셨습니다. 저 없이는 못살겠다고 말씀하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하나님을 바로 섬기기 위해서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했을 때 어머니는 우시면서 그러면 가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머니는 맏아들을 잃는 가장 큰 슬픔과 아픔과 희생을 감수했습니다. 그 때가 1948년 8월이었습니다. 38선을 넘어 서울에 와서 방산국민학교를 다니면서 신앙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마음껏 공부하는 것이 너무너무 좋았지만 밤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울곤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서울 중 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필라델피아에 가서 공부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그리워서 저의 사진과 함께 편지 한 장을 홍콩을 통해서 북한에 계시는 어머니에게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저의 편지를 받아 보시고 너무너무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어머니와 이별한지 17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 편지를 받아 읽으면서 울고 또 울고 또 울었습니다. 어머니의 편지는 편지라기보다는 절규였습니다. 어머니의 피 맺힌 사랑과 보고 싶음의 절규가 깊고 진하게 배어 있었습니다. 그 편지 원본은 후에 중앙정보부에 빼앗겼지만 그 편지 사본을 지금도 성경책 속에 넣고 다닙니다. 그 편지를 읽어드립니다. "내 아들 명혁에게 9월 5일 네의 편지와 동시에 외로히 자라 성인이 된 내 아들 명혁이에 얼굴 더구나 훌륭하게 된 내 아들을 ...나는 보고 십고나. 손이라도 한번 꽉 쥐어 보고 십고나. 이 내 기쁨을 지면상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 명혁아! 나는 네말 그대로 오래 오래 살아서 내 사랑하는 아들 만날 날을 기다리겟다. 몽중엔들 이저스랴 내 명혁이. 부디 건강하기를 축원하면서 어머니 글 9월 29일" 너무나 짧은 절규였지만 그 속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었습니다. 말하고 싶어도 다 말할 수 없는 그 짧은 사연가운데 혈육이 느낄 수 있는 사랑의 아픔과 기쁨과 슬픔과 안타까움과 소원과 간구가 다 들어 있었습니다
. 저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이별한 슬픔과 아픔을 한 평생 지니고 살았고 나중에는 불치의 병을 안고 태어나서 슬픔과 아픔을 지니고 살다가 4년 만에 저의 품을 떠난 사랑하는 어린 아들과 이별하는 슬픔과 아픔을 지니고 살았지만 그 모든 슬픔과 아픔이 나중에는 보석이 된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 슬픔과 아픔은 저로 하여금 슬픔과 아픔의 극치인 십자가로 조금씩, 조금씩 다가가게 만들었고, 이 세상 곳곳에 살고 있는 슬픔과 아픔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조금씩, 조금씩 다가가게 만들었으며, 먼저 천국에 가신 아버지와 어머니와 어린 아들을 그리며 천국을 조금씩, 조금씩 사모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저는 아버지가 당한 일제와 공산당의 박해로 인해 그리고 제가 어릴 때부터 당한 신사 참배 강요와 일요일 학교 등교 강요 등으로 인해 반일주의자와 반공주의자가 되었었습니다. 12년 동안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서도 얼마 동안은 그런 반일 반북의 입장을 강하게 유지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저의 입장과 자세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니느웨와 땅끝을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모습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모습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그리고 아시아 아프리카 등 여러 나라들을 방문하고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순교자들의 피 속에는 분노와 증오의 기운은 조금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스데반, 폴리캅, 토마스, 최봉석, 김화식, 김관주,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 등의 순교의 피에는 분노와 증오의 기운은 조금도 없었고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향기만이 나타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저는 일본 사람들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일본교회와의 교류와 협력을 이루는 일에 제가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고지 혼다, 하토리, 이쯔다, 후나키, 가시다, 쯔타다 목사님 등 일본 교회의 지도자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1991년 6월 4일 저녁 1200여명의 일본교회 지도자들이 모인 제3회 일본 전도대회 모임에서 설교하면서 저의 심정을 진솔하게 고백한 일도 있었습니다. “제가 메시지를 전하기 전에 거의 개인적인 감정을 여러분들에게 솔직하게 표현하겠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 대해 뒤섞인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멀게 느껴지기도 하고 가깝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지난날의 미움에 대한 느낌과 오늘의 애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1990년 서울 AMC 대회에서 고백한 것처럼 저는 어렸을 때 일본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사람들을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이 1905년 이후 우리나라를 점령했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심한 박해를 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 마음이 많이 바뀌어졌습니다. 제가 지난 10여 년을 전후하여 알게 되고 사귀게 된 상당수의 일본 교회의 지도자들을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밤 깊은 감사의 마음과 여러분들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오늘 밤 또한 지난 저의 혐오와 미움을 고백하면서 섰습니다. 저를 용서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형제로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날 밤 많은 일본 사람들이 저의 사과를 눈물로 받아드렸습니다.

