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자기도 모르게 한 쪽 눈을 찡그리는 형제가 있었다. 처음에는 몸이 불편한 줄 알았는데 실제로 건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과 훌륭한 부모님, 그리고 예쁜 여자 친구를 둔 그는 겉으로 볼 때에 부족함이 전혀 없는 사람 같았다. 그러나 나중에서야 나는 그가 자꾸 한 쪽 눈을 찡그리는 것이 심리적인 불안으로 인해 나타나는 반사적 행동임을 알게 되었다.

서로 알게 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는 나에게 자기 안에 있는 괴로움에 대해 실토하였다. 그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마치 난도질을 당하듯 정죄받았던 사건에 대해 털어놓았을 때, ‘얼마나 오랜 세월 그 비판과 정죄의 음성이 그의 영혼을 괴롭혔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나 역시 처연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망과 불평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나님을 붙들고 몸부림치며 하나님의 뜻이 무언지를 묻고 그 상처를 극복해가려는 모습이 놀라웠다. 그동안 나는 사소한 사건이나 약간의 불편한 감정만으로도 하나님을 오해하고 떠나는 사람들을 많이 봤기 때문에 도리어 그 형제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사실 그의 무의식은 죄투성이와 같은 자신을 하나님도 어떻게 정죄하실지 모른다는 극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언젠가 나는 그에게 제자들의 더러워진 발을 씻기는 스승의 한량없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스승을 향한 경외의 마음으로, 제 발을 씻기실 수 없다며 섬김을 거부했던 수제자의 마음도 말 해 주었다. 그러나 사랑의 주님은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너와 내가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에 베드로는 온 몸을 씻겨달라며 주님 앞에 나아갔다. 천하를 돌아다니며 건강한 자보다는 병든 자를, 의인보다는 죄인을 찾으러 다니신 주님의 모습은 진실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신 분이었다. 사랑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주께서 우리의 더러워진 발을 씻어주실 때 우리는 더 깊이 그 분과 상관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의인이라면, 우리가 온전하다면, 사랑의 주님은 필요 없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날 늦은 밤, 나는 그에게서 문자 한통을 받았다. 진실한 감사의 문자였다.

또 다른 한 형제가 있었다. 좋은 학벌, 준수한 외모로 역시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형제였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노출시키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사람이었다. 늘 고민에 휩싸인 얼굴로, 차마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방어막을 치고 살아가고 있었다. 무섭고 강해보이는 인상 뒤로는 극심한 감정의 기복이 언뜻 언뜻 비쳐졌다.

하루는 그가 나에게 자기는 사소한 말투나 행동도 잊혀지지 않아서 늘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말했다. 그래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려워 자꾸 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조금 더 친해졌을 때 그는 나의 눈치를 살피면서 죄책감으로 인해 힘들다고 고백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크리스천으로서 지켜야 할 법을 자꾸 어기는데 그로 인해 늘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그가 가진 하나님의 이미지는 두렵고 엄한 분이었다. 사랑의 하나님을 소개하는 상투적인 위로는 그에게 뻔한 답변일 뿐 전혀 반가운 메시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이후 그 형제는 한량없이 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알게 되었고, 오랜 세월 족쇄와 같이 자기를 가두어온 두려움에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매우 고마워하였으며, 나는 그런 그의 행동에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보람도 잠시, 그는 기어이 하나님을 떠났다. 자기를 벌하시는 두려운 하나님이 아님을 알게 된 후, 신앙의 끈을 놓아버렸다. 이제는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서도 자유롭게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나는 가끔 딜레마에 빠진다. 율법적인 신앙으로 인해 고통 받는 이들에게 무작정 그런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말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말이다. 어떤이는 상담자에게 율법으로부터 해방을 주는 해방자의 역할을 강조한다. 물론 죄책의 감옥에 갇힌 자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두려움이 사라진 신앙은 경박스럽다. 죄를 범하고도 아무런 괴로움이 없다면 그 모습도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는다. 죄책감은 그 영혼이 아름답고 선하다는 표증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상담자로서 사랑에 대한 천박한 이해를 주어 곧장 그가 죄책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만일 누군가 죄책으로 인해 심각한 수렁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다면, 도리어 그 모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싶다.

하나님은 연약한 인간의 죄책감을 눈여겨보신다. 죄인이 겪는 감정은 도리어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하게 하는 접촉점이 될 수 있다. 사랑의 주님은 사함을 많이 받는 자가 더욱 많이 사랑한다는 역설적인 말씀을 남기셨다. 마르틴 루터가 극심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이에서 해방을 얻고자 노력해보지 않았더라면, 오직 은총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바울의 메시지를 다시 끄집어낼 수 있었겠나.

나는 오늘도 베드로와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내 머릿속엔 더러워진 발을 씻기시며 웃으시는 사랑의 주님과 자기 발을 내민 채 기뻐하는 사랑스런 제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또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이를 바라보며 ‘왜 그렇게 쓸데없는 일로 에너지를 소모를 하느냐’라는 눈빛이 아닌, ‘그 아름다운 죄책이 어떻게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할 통로가 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으로 그 자리에 동참한 나의 모습도 그려본다. 그리고 언젠가는 사랑의 하나님을 알고 자유를 누리며 떠나간 그 형제도 베드로의 옆에 서 있으리라.. 사랑의 주님 앞에 더러워진 발을 내어밀고 눈물로 씻김을 받는 한 형제의 모습도 함께 그려본다.

신앙과 가정(www.fff.or.kr)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