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한상화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가 지난 5월 4일 서울 양재 온누리교회에서 '젠더리즘,네오마르크시즘, 트랜스 페미니즘과 기독교'라는 주제로 열렸던 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 박사) 영성포럼에서 '트랜스페미니즘과 동성애'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글을 매주 1회 연재합니다.

한상화
▲한상화 교수
"결론적으로 말해서 개혁주의 신학전통에서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가 모두가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이라는 큰 테두리 속에서 그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그 하나님에게 문화의 가부장적 요소를 주입해서 이해하지 않는 한 언약신학 그 자체로는 여성에게 억압적 요소를 갖지 않는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유하게 하시는 분이며 그의 사랑과 공의로 모든 불의를 판단하시며 갚으시는 분이시다. 남성과 여성 모두 하나님께로 전향(메타노이아)할 때 비로소 참된 인간관계와 세계와의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여성 문제를 둘러싸고 가장 범하기 쉬운 위험성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적용이다. 하나의 사회, 정치적 운동을 위해 성경적 가르침을 적용 또는 심한 경우에는 왜곡시키는 것이 바로 성경의 이데올로기화이다. 우리는 앞에서 여성신학이 이러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리고 보수주의라 할지라도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으로부터 자동적으로 벗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오히려 안심하는 사이에 체제유지(status quo)를 위한 신학이 되어 성경의 가르침을 또 다른 형태의 이데올로기로 만들 위험성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화의 위험성으로부터 탈피하는 방법은 성경의 중심주제의 시각을 놓치지 않는데 있을 것이다. 성경은 인간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사역을 기록하고 있고 그 중심 주제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다. 이 복음을 위해 하나님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의 뜻에 따라 그의 종들을 부르시고 사용하신다. 여성들의 보다 활발한 교역의 참여도 그들의 동등한 권리를 찾기 위함이 아니고 복음사역을 위한 현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오히려 바른 기독교적 정신은 남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기에 여권주의의 세속적 성격은 걸러져야 한다. 오직 빌 2:3이하의 종의 정신에 입각해서 보다 활발한 복음전파를 위해 여성사역의 제한성에 대한 재고가 필요한 것이다. 성경의 성경적 적용 그것은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현 시대에 맞게 분별력 있게 이루어져 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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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본래 개혁주의의 만인 제사장의 원리는 여성도들도 제사장으로서 자격이 원칙적으로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성도들의 본질적 정체성을 규정짓는 말씀인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잘 나타나 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와 같은 성도의 본질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의 구별은 없는 것이다.

6. 만약 여성의 지도적인 위치가 문화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고 복음전파에 손상이 간다면 여성들은 복음을 위하여 뒤에서 섬겨야 한다. 그러나 만약 여자들에 대한 차별이 오히려 복음전파에 손상이 간다면 그것 또한 시정되어야 할 줄로 믿는다. 남자건 여자건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복음 안에서 자유자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모든 자에게 종이 된 것으로 여긴 것 같이 우리도 복음을 위해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7. 또한 전통주의자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여자들의 동등성을 인정하는 것이 곧 무질서를 의미한다는 생각은 만인의 동등성에 입각한 민주적 질서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기인한다. 한 사회에서의 질서는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과 그 사회 내에 존재하는 각각의 지위와 직분상의 서열에 따라 공정하게 대우할 때 세워지는 것이다. 남녀의 차별대우는 오히려 부자연스럽고 불합리한 문제들을 야기 시켜 혼란을 초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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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여성신학이 제기하고 있는 여성해방의 문제는 복음이 제시하고 있는 보다 더 근본적인 죄로부터의 구원의 길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의 사회 정치적인 영역에서의 적용도 보다 복음주의적이고 성경적인 방식으로 풀어 가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문제는 신학적 문제, 성경해석의 문제의 차원을 넘어서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상처받은 영혼들에 대한 치유 목회적 차원으로까지 승화시켜가야 하겠다."

