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별로 달라지지 않는 청소년의 현실을 보면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고 오늘과 내일이 별로 달라질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비단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청소년의 문제는 날로 복잡하며 다양해지고 있으며 심해지고 있는 데 우리 사회의 청소년에 대한 인식은 별로 크게 달라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이집트 피라미드의 벽을 발굴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귀가 씌여 있어서 모두들 깜짝 놀라 혹시 낙서한 것이 아니가 의심했으나 결국은 피라미드 설치 작업 중에 어느 인부가 낙서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어서 큰 일이야."

5,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지금 대다수 어른들이 청소년을 보는 관점은 크게 다르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어른 중심적인 시각으로 청소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청소년의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단순화하거나 혹은 낙인화시킬 위험성을 안고 있다.

입시가 끝나면 해마다 되풀이되는 "입시에 시달린 청소년들의 자살사건"과 심심치 않게 보도되는 PC게임에 몰두하다 탈진하여 죽은 청소년 사건들만 해도 그들의 생각이 짧음을 비난하고 지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와같은 사건들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되풀이 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요한복음 9장 1-12절에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있다. 제자들은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 부모의 죄냐? 아니면 자기의 죄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그것은 자기의 죄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청소년의 문제도 사회의 문제냐 아니면 개인의 문제냐? 아니면 복합적인 문제냐?를 두고 따질 수 있고 어떤 면에서는 따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이 차원을 넘어서 날로 복잡해져가는 청소년의 문제들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를 어떻게 드러내느냐하는 관점에서 청소년의 문제를 접근해야 한다.

그러나 대다수 교회나 기독교인들은 청소년의 문제에 대해 너무 안이하게 대응하고 있거나 아니면 거의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신앙교육만 시키면 된다거나 아니면 단순히 전도 대상이나 혹은 미래를 위한 투자대상으로 여기고 있거나 아니면 별로 관심을 두지 않거나 오히려 심한 경우는 가출같은 청소년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교회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고 거룩한 분위기를 해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필자는 은행골우리집이라는 그룹홈을 통해 가출, 가정해체 등으로 상처받은 청소년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청소년 정책과 관련하여 정부 정책과 시스템의 부재를 지금까지 곧잘 비판해왔지만 사실 교회의 청소년 문제 대응으로 언급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형편이다. 필자는 원불교의 대안학교나 불교나 카톨릭의 대안학교와 그룹홈등을 보면서 부끄러움과 부러움을 동시에 느낀 적이 있다. 물론 YMCA 등이 청소년 상담활동을 하고 있고 일부 기독인들이 그룹홈 등을 통해 청소년보호, 양육활동을 하고 있지만 이는 극소수이고 대다수 교회는 청소년의 과제에 대해 무관심하고 있다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교회 성장과 부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청소년의 문제들은 부차적인 과제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교회성장이라는 관점에서도 청소년의 문제는 외면할 수 없는 과제로 이미 떠오르고 있다.

대학입학 대상연령인 18세 인구는 2004년 63천명이 되어 입학정원의 96% 수준으로 줄어들었다가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줄어들기 시작(626천명:96%)으로 하여, 2030년 476천명(73%)에 도달할 것으로 통계청은 밝히고 있다. 이렇게 청소년 인구가 줄어든다는 것은 교회 성장에 심각한 위협이 제기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청소년의 문제에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보다는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PC 방에서, 학교 입시의 현장에서, 길거리에서 신음하고 있는 청소년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응답해야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신앙인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가정과 학교와 길거리에서 우리 청소년들이 신음하고 있음은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이제는 교회가 이들을 위한 가정이 되고 이들을 위한 학교가 되고 이들을 위한 건강한 놀이터가 되어야 가정해체, 가정내 심한 폭력 등으로 살 곳이 없는 청소년들을 위해서는 그룹홈이나 가정위탁을 통해 교회가 이들을 위한 가정이 되고, 입시와 경쟁에 시달리거나 놀 곳이 없는 청소년들을 위해서는 건강한 놀이공간과 또래 친구들을 맺어 줄 수 있는 공간이 되고, 대안학교 등의 방식으로 나눔과 섬김을 통해 경쟁을 치유하는 학교가 될 때 소경이 눈을 뜬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듯이 청소년들을 통해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의 신앙과 지역사회의 자원, 그리고 인력과 공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청소년들에 대한 관심만 있다면 주님께서 역사해주실 것이다.

청소년의 문제는 복합적이기 때문에 어느 한 두 가지 대책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긍극적으로는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평화를 온전히 성취할 때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고 청소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기회를 흘러 버리거나 청소년들의 신음소리를 외면하는 것이 합리화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주님께서는 갈 곳없고 있을 곳없는 청소년들을 위해 우리 기독인들이 그들의 신음소리에 응답하여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우신 일들을 드러내시길 기다리고 있다.

김광수 목사(전국 아동청소년그룹홈협의회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