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4년 9월 28일
본문: 요한복음 8:32
설교: 김병삼(만나교회 담임)
제목: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요한복음 8장 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종교 개혁지를 둘러보고 귀국하던 날 만나 교회 3층에 북 카페가 완성이 되었습니다. 책장에 새길 문구를 저에게 골라달라고 하더군요. 저에게 가장 인상적으로 남았던 것이 얀 후스의 개혁이었습니다. 제가 불러준 구절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지금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진리이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교회 안에서 진리란 과연 무엇일까요? 목회자들에게 좋은 교인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대개의 경우는 믿음이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일단은 목회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목회자가 되어 버리는 듯합니다.
그러면 교인들에게 있어서 좋은 목사를 어떤 목회자일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좋은 목사’란 ‘나의 마음에 든다.’라는 것을 빼놓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일단 목회자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신실한가는 당장 피부에 와 닿지 않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늘 삶의 한가운데는 ‘나’의 이기심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묶여 있을 뿐입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 것이죠.
오늘은 진리가 아닌 자신의 틀 안에서 깊이 갇혀 복음을 잃어버리고 철저한 암흑 가운데 있었던 교회를 향해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외쳤던, 그리고 그 진리가 말씀 가운에 있다고 믿었던 종교 개혁자 후스를 통해 우리 신앙을 점검하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얀 후스의 유적지를 돌아보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프라하 공항에서 제 마음에 떠올랐던 글을 적었습니다.
프라하 옛 시가지 광장에는 종교개혁가 "얀 후스"의 동상이 있습니다. '프라하의 연인'이라는 드라마 덕에 이곳에는 소원을 비는 한국 사람들로 붐볐다고 하네요. 잘못된 정보로 소원을 빌기 위해 덕지덕지 포스트잇을 붙이는 한국인들을 막기 위해 체코 경찰들이 지켜야 할 정도였다고 하네요.
왜 이리 사람들은 소원 빌기를 좋아하고 소원 빌 동상을 찾아 헤매는지. 이러한 사람들의 종교성과 맞물려 중세교회는 쉽게 타락했던 것 같습니다. 라틴어로 된 성경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교황권은 말씀이 아닌 권위와 미신으로 다가왔던 거죠.
얀 후스는 이러한 중세 교회에 대하여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던 사람이죠. 최초로 프라하의 베들레헴교회에서 체코어로 설교를 하고 체코어로 성경을 번역했죠. 그러한 이유로 후스에게 1411년 모든 교회에서 설교 금지령이 내려집니다.
참 재미있죠?
"교회에서 설교를 할 수 없게 되자 교회가 아닌 모든 곳에서 설교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 후 체코는 수백 년 동안 종교전쟁의 비극적인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름은 종교전쟁이지만, 실상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권력을 잡으려 했던 사람들의 싸움이었습니다.
요즘 체코의 대부분 사람에게 종교를 물으면 "나는 종교가 없어요!"라고 대답을 한다고 하죠.
이틀 동안 우리 팀을 가이드한 사람의 이야기를 좀 옮기겠습니다.
"체코에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애를 써 보는데 쉽지 않네요. 좋은 사람을 교회에서 만나기가 쉽지 않고요. 그런데 만나 교회 성도들을 만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이런 사람들하고 라면 함께 신앙생활 해보고 싶다고'(여기서 살짝 만나 교인자랑) 그리고 이런 목사님이라면. (여기서 살짝 내 자랑)"

그런 생각을 합니다.
시간이 걸릴지 모르지만, 결국은 삶이 개혁이구나!
얀 후스의 도시 프라하를 떠나며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입니다.
삶으로 사는 것보다 더 위대한 개혁은 없다고.

프라하 도서관에는 1572년이라고 찍힌 3인조의 큰 메달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그 처음 것은 한 돌로부터 불꽃을 튀기는 위클리프의 상이고, 둘째는 그 불꽃에서 불을 점화하는 후스의 상이며, 셋째는 타오르는 횃불은 높이 든 루터의 상입니다.
그 큰 메달은 영국인에서, 보헤미아인 그리고 독일인에 의해서 이룩된 종교개혁의 전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하게 될 얀 후스는 위클리프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므로 위클리프와 루터를 이어주는 고리 역할을 하게 됩니다.


