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
1. 시작하면서

아더 피어선(Arthur Tappan Pierson, 1837-1911)은 신학자요 목회자요 선교사인 동시에 한국 평택대의 전신인 피어선 신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피어선은 탁월한 학자였다. 그는 청교도 배경의 가정에서 자라 일찌감치 헬라어와 라틴어 수사학적 교육을 받고 성경 자증의 원리를 받아들인 보수주의적 신학자였다. 그의 주요 서적은 칠십 여권에 이르고 수많은 논문과 팜플렛들이 남아있으며 13,000여 편에 이르는 설교와 강의를 하였다. 당시 세계 제일의 침례교회였던 런던 메트로폴리탄 테버너클교회의 대설교자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목사의 후계자가 된 것은 유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동시에 당대 유명 복음주의자들인 D. L. 무디와 토리(R. Torrey), 딕슨(A. C. Dixon), 허드슨 테일러(H. Taylor), 고든(Gorden), 조지 윌리엄스(G. Williams), 조지 뮬러, 당시 기독 재벌 워너메이커가 모두 그와 밀접히 교제한 인물들이었다. 본 주제와는 조금 다른 문제이기는 하나 필자의 개인적 생각으로는 한국에 대한 피어선의 지극한 사랑으로 볼 때 한국 종로 YMCA 건물 설립 시 워너메이커가 기꺼이 건립비를 보내온 것도 친구인 피어선의 조언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안명준 박사는 이런 피어선의 성경관을 종교개혁주의자들의 신학에 굳게 선 루터와 칼빈의 전통을 굳게 따르는 학자였다고 논증한다.

아더 피어선은 또한 탁월한 변증가였다. 기독교 변증학’(Christian Apologetics)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여 기독교를 변증하는 학문이다. 기독교 변증학은 기독교와 기독교 신학을 반기독교적 공격으로부터 수호하는 일이다. 성경적 변증학은 성경의 근본 가르침에 순종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우리가 비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를 믿도록 권유할 때 변증학에서 터득한 변증의 방법을 잘 활용하면 도움이 되기 때문에 변증학을 선교학의 한 형태로 이해할 수도 있다. ‘기독교 험증학’(Christian Evidence)은 기독교 변증학에서 이미 그 존재가 변증된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하시는 구속의 사역에 대해 그 진리성과 타당성을 변증하는 학문이다. 우리의 경험 속에서 확인되는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구속적 사역의 증거들을 거론하는 일을 하는 학문이다. 변증학은 기독교 신론의 지위를 확보하기를 목적으로 하고 험증학은 주로 기독교의 경험에 관한 정해(正解)를 유지하기에 노력한다. 따라서 변증학의 범주 안에 험증학이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전자는 사실보다 철학에 관심을 갖고 후자는 철학보다 사실을 더 많이 취급하게 된다. 그 어느 때보다도 무신론과 반성경적 파도가 거센 21세기 포스트모던과 과학기술의 시대에,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일찌기 과학적 변증의 중요성을 깨달았을 뿐 아니라 과학 자체에도 깊은 혜안적 지식과 관심을 가졌으며 탁월한 저술가요 신학자요 열정적 선교사였던 아더 피어선 박사의 변증가로서의 궤적을 추적하므로서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적 좌표를 점검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소망한다.

2. 피어선의 생애

아더 피어선(Arthur Tappan Pierson, 1837-1911)은 1837년 3월 6일 뉴욕에서 10남매의 9번째 그리고 4형제 중 막내 아이로 태어났다. 그해는 무디와 존 워너 메이커 그리고 런던의 스펄젼이 태어난 해였다. 같은 해에 태어난 이 네 사람이 미국과 영국의 기독교 역사는 물론, 세계 선교사적 차원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피어선의 출생은 저명한 설교자요, 교사요, 개척자인 그의 조상 아브라함 피어선이 1639년 영국 국왕의 명령을 받아 미 매사추세츠에 도착하여 미국에 정착한지 약 200년이 지난 뒤였다.

