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구원을 말하다

루터, 구원을 말하다
권진호 | 신아사 | 296쪽 | 17,000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개혁교회 이룸’을 위해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을 함께 연구해야 합니다. 존 칼빈 사상의 근저에는 루터의 사상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루터와 칼빈의 유사성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칼빈파들은 사상의 근저를 왈도파에 두고 있음을 밝히는 사례가 종종 있습니다. 칼빈은 ‘신학 이룸’에서 루터의 사상에 얼마만큼 영향을 받았을까요?

마르틴 루터의 사상을 명료하게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아직도 원전이 편집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오늘 사과나무 한그루를 심겠다”는 문구의 시작이 마르틴 루터라고 합니다. 김동문은 스피노자의 저술에서 찾을 수 없으며, 또한 루터에게서도 확정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루터의 재발견>(복있는 사람, 2017)을 집필한 최주훈은 이 부분에 대해(3. 질문, 지구 종말과 사과나무) 상세하게 기술했습니다. 저는 최주훈 박사가 루터의 글에서 발견하진 못했지만, 독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꾸준하게 루터의 글을 읽으면서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루터의 칭의 이해에 대해서는 김용주 박사의 <칭의, 루터에게 묻다>(좋은씨앗, 2017)가 매우 좋은 저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최근 권진호 박사가 편집한 <루터, 구원을 말하다>(신아사, 2023)가 출판되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보강된 저술이 출판되었습니다.

김용주 박사의 <칭의 루터에게 묻다>는 조금 가볍게 읽을 수 있는(매우 전문적이지만), 권진호 박사의 <루터, 구원을 말하다>는 좀 더 심도 있게 발췌하여 편집했습니다.

다만 루터가 ‘칭의’에 대해 논의했다는 접근은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 할 사안이라 생각합니다. 앞에 ‘죄인을 의롭게 함’으로 무게가 이동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칭의’에서는 ‘의’에 대해 집중하지만, ‘죄인을 의롭게 함’에서는 ‘의를 주시는 하나님’께 집중된다고 생각합니다.

칼뱅 루터
▲(왼쪽부터) 칼뱅과 루터. ⓒ크투 DB
권진호의 <루터, 구원을 말하다>에서 루터는 그리스도를 “제사장과 왕”으로 규정하고 있는데(32쪽), 칼빈의 삼중직 이전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권진호는 루터에게 “낯선 죄”라는 어휘가 있다고 제시했는데(94쪽), 영문 자료에도 찾기 어려운 귀한 자료입니다. 발췌본이 루터의 본의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제한되지만 빠르게 이해하는 데 유익합니다.

루터의 방대한 저술을 읽고 파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발췌자들이 어떻게 발췌했는지 탐구 과정에 경의를 표하며, 조금 더 루터를 이해함으로 루터 원전을 읽으면서 루터에 대해 조금 더 심도 있는 이해들이 소개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루터의 구원’에 대해서 이해하기 위해서 김용주 박사의 <칭의, 루터에게 묻다>와 권진호 박사의 <루터, 구원을 말하다>은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루터 연구자들의 공통점은 루터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급하게 루터를 규정하지 말고 한국교회도 꾸준하게 루터를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루터와 칼빈의 유사성에 대해, 그리고 루터를 오해해서 정통 신학에서 벗어난 유형도 파악한다면 유익할 것 같습니다. 우병훈 박사는 루터의 ‘숨어계신 하나님’ 사상이 키에르케고르와 칼 바르트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했습니다(루터의 하나님, <한국개혁신학> 51권, 25쪽).

루터에 대한 자료를 읽으면서 우연히 <루터, 구원을 말하다>를 보게돼 구입했는데, 최근 저술이라 소개합니다. 한국 신학이 이제 성급하게 판단하여 규정하는 폐단에서 벗어나, 신중하고 사려있는 신학 담론이 형성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과정을 위해 마르틴 루터에 대한 좀 더 세심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송다니엘 목사는 마르틴 루터의 신학과 루터주의에 대해 명확하게 구분합니다. 어떤 연구자는 루터주의는 루터의 사상이 아니라고 명확하게 선을 긋기도 합니다.

개혁신학자들이 규정한 루터 이해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루터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을 속단하지 않고 신중하게 배려하면서 루터의 글을 읽고 판단한다면, 좀 더 깊이 있는 신학 산물이 한국에서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고경태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광주 주님의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