진리 앞에서, 그리고 자유함이란
후스의 종교개혁은 그가 교황과 교회 권력으로부터 받은 고소장을 보면 아주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대체로 6가지로 요약되는데,
1. 피고(후스)는 그리스도의 몸이 성만찬에 임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2. 교황의 무오함을 부인하고,
3. 고해성사를 거부하고,
4. 상급 성직자에게 무조건 순종할 것을 거부하고,
5. 성직자의 독신을 거부하며,
6. 면죄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
우리가 현재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잘못을 처음으로 지적했다는 이유로 그는 죽음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물론 그의 개혁은 죽음을 예견한 일이었고, 그에게 죽음보다 더 값진 것은 진리를 수호하는 일이었습니다.
후스가 망명 시절 했던 설교 중 “사도신경 해설” 제5장에는 요한복음 8장 32절을 본문으로 한 자신의 고백이 담겨있습니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여, 그대는 진리를 ‘찾아 나서고’ 진리를 ‘듣고’ 진리를 ‘배우고’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지키고’ 죽기까지 진리를 ‘증언하시오.’
왜냐하면, 진리는 그대를 죄와 사탄으로부터 구원하고 영혼의 죽음과 영원한 죽음에서 해방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화형대로 끌려가기 전 감옥에서 드렸던 기도문을 보면 그가 어떤 신앙의 사람이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나는 비록 약하나 당신의 뒤를 쫓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나의 영혼을 강건케 하셔서 기꺼이 감당하도록 하소서.
만약 육신이 약하거든 당신의 은혜로 앞장을 세우소서.
은혜가 당신과 나 사이에 그리고 내 뒤에 따르게 하소서.
주 예수님 당신이 아니시면 당신을 위하여 잔인한 죽음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나에게 두려움이 없는 심장과 올바른 신앙과 요동치 않는 소망과 완전한 사랑을 주시옵소서.
당신을 위해 인내와 기쁨으로 저의 생명을 바치게 하옵소서.

후스의 개혁 사상을 조금 요약하면서 우리의 신앙에 적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에게 진리는 명확하게 거짓된 것을 드러내도록 합니다. 진리를 모른다면 어떻게 잘못된 것을 지적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위클리프처럼 성령의 중요성과 성경을 그의 나라말로 해석한 이유이기도 하지요.

후스의 교회 비판은 초창기 내부적인 문제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 부분이 설교를 하는 저에게 가장 아픈 부분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기 전에 저에게 변화돼야 할 것, 개혁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후스는 초창기 체코의 대주교의 지지를 받아 총회에서 설교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는 설교를 통해 동료 성직자들에게 세속적인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 것을 역설합니다. 이 시기에 후스는 강력하게 성직자들의 삶의 도덕적인 개혁을 요구합니다. 그도 성직자요, 그의 동료들이었지만, 그를 멈출 수 없게 만든 것은 ‘진리’였습니다. 진리는 양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의 목적은 하나님이 내게 알려 주신 진리, 특별히 거룩한 성경의 진리를 죽기까지 지키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영원히 전능하게 서 있으며 영원히 전능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결국, 1411년 후스는 파면되었고 모든 교회에서 설교가 금지되었습니다. 그때 후스는 동료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자기 친구들에게 그리스도 자신도 악당과 같이 파문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분을 위하여 우리가 재산과 친구들과 세상의 존귀와 우리의 하찮은 생명을 잃어버린다면 우리가 무엇을 잃겠는가? 형편없이 사는 것보다는 잘 죽는 것이 낫다.”

성직자들에 대한 그의 비판이 성직 매매와 면죄부 판매를 공격하면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1411년 요한 23세가 십자군의 군비를 조달하기 위해 판매하던 면죄부를 후스는 맹렬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그의 비판의 핵심입니다.
“교황은 물리적 힘을 사용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으며, 돈의 지불은 진정한 용서에 유효하지 않고, 용서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는 값없이 주어지기 때문에 면죄부는 필요 없다.”
성직자의 타락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권리를 사용하려는 것입니다. 잘못된 권리가 무지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수단이 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복음이 실종되어 버렸습니다. 성직자들의 타락은 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위클리프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모든 권위는 성경에서부터 옵니다. 그는 위클리프와 마찬가지로 라틴어 성경을 자국어인 체코어로 번역합니다.