저는 1988년 여름 아프리카 부르키나 파소에 가서 가뭄으로 죽어가는 그곳 모슬렘 주민들을 위해 우물 10여 개 이상을 파주는데 심부름의 역할을 했고, 1989년에는 홍수와 여러가지 재난으로 고통 당하는 방글라데시를 방문해서 안과 진료소를 지어주는 등 도움의 손길을 폈고, 1995년경부터 북한동포 돕는 일에 앞장을 섰고, 1999년경부터 연변 지역의 조선족 고아 아이들 200여명을 돕는 일에도 심부름을 하고 있습니다. 2005년에는 ‘악의 축’이라고 불리던 아프가니스탄의 쿤두스 지역에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 하나를 지어주었는데 그곳 모슬렘 주민들로부터 뜨거운 감사를 받은 일도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 모두를 용서하고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와 화해하고 싶습니다. 제가 2007년 1월 3일 아침에 쓴 “사랑하고 싶어라” 라는 글을 그대로 읽습니다. “나는 요사이 주님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한 평생 나를 향하신 주님의 생각과 사랑이 어찌 그리 크고 어찌 그리 많은지! 실로 모래알보다 더 많은 주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나의 가슴에 눈물을 자아낸다. 사랑하고 싶어라.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는 요사이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어린이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너무너무 귀엽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너무너무 예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 세상 곳곳에 흩어져 사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날 때도 비슷한 느낌을 가진다. 저들의 얼굴과 마음과 영혼 속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고귀한 인성과 신성의 흔적을 보기 때문이다. 저들을 모두 사랑하고 싶어라. 모슬렘도 공산주의자도 상관이 없다. 저들은 모슬렘이나 공산주의 라는 불행한 유산에 쌓여있는 가련한 영혼들일 따름이다. 사랑하고 싶어라.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2007년 1월 3일 아침 교회로 운전하며 오는 차 속에서 쓴 글)

그러면 이제부터 “통일과 십자가의 영성”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부족하고 부족한 사람이 오늘 조국평화통일기원 오산리기도원성회에 와서 말씀을 전하게 되어서 모든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며 부족한 저를 불러주신 여러분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우선 인간의 죄는 분노와 증오와 분쟁과 저주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은혜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와 통일로 나타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창4:5-8은 가인의 죄가 분노와 증오와 분쟁과 저주로 나타난 것을 기록했고 창27:41은 에서의 죄가 분노와 증오와 분쟁과 저주로 나타난 것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창33:1-10은 하나님의 은혜가 야곱과 에서간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로 나타난 것을 기록했고 겔37:15-17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에스겔의 사역으로 유다와 이스라엘이 화해와 통일을 이루게 될 것을 기록했습니다. 사19:23-25은 이스라엘이 원수였던 “악의 두 축”이었던 애굽과 앗수르와 화해하고 교류하며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엡2:11-18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고 서로 원수 되었던 인간들이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화해하게 된 것을 나타내 보였고 갈3:28은 모든 인간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된 것을 선언했습니다. 엡1:10과 계7:9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 세계와 온 우주가 즉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모두 통일 될 것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화해와 통일은 하나님의 뜻과 비전입니다. 화해와 통일은 성경의 목표이며 완성 점입니다. 남북 통일은 물론 모든 민족과 세계와 우주의 통일은 하나님의 뜻과 비전이고 성경의 목표이며 완성 점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 하나님의 뜻이고 경륜이고 예정이라고 선언했습니다(엡1:9,10).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룬 궁극적인 사역은 죄인들과 하나님과의 화해와 화목과 하나됨 그리고 죄인들과 죄인들간의 화해와 화목과 하나됨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3-16). 우리가 남북이나 세계의 통일을 논하기 전에 무엇보다 먼저 화해와 통일이 하나님의 뜻과 비전이고 성경의 목표이며 완성 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기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화해와 통일이 하나님의 뜻과 비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기억하면서, 화해와 통일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들이 지니며 나타내 보여야 할 십자가의 영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이루신 화해와 평화의 영성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십자가의 영성을 ‘버림’과 ‘떠남’과 ‘항복’과 ‘죽음’의 영성이고 그리고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영성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진정한 화해와 통일로 가는 길은 십자가의 영성을 지니고 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화해와 통일로 가는 길목에는 ‘버림’과 ‘떠남’과 ‘항복’과 ‘죽음’의 영성이 있어야 하고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영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통일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는 ‘버림’과 ‘떠남’과 ‘항복’과 ‘죽음’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자기 집착입니다. 