아브라함 피어선의 후예들은 현 예일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의 설립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이다. 피어선의 선교적 열정이나 복음적 설교의 능력이나 학문적 깊이가 한결같이 그의 조상들의 신앙적 유산 때문이었다고 후대 평가자들은 밝히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피어선이 태어나고 자란 당시 뉴욕은 밀어닥친 경제적 어려움이 많았던 시기였다. 그로 인해 피어선도 언제나 굶주림을 면치 못하는 가정에서 많은 형들과 누나들의 그늘 밑에서 자랐다. 그 같은 가정적 분위기에서 그는 어려서부터 철저한 신앙 훈련과 많은 형제들 가운데 공동체적 삶을 배우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의 철저한 신앙 훈련과 어떠한 환경 아래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자세는 그의 삶 전체에 있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고 섭리되고 있다는 철저한 신앙의 자세를 갖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는 13세 때 감리교회에서 열리는 특별 부흥회에 참석하면서 중생의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이 경험을 "어느 날 밤 나는 몹시도 구원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초청을 받았을 때 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기도를 요청하고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나의 삶을 출발하기로 결심했습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는 뉴욕, 클링톤에 있는 기독교 대학인 해밀톤 대학에서 수학하게 되는데 콜럼비아 대학으로 가지 않았던 이유는 그곳에서 선교사로서의 준비를 위해서였다.

피어선은 마을 선교회의 간사로 일하며 방학 중에는 문학, 전기, 역사 그리고 시를 체계적으로 하루 100페이지씩 읽었다. 그리고 표현을 자유롭게 하고 사상을 명료하게 하며, 용어를 아름답게 선택할 수 있도록 습작 연습에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그는 대학을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뉴욕의 유니온신학교에 들어갔다. 1836년에 세워진 유니온신학교는 지금은 많이 바뀌었으나 당시는 보수 신앙의 요람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신학적 특별 연구와 실제적 훈련을 3년간 받게 된다. 토마스 스키너 박사에게서 수사학과 목회 신학을, 헨리 보이톤 스미스에게서 조직 신학을 수학하였다. 스미스 교수는 피어선이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학식과 명료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가르침은 하나님을 학생들에게 완벽하게 알려주는 가르침이었다. 히브리어를 가르친 엘리아스 리그스 박사로부터 피어선은 선교적 관심에 큰 자극을 받게 되었다. 그가 수학하던 때, 뉴욕에서는 여러 교회에서 영적 각성이 일어났고 그 영향으로 선교적 관심이 제고되던 때였다.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1860년부터 1889년까지 여러 지방의 여러 교회에서 광범위한 목회 경험을 갖게 된다. 그의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교회의 정신과 목적을 (1) 복음적 신앙 : 성서의 가르침을 생활의 규칙으로 받아들이고 채택하는 것 (2) 복음 전파적 :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려고 추구하는 것 (3) 교육적 : 가족을 유익하게 하고 국가와 민족, 그리고 세계에 유익을 줄 수 있도록 개인을 개조하고 가르치는 것 (4) 계급을 조장하는 정신을 배제하고 교회에 오는 모두에게 좌석을 무료로 함에 두었다. 특히 그에게 있어 이 기간은 기도의 비밀과 기도의 영역을 넓혀가는 시기였다. 그의 기도에는 인간들이 겪는 어려움, 필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제반 필요의 사항과 전 세계를 향한 내용들이 포함되었다. 그는 개인 기도 생활을 통하여 자신에 대한 승리, 인간에 대한 그의 영향력,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능력의 비전을 체험하였다.