결국, 성직자들이 거룩하지 못하고 타락하는 근본 원인이 무엇일까요?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 위에 서지 못할 때 신앙은 율법적으로 우리를 억압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의 진리에 내가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을 내가 이용하려는 것이죠.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주일 성수’의 참된 의미가 무엇일까요?
일주일 중 하루를 구별하여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주님의 날’로 정하여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날로 지킨다는 것은 그 날을 구별하여 하나님만을 생각하며 세상의 일을 끊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직장도 쉬고, 사업을 떠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모든 일을 떠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부담스러우십니까? 아니면 자유함을 느끼십니까?
오대식 목사가 쓴 [골리앗 세상에서 다윗으로 살기]에 나오는 글을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교회에 다닐 때, 주일에는 물건을 사지 말라고 배웠습니다. 돈을 주고받는 것, 물건을 사거나 파는 장사 등의 행위는 주일을 범하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면서 정작 그렇게 가르치시는 선생님들은 주일에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교회에 오시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그 문제에 대해 질문을 했더니 그것은 ‘나의 안락함과 쾌락을 위해 돈을 버는 행위가 아니면 괜찮다.’는 옹색한 답변을 해 주셨습니다. 어린 저는 그 답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질문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 한 번은 주일에 물건을 사면 안 되니까 교회 선생님께서 반 아이들인 우리에게 자장면을 사 주시고는 중국집 주인아저씨에게 다음 날 자장면 값을 주겠다고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물론 선생님께는 돈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날 돈을 지불하지 않은 것은 주일에 물건을 사면 안 되는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쓰신 것이었습니다. 대체 무엇을 위한 율법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율법, 그 안에 하나님의 정신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주일 성수에 대해서는 이런 설교를 많이 들어왔습니다. 장사를 할 때, 주일에 문을 닫으면 월요일에 이틀 분량을 팔게 해 주셔서 손해를 보기는커녕 돈을 더 많이 벌게 해 주신다는 내용의 말씀들입니다.
이와 똑같지는 않다 하더라도 비슷한 내용의 말씀을 많이 들어왔고 그때마다 그렇게 살았더니 부자가 되었다는 집사님, 장로님들의 이야기도 함께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주일성수의 정신은 주일에 돈 버는 것을 쉬면 하나님께서 월요일에 더 많이 벌게 해 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더 많이 벌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일을 철저하게 쉬면 나머지 6일을 통해 더 많은 돈을 벌게 해 주신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주일성수의 가장 중요한 정신은 십일조 정신과 같습니다. 그것은 주일성수를 하면 손해를 본다는 것입니다. 주일에 사업장의 문을 닫으면, 주일에 일을 안 하면, 주일에 고객을 만나지 않아 물건을 팔지 못하면 사람들은 손해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것은 “그럼에도, 문을 닫을 수 있느냐?”입니다.
분명히 손해를 보는 것이 사실인데 그럼에도, 하나님을 믿는 것 때문에 금전적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적이기보다는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선택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적으로 적용하므로 자유 함보다는 억압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껍데기를 믿고 있는 듯합니다.
‘진리’는 실종되어 버렸습니다.