자기 가문, 자기 지역, 자기 민족, 자기 나라에 집착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이기적 본성입니다. 그래서 버리고 떠나며 항복하며 죽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이 그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 떠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소유와 지위를 버리는 버림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 그 훈련을 받았습니다. 모세가 그 훈련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태어나자 마자 부모와 고향의 품을 버리고 떠나는 버림과 떠남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40세부터는 바로와 공주와 제 2의 고향 애굽을 버리고 떠나는 버림과 떠남과 항복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80세부터 120세에 이르기까지는 동족과 심지어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버림’과 ‘떠남’과 ‘항복’과 ‘죽음’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세 번의 ‘버림’과 ‘떠남’과 ‘항복’과 ‘죽음’의 훈련을 받으므로 결국 인류 구원과 화해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으나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신34:5,6). 사실 인류의 구원과 화평과 통일의 주님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버림’과 ‘떠남’과 ‘항복’과 ‘죽음’의 삶을 사셨고 ‘버림’과 ‘떠남’과 ‘항복’과 ‘죽음’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고 떠나셨습니다. 자기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 항복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삶을 사셨고 그리고 자기의 생명을 스스로 버리시는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하늘 영광 떠나서 이 세상에 오신 주님 섬기러 오신 주님 우리 위해 죽으셨네 종 되신 왕 우리 하나님…” (From heaven you came helpless babe. Entered our world your glory veiled.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give your life that we might live. This is our God the servant king…).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27:46).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사53:12). 구원과 화평과 통일의 주님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버림과 떠남과 항복과 죽음의 삶을 사셨고 버림과 떠남과 항복과 죽음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 중에 ‘버림’과 ‘떠남’과 ‘항복’과 ‘죽음’의 삶을 사신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성 프랜시스였습니다. 프랜시스는 버림과 떠남과 항복과 죽음과 약함과 청빈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재산도 평안한 삶도 세상의 향락도 아버지로부터의 상속권도 아버지도 모두 버린 채 한 평생 약함과 가난과 청빈의 삶을 살았습니다. 프랜시스는 가난이라는 이름의 여인과 결혼했다고 선언하며 절대 청빈과 완전 무소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생명 자체를 포기했습니다. 결국 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품고 사랑하는 평화의 사도로 살았습니다. 그는 죽음을 향해서 “나의 자매 죽음이여”라고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심게 하소서!"

평화와 통일로 가는 길목에는 ‘버림’과 ‘떠남’과 ‘항복’과 ‘죽음’과 약함의 삶이 있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도 장기려 박사님도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버림’과 ‘떠남’과 ‘항복’과 ‘죽음’과 약함의 삶을 사셨고 무소유로 가난하게 청빈하게 살았습니다. 이분들만큼 화해와 통일과 평화로 가는 길을 탄탄하게 닦아놓은 분들도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로, 통일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버림’과 ‘떠남’과 ‘항복’과 ‘죽음’의 삶은 우리들로 하여금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줍니다. ‘버림’과 ‘떠남’과 ‘항복’과 ‘죽음’의 삶을 사신 우리 주님께서 결국 십자가 상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를 나타내 보이셨고 구원과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핵심이고 성경의 핵심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운명과 삶을 변화시킵니다. 저주가 축복으로, 미움이 사랑으로, 원수 맺음이 화목으로, 이기적 삶이 헌신의 삶으로, 바뀌어집니다. 저는 십자가 복음의 특성을 네 마디로 요약해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달려서 죽은 십자가에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가 나타났습니다. 십자가에는 모든 종류의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긍휼이 나타났고, 모든 종류의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용서가 나타났고, 모든 종류의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나타났고, 모든 종류의 죄인들과 화해하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화해와 평화가 나타났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엡2:4,5,13). 사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화려한 제사나 예배보다는 긍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13).