그 무렵 그의 설교와 글 그리고 성서강해는 그의 이름을 미국에 널리 알려지도록 하였고 많은 대학 그리고 교회에서 강연과 설교의 초청을 받게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 기간에 시카고의 노스필드의 무디에 의해 시작된 성경연구회와 연결된다. 그 결과 A.J.고든, 보스톤의 조셉 쿡, 마르크스 레인포드, F. B. 메이어, 켐벨 몰간, 그리고 영국의 맥그리거와 같은 거장들과 교분을 갖게 된다. 1885년, 무디가 주관하는 선교위원회가 조직되는데 그 위원들은 회장에 피어선, 임원으로 고든(보스톤), 쿤홀(인디아나폴리스), 펜테코스트(뉴욕), 애쉬모어(중국 선교사), 스푸트 (영국의 런던), 드라이어(시카고) 그리고 무디가 참여하였다. 이같은 선교적 노력은 1888년 런던에서의 선교 100주년 회의를 통해 결실을 맺게 되었다. 그 집회 후 4개월 동안 그는 125개의 모임에서 선교에 관한 집회를 갖게 되었다. 그 결과 당시 선교에 관하여 가장 권위있는 저널인 미셔너리 리뷰(Missionary Review)의 편집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 후 피어선은 30년 동안 미국 장로교에서 목회지를 떠나 영국 런던의 침례교의 스펄젼이 목회하던 교회에서 스펄젼을 대신하여 약 2년간 (1891년 10월 - 1893년 6월) 목회를 하게 된다. 이후 1910년 일본을 거쳐 그는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한국에 6주를 머물면서(1910년 12월 1911년 1월) 선교회에서 매주 강의하였고 주한 선교사들과 한국 기독교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한국 교회의 사도적 특성과 희생 정신 그리고 성서 연구에 대한 한국인들의 갈망을 보고 듣게 되었고 한국 땅에 성서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그 노력의 결실이 바로 1912년 서울 신문로에 세워진 피어선기념성서학원이다. 1887년 시작된 새문안 교회의 언더우드는 A.T. 피어선 박사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예배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편지를 보낼 정도로 깊은 관계가 있었다. 후에 언더우드는 이 피어선학원의 제 2대 교장을 지냈다. 지금은 평택대학교로 바뀐 이 학교에서 한국 학계와 교계의 무수히 많은 지도자들이 배출되었다. 초기 대부분의 감리교 인물들이 피어선학원 출신이었으며 그 이외 대표적 유명 인물들로는 송창근 박사, 박연서 목사, 박석현목사, 손재학(제헌 국회의원), 한상동 목사, 조기흥 박사, 지휘자 김생려(金生麗), 김삼환 목사, 이필재 목사, 조상열 박사 등이 있다. 1910년 약한 몸을 가지고 일본을 거쳐서 한국을 방문하여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병세가 악화된 피어선은 1911년 미국 뉴욕으로 돌아간 후 그해 6월 3일 74세를 일기로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그는 장로교에서 신학적 훈련을 받았고, 회중 교회에서의 첫 목회 경험을 쌓았으며, 그 후 침례교에서 광범위한 활동을 하였고, 영국 브리스톨의 형제단에서 가장 심오한 영적 교훈을 받았다. 그는 생애 동안 많은 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인간의 조직에도 직접적으로 소속되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우주적인 교회만을 추구하며 그의 일생을 마치게 된다. 그는 생을 마치기전 "오직 주님 이외에 아무에게도 속해 있지 않은, 장로교, 침례교, 조합 교회로 복합된 나를 영국 국교회가 환영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는 말 그대로 현대판 초교파적 인물의 원조였다.

3. 변증가로서의 학문적 배경

피어선의 조상 중 처음으로 미국에 도착한 사람은 뉴왁(New ark)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의 초대목사였던 아브라함 피어선이었다. 주민들이 그들의 마을을 뉴왁(New ark)이라고 고쳐 부른 것은 그의 영국 출생지 지명이 Newark-on-the-Trent였기 때문이었다.

코네티컷 주 브랜포드(Branford)에서 피어선 목사를 따라 이사 온 사람들은 엄격한 생활의 규범을 강조한 청교도들이었는데 이들은 신정주의 원칙에 입각한 첫 교회를 설립하였다. 즉 교인이 아닌 사람은 투표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아브라함 피어선 목사의 아들 아브라함 피어선 2세 역시 목사였다. 그는 예일대 설립자 중의 한 명이며 초대총장을 역임한 사람이다. 그의 부친인 스티븐 피어선은 장로교의 장로로 열 명의 자녀들을 장로 교인으로 길렀는데 피어선은 주일이면 스프링가 장로교회의 교회학교에 다녀야만 했다. 이런 신앙적 배경은 그가 탁월한 기독교인으로서 뿐 아니라 학자적 수양을 쌓는 데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스티븐 피어선과 그의 아내 셀리는 자녀들에게 철저한 복음주의 교육을 시키기 위하여 그들을 기독교 사립학교로 보냈다. 나이 11세 되던 1848년 워싱턴 스퀘어에 위치한 마운트 워싱턴 교구학교에 등록하여 그곳에서 희랍어와 라틴어를 배웠고 12세 때 희랍어신약성경을 읽었으며 뉴욕시 테리타운 언덕 허드슨에 위치한 고등학원에 입학하여 그의 뛰어난 학문의 능력과 시, 음악, 어학, 그리고 화술 등의 재능이 나타나 부모들로 하여금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불구하고 대학과 학교에 다니도록 결정을 내렸다.

앞서도 언급했듯 13세에 감리교회 특별 부흥회에서 중생을 경험한 그는 15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1852년 5월 28일 머서가(街)에 있는 장로교회 강의실에서 복음주의 청년들과 회합을 가졌는데 백인 계 무역업에 종사하는 청년들의 정신적 도덕적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고안한 당시 영국인 조직인 YMCA에 관한 강의를 듣고 뉴욕 청년대표들을 포함한 백 명의 창립회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1853년 뉴욕 주 클린턴에 있는 해밀턴대학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시학, 수사학, 그리고 어학에 몰두하였고 동료 젊은 토머스 베일리 알드리히는 피어선의 시를 높이 평가해 줌으로 피어선의 문학적 포부를 더욱 북돋아 주었다. 피어선의 고전적 시 형태는 그의 종교교육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도덕적 경건으로 넘쳤다. 이런 시적 감각은 그의 저작들에 반영 되었을 뿐 아니라 변증가로서의 삶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1857년 피어선은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 입학하여 문학에 몰두하였다. 그는 시(詩) 기고란 외에도 헨리 비쳐(Henry Ward Beecher)가 창간한 「표준과 독립」(The Standard and the Independent)신문에 여러 편의 시와 평론을 기고하였다.