진리의 기준 “교회의 머리는 오직 그리스도이십니다.”
당시로써는 후스의 이야기가 파격적이었습니다. 그에게 거룩한 공교회가 된다는 것은 택함을 입은 하나님 백성의 보편적 공동체라고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배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성직자들(교황, 추기경, 주교)이 교회의 몸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고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신앙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에게 유럽의 교회는 그리스도가 배제된 채 교황이 절대 권위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개인적으로 제가 참 좋아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우리를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교황들이 주장하는 베드로의 권위가 실제로 베드로의 생각도 성경적이지도 않다는 것이죠. 그들은 교황의 무오성을 주장하지만, 베드로의 삶에 얼마나 많은 단점과 오류가 많았습니까? 베드로의 권위는 그에게 잘못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쓰셨기 때문이죠.
더는 우리로 하여금 어둠에 있지 않도록 말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교회의 기능, 즉 성도의 해야 할 일은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아름다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도 잠깐 소개했지만, ‘버티컬 처치’라는 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입니다.
성도의 삶과 교회를 통해 나타나야 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입니다. 그 영광이 흘러넘칠 때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덕이 선포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가 아닌 성직자들 제도권이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드러나기보다는 교회가 드러납니다. 그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대신 머리를 차지한 자들이 서로를 뽐내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인격적이고 그 인격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막혀있던 담을 허물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소위 권력을 가지고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람들의 원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유가 아닌 억압과 두려움을 주는 것이죠.
얼마 전에도 한 젊은 분이 저에게 이렇게 묻더군요.
언젠가 기도원에 갔는데 저를 보자마자 예언을 하는데 “큰 목회자가 될 것이다!”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야 하죠?
제 대답은 간단합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하나님이 당신을 쓰시려면 직접 말씀하시고 쓰시지 왜 그 사람을 통해 말씀하시나요?
성경에서 예언은 앞날의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합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예언할 뿐입니다.
만일 그 사람이 예언한 대로 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인 자유의지와 인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남의 앞날을 예언한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성경의 질서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후스가 성직매매와 교황권에 대하여 반발하며 성직자들이 대신해주는 ‘고해성사’ 역시 잘못되었다고 지적합니다. 너무나 명확하지 않습니까?
성직자가 성도들의 죄를 듣고 대신 하나님께 고해야 용서받는다고 주장하면서, 성직자는 교인들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게 됩니다. 마치 자신이 하나님처럼 권한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죠. 그 순간부터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 앞에서 억압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죠.
진리만이 우리를 올바로 보게 합니다. 중세교회가 얼마나 진리를 왜곡하고, 그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자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제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만들고, 그리스도의 몸을 창조하며, 그들이 원할 때마다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의 죄를 사하며, 그들이 원하면 이런 신성모독 죄를 짓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지옥으로 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사제들은 심지어 성경을 유대인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죄를 사해 주는 것이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이며,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쳐 주시면서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실 때,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하나님 외에 누가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반문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교황이 무오하며 그의 의지대로 모든 사람을 천국과 지옥으로 보낼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신성모독이다. 그런 능력은 하나님께만 속했다. 또한, 교황이 지상의 하나님으로서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인류를 통치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신성모독이다. 교황은 하나님의 법과 대등한 법을 세울 수 있고, 사도들과 반대되는 명령을 자의로 내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서는 누구도 교황을 대적할 수 없으므로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 순간부터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치장하고 변명해도, 옷을 그럴싸하게 입어도 머리를 보면 당장 그것이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진리는 변함없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오로지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실 때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유일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순간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 싸움에서 인간들이 가장 비열하게 사용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고, 그런 자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이렇게 자리다툼을 하는 자들이 예외 없이 들고 나오는 말들이 있습니다. “사랑” 때문에.
그런데 사랑이 다 같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나요?
우리는 일그러지고 왜곡된 사랑을 참 많이 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힘들게 하는 사람.
자식을 너무 사랑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서슴지 않는 사람.
우리는 우리가 가진 보편적인 감정인 사랑을 가지고 모든 것을 정당화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사랑의 한계를 너무나 명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 46~47절에 보면,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후스가 무섭게 교황권에 대하여 반기를 들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기에 그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셨던 베드로의 권위를 이어받은 교황이, 그 사랑의 이름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팔아 교회를 세웁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는데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실종되어 버린 것이죠.
원수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성지를 탈환한다는 명목으로 무차별하게 사람들을 학살하는 십자군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변명해도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위를 너무나 사랑해서 저지른 일들이었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는 명제 앞에서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머리됨을 유지하기 위해 깨뜨렸던 화평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화평’을 만들며 드러나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9절 말씀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가 오늘 종교개혁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성공을 일궈온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모이기에 힘썼고, 예배당 짓기에도 힘썼습니다. 기도에도 힘썼지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데는 힘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높은 뜻 정의교회 오대식 목사님이 저에게 책을 보내줬습니다. [골리앗 세상에서 다윗으로 살기]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합니다.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2009년 1월 20일 용산 재개발지역 철거를 하는 중 이주금이 적다는 이유로 농성하는 세입자들의 농성을 진압하다가 농성자 5명과 경찰과 1명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용산참사입니다. 저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는 잘 모릅니다. 또 무엇이 정의인지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보고 안타깝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망한 농성자 중 한 사람인 고 이상민(71) 씨가 15년째 그 동네 교회를 다닌 집사님이셨고, 그 사람들과 대치하다 공권력을 요청한 재개발사업의 조합장은 바로 같은 교회 원로장로님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이유로 그 교회 목사님은 문제가 해결되기까지 돌아가신 집사님을 위해 위로예배 한 번 제대로 드리지 못했다고 하니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이 일은 단지 두 사람만의 개인적인 관계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 교회 안에 용산의 재개발 공사를 빨리 추진하길 원하는 조합 소속 교인들과 턱없이 모자란 보상을 받고 내몰리게 된 세입자 교인들이 함께 있었고 함께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함께 예배드리면서도 그들은 서로 얼굴도 바라보기 힘들 만큼 악감정이 쌓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서 줄타기를 하는 목사님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이 모두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자화상입니다.”

중세 타락한 교회의 부끄러운 모습, 교회의 권력과 건물을 유지하기 위해 진리 위에 서지 못했던 모습이 또 다른 자화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화평을 깨뜨리는 복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상에 전해질 때 하나님의 사랑과 평강이 전해져야 합니다.
권력을 유지하려면 마녀사냥을 해야 하지만 그 권력을 내려놓으면 감싸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어쩌면 그 당시의 교회가 오늘날 우리와 이렇게 비슷할 수 있는가를 보고 놀랐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암흑 가운데 빛나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 어두운 중세 교회를 회복시키는 개혁이 일어났고, 하나님께서는 진리에 헌신된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를 이어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입니다.
진리 가운데 설 것인지, 아니면 진리 앞에서 개혁의 대상이 될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