저는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를 가장 생생하게 나타내 보이신 분이 앗시스의 성자 프랜시스요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과 작은 예수로 살다가 죽으신 장기려 박사님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랜시스는 가난하고 병든 나환자들에게는 물론 모슬렘들에게도 심지어는 이단들에게까지 아니 포악한 짐승들에게까지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손길을 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도 가난하고 병든 나환자들에게는 물론 일본 사람들과 공산당들에게도 심지어는 자기의 두 아들을 총살한 공산당과 자기 자신을 총살한 공산당에게도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손길을 폈습니다. 작은 예수로 살다가 작은 예수로 죽은 장기려 박사님야말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예찬자였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은 지고 선이다. 사랑은 도덕의 도덕이요 생명의 생명이다. 사랑의 철학은 생명철학의 일대 혁명이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 사랑은 영원한 것, 사랑은 생명 자체이다.” 장기려 박사님은 사랑의 통일론은 이렇게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사랑 앞에는 어떤 이념도 한낱 쓰레기 일뿐 우리는 무력도, 경제력도 아닌 오직 사랑으로 통일을 성취해야 한다.” 장기려 박사님은 병든 우리 사회를 치료하고 살리는 길도, 분단 된 이 땅에 평화와 통일을 가져오는 길도,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너무나 귀한 장기려 박사님의 말씀을 오늘날 어느 유명한 신학자나 목회자나 부흥사의 말씀보다 더 귀하고 더 옳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가슴과 몸에도 항상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가 넘쳤고 한경직 목사님은 모두를 향해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손길을 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영성을 우리 몸에 조금이라도 지닌다면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에 모슬렘이나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분노나 증오나 저주는 자리 잡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본래부터 원수가 없었습니다. 기독교에는 본래부터 원수에 대한 미움도 증오도 저주도 없었습니다. 데모도 시위도 없었습니다. 초대교회 3백여 년 동안에는 데모도 시위도 없었습니다. 순교자들의 죽음만 이어졌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인권운동에도 있지 않고 사회정의에도 있지 않고 심오한 신학에도 있지 않고 감동적인 설교에도 있지 않고 고상한 윤리에도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어리석어 보이고 미련해 보이고 약해 보이는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복음과 영성을 우리 몸에 조금이라도 지닌다면 아무도 우리를 의심하거나 경계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모슬렘이나 공산주의자들이 우리 한국교회를 의심하거나 경계하거나 두려워한다면 우리가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복음과 영성을 우리 몸에 조금이라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경계하거나 두려워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을 경계하거나 두려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나 손양원 목사님이나 장기려 박사님이나 한경직 목사님을 경계하거나 두려워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남북관계를 개선할 수 있겠습니까? 서로 의심하고 서로 경계하고 서로 두려워하는데 어떻게 남북관계를 개선할 수 있겠습니까? 한 가지 길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남한의 목사님들과 장로님들과 신자들이, 우리 남한의 그리스도인 정치가들이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영성을 조금이라도 우리 몸에 지닐 수 있다면 남북의 관계는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 이외에는 아무 길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북한과의 대화와 관계를 여는 데는 사랑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2008년 1월 11일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모임에서 고백한 일이 있었고, 2008년 12월 22일 한국선교역사기념관개관행사에 참석해서는 북한에 사랑을 베푸는 일 밖에는 다른 일이 없다고 저에게 말하면서 우리 정부가 그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조용기 목사님에게 제가 심부름을 할 테니 북한 동포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을 함께 해 나아가자고 말했습니다. 십자가 사랑에 미치는 대신 돈에 미치고 경제에 미치고 정치에 미치고 부귀와 명예에 미친 우리 한국교회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한번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영성을 우리 몸에 지니고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를 남한과 북한과 아시아와 세계에 나타내 보이면서 전할 수 있게 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주여!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들을 십자가의 제물들로 만들어주시옵소서!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통일로 가는 길목에는 ‘버림’과 ‘떠남’과 ‘항복’과 ‘죽음’의 삶이 있어야 하지만 그 삶은 반드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군적” 기독교는 이 세상을 분노와 증오와 저주와 갈등과 대결과 전쟁으로 치닫게 만들 수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적” 기독교만이 이 세상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와 ‘통일’로 가게 만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천여 년 전에 선언한 선언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아니 그 선언 이외에 유효한 선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3-16). 분노와 증오와 저주와 갈등과 대결과 전쟁으로 치닫고 있는 이 세상에 화해와 화평과 하나됨과 통일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고 오직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 밖에 없음을 우리는 사도 바울과 함께 다시 새롭게 선언하고 그 길을 가려고 최선의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삶을 사는 것이 우리 인간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상에 나타난 비극적이고 신비하고 역설적인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사건을 나를 위한 사건으로 조용히 무릎 꿇고 울면서 받아드릴 때 우리들에게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영성이 조금씩, 조금씩 주어지는 것을 발견하고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최초의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예찬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십자가만을 알기로 고백하며 작정했고, 십자가만을 전하기로 고백하며 작정했고, 십자가만을 자랑하기로 고백하며 작정했고, 십자가만을 자기 몸에 짊어지고 다니기로 고백하며 작정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1).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6:14).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6:17). 우리들도 사도 바울과 그 후예들이 걸어간 십자가의 길, 통일로 가는 길, ‘버림’과 ‘떠남’과 ‘항복’과 ‘죽음’의 길,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길로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과 은혜로 저와 여러분들이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이루는 작은 제물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기도합니다. 프랜시스의 “평화의 기도”를 함께 부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