피어선은 1860년 뉴욕 유니온신학교를 졸업하였는데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된 후에 성경이 역사와 과학 등에 대해 잘못된 진술을 포함한다는 고등비평이 힘을 얻었고 유니온신학교의 찰스 브릭스 교수는 1880년 이후 이 새로운 신학사조를 장로교에 들여왔다. 1892년과 1893년 장로교총회는 성경원전의 “무오성”을 선언하고 브릭스 교수를 장로교에서 정직 시켰다.

이 후 유니온신학교는 성경원전의 “무오성”에 도전하는 대표적인 진보주의 신학교로 바뀌었다. 현재는 자유주의 신학의 총본산이며 종교다원주의와 범신론에 입각한 신학교로 완전 변질 되었다. 이런 모습들을 경험하면서, 거듭난 신앙인이요 선교의 열정에 불타던 피어선은 자연스럽게 성경을 변호하는 일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1860년대 초반 피어선은 기독교에 대한 증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기독교에 대한 증거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돌을 수집하고 놀던 어린 시절부터 자연 과학에 흥미가 많던 피어선은 과학과 신앙 사이에는 아무 런 모순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독일의 자연학자이자 탐험가인 훔볼트(B. Von Humboldt)와 프랑스의 파스칼(B. Pascal)에 대한 대중적인 글쓰기를 좋아하였다.

이후 그는 디트로이트 YMCA에 적극 참여하면서 YMCA가 초교파적인 병기로서 청년들을 양성하는데 공헌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피어선은 디트로이트 기독청년 연합회를 위한 건물과 체육관 구입운동을 주도하였으며 한동안 임시건물에서 성경연구를 지도하기도 하였다.

피어선은 에큐메니칼운동에 참여한 외에 장로교단 일에도 적극 참여한다. 1872년에는 장로교 디트로이트 연맹을 조직하는 일에 앞장을 섰으며 1875년 피어선의 나이 서른여덟 되던 해에 미시건 대회의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선교운동에 있어 가능한 한 중립적 위치에 서려고 애썼다. 하지만 1890년 이후 신학적 다양성에 대한 자신의 온건하면서도 중립적인 태도를 서서히 바꾸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1893년 세계박람회에서 노출된 신학적 다원주의가 피어선을 놀라게 하였으며 복음주의적 신학과 에큐메니칼적 관용 간에 균형을 유지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생애 마지막 15년간, 그는 평신도 성경연구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고등비평이 주장하는 지성주의와 불경건을 거부하고 나섰다. 그리고 전(前)천년주의 성경강해자의 주역이 되어 영국과 미국에서 성경에 굶주린 수많은 학생들을 양육하였다. 그는 진실한 근본주의자였으나 훗날 근본주의 운동을 특정 짓게 된 분파주의와 편협은 몹시 싫어하였다. 그는 성경강해에 관한 저술 및 「스코필드 관주성경」(Scofield Reference Bible)을 편집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영적 생활을 강화하고 국제적 성경강해자로서의 새로운 경력을 확고히 하였다. 그의 초기 저술들은 대개가 선교에 관한 것들인데 반해, 1895년 이후 저술의 대다수는「세계선교 논평」을 제외하고는 영적생활과 성경연구에 관한 것들이었다. 초점이 선교에서 케스윅 영성운동 및 성경강해로 옮겨간 것은 선교단체들 간의 신학적 논쟁을 피하려는 방법 뿐 아니라 성경적 근본주의로의 전환이기도 하였다. 이런 그를 훗날 많은 학자들이 진정한 근본주의자라 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피어선이 조지 뮬러(George Müller of Bristol)를 따라 후(後) 천년주의자에서 전(前) 천년주의자로 전환한 것은 주림의 재림을 대망하면서 그의 근본주의적 관심을 심화시켰을 것이라 본다.

변증가로서의 아더 피어선의 학문적 배경은 이와 같은 그의 삶의 궤적과 선교사로서의 사역이 결합하여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계속>

* 이 글은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연구소’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