20년 전의 상기한 논지들의 기본 입장에는 변함이 없으나 대한민국 사회 속에서 우리 민족 복음화를 위한 교회의 사명과 세계 선교를 위한 종으로써의 우리 민족의 선택이라는 주님의 대위임령 앞에 감히 한국 보수 교계 지도자들에게 호소하는 바는 여성 사역자들을 말씀의 권위에서 발생되는 참된 교권이 아닌 인습적 제도에 의해 강요된 인위적 교권의 쇠사슬로부터 해방시켜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성 지도력은 더 잘 개발되어야 하는 것이지 배제되면 안 되는 이유가 교회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여성들에 대한 각 영역에서의 사역의 필요성과 선교 적 사명 감당이 시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말씀과 소명과 은사에 따라 한국 교회 발전과 하나님 나라 선교를 위하여 활발하게 동역하도록 품어주기를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 주님이 한국 교회를 향해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연세대 교목이자 세계적인 개혁 신학자 정미현 교수의 논문 가운데 다음의 구절이 나옵니다.

"여성들은 교회목회직에서뿐 아니라, 신학교육의 장에서, 신학교수직에서도 배제되었다. 일례로 1997년 현재 우리나라에는 전국 신학대학 협의회에 속한 32개 신학교 가운데, 성서신학, 조직신학, 선교신학, 교회사 분야에서 여성교수가 있는 학교는 7개 대학뿐이다. 이와 같이 여성교수가 숫자적으로 절대적으로 부족할 뿐 아니라, 신학교육의 내용도 여전히 남성 중심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 현재 실정이다. 그러나 여성교수의 존재가 꼭 여성해방의 구조조정에 도움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강남순의 견해에 동의하는데, 그녀에 의하면 여성 신학적 시각이 결여된 여성교수가 신학과 목회현장에서 평등주의적 구조를 형성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여성교수의 존재로 인하여 남성 중심적 구조를 오히려 감추고 있게 되며, 둘째로 이러한 특권층의 소수 여성들이 여성 해방적 시각을 갖고 신학 하는 다른 여성신학자들과의 연대적 협력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신학대학교의 조직신학자로서 상기한 비판에 대해 인정하며 특별히 남성중심신학교육에 가담하여 모순과 부조리의 상황을 개혁하기 보다는 유지시켰다는 점에서는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정미현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여성 목회자들을 인정하고 더 많이 배출해야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신학교에서 더 많은 여성 신학자들이 임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성이 진보 진영에서 교수 활동 하는 것은 보수 진영에서 하는 것보다 아마도 더 공정한 특권을 누릴 수 있어서 훨씬 덜 고통스럽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한 사회 속에서 생물학적 성 차이로 말미암아 소수자로서 항상 짓누르는 주변인 의식과 약자의식과 싸워가며 하나님의 소명을 수행하는 고통을 감수하는 이유는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 주는 여성해방이라는 목적보다 더 크고 더 고상한 영혼 구원을 통한 하나님 나라 전파라는 기독교의 중심 진리에 더 우선적인 목적을 두기 때문이겠지요. 여하간 보수 신학자와 진보 신학자 사이에는 여성이건 남성이건 신학 방법론과 대상과 목적과 논제들의 우선순위 및 학자들의 유대관계의 장이 달라서 한 개인이 넘기 쉽지 않은 벽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학적 입장이 다를지라도 대화와 소통을 위한 장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고 실제로 연대적 협력을 거부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여성신학을 다룰 때 대부분의 자료가 진보 진영의 신학자들의 것이고 그러한 자료들을 다룰 때 최대한 공정하게 다루어서 귀한 통찰력들을 수용하지만 그것들은 한결같이 신학함의 목적을 여성해방에다 두고 성경과 문화 읽기의 해석학적 원리가 그 목적에 놓여 있기 때문에 개혁-복음주의 신학 입장에서는 많은 접점과 동의하는 점들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비판적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