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으로 접은 봉투를 주면서 엄마가 낮은 어조로 말했다. 조심해서 가야 한다. 뒤에 누가 오나 잘 살피면서. 신애信愛는 고개를 끄덕이고 누군가 볼세라 얼른 간단후꾸(簡單服)주머니 속에 봉투를 밀어 넣었다.

“재게 가거라. 밥은 엄마가 가지고 간다고 거기 썼다.”

신애는 동그란 눈으로 올려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엄마가 하얀 인조견 간단후꾸 어깨에 보리미숫가루 탄 물통을 엇가게 매 주었다. 원족 갈 때 설탕물 넣어가는 국방색 헝겊 씌운 양은 물통이었다.

신애는 뒤란에서 놀고 있는 동생들 몰래 얼른 대문 밖으로 나왔다. 대신 삽살개 평화가 쫄랑대며 따라 나왔다. 무서운 얼굴로 발을 구르며 쫓았다.

“안 돼. 들어가! 빨리 들어가!”

하얀 털실 인형 같은 평화가 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나서 신애는 좌우로 고개를 도리반거려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하늘은 코발트색 유리인 양 투명하였다. B29의 하얀 포물선도 보이지 않는다.

언덕 아래 가즈오(和男)네 집 마당은 빗자루로 쓴 듯이 비어 있었다. 까만 털이 자르르 흐르는 새끼 송아지만 한 셰퍼드도 어슬렁거리질 않는다. ‘가즈오는 경성엘 간 걸까…?’ 여름방학을 맞아 동경에서 온 가즈오를 이틀 전에 뒷동산에서 잠깐 보고 못 보았다. 반갑다는 그를 냉정히 밀어낸 것 같아 언짢은 마음이지만, 지금 신애는 그런 달짝지근한 생각에 마음을 쓸 계제가 아니었다.

눈썹 위로 가지런히 자른 단발머리 위에 신애는 들고 있던 챙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모자에 달린 빨간 헝겊 끈을 턱밑에 꼼꼼하게 매었다. 쨍쨍한 햇볕 속으로 걷기 시작하였다. 길엔 눈을 똑바로 뜰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금빛 햇살이 사정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눈이 부시어 신애는 속눈썹을 내리깔고 언덕길을 타박타박 내려간다.

돌담이 길게 둘린 보랏빛 도라지꽃밭은 온통 나비들이 한마당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파랑 노랑 하양나비들이 어우러져 신나게 윤무를 추고 있었다. 언제 보아도 진보라 색 도라지꽃밭은 그림에서 본 바다의 잔파도무늬 같았다. 그 아래 비탈진 밭에는 하늘로 날아오르는 비눗방울 같은 하얀 파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노란 장다리꽃 무리는 무더운 실바람에도 살랑살랑 손짓을 한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배어난 신애는 한길로 나갔다. 큰아버지네 약방을 지나 은행이랑 우체국이 있는 사거리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비단 가게와 그릇집이 있는 사거리 모퉁이에 있는 주재소로 막 일본 순사가 남루한 흰 옷 입은 남자 둘을 끌고 들어가는 게 보였다.

무슨 죄인인가, 식량을 훔친 배고픈 도둑인가, 조헤이(징병) 도피자인가. 괜히 가슴이 조마조마하여 신애는 급히 장터로 들어섰다.

오늘은 닷새마다 서는 장날인 모양이었다.

이십 리 삼십 리 근동 시골에서 쪽찐 여인네들이 목이 휘도록 광주리에 이고 온, 노란 참외랑 까만 점박이 개구리참외와 수박을 차려놓은 좌판은 색색으로 보기 좋았다. 찐 옥수수랑 찐 고구마 함지박 옆에는 흰 염소수염 달린 깡마른 노인이 열무단과 파 같은 김칫거리들을 주섬주섬 양회 포대 위에다 늘어놓고 있었다.

노란 참외를 골라 밀집 장바구니에 담고 있는 일본 여자의 모습을 힐긋 본 신애는 고개를 숙이고 잰걸음을 친다. 노인일지라도 일본 사람인 것이었다. 이곳에 사는 일인들은 거의 서로들 알고 있을뿐더러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조헤이 담당자인 이시가와(石川)를 모를 리 없을 것이란 생각에 떠밀려 신애는 강아지에게 쫓기는 병아리처럼 종종 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해의 뜨거운 열기만큼이나 장터는 붐비었다. 무명 수건을 머리에 두른 늙수그레한 떡장수 목판엔 노란 콩가루를 묻힌 인절미와 켜켜이 붉은팥을 얹은 무시루떡이며 풀잎 빛깔의 쑥 개떡이 정갈스럽고 먹음직스럽게 담겨 있다. 부끄러운 듯 턱밑이 팽팽하고 깨끗한 얼굴을 맨드라미처럼 왼편으로 꼰 새댁은 대소쿠리에 반반씩 담은 까만 콩버무리와 흰 백설기를 먼 희망인 양 아련히 바라보고 있다.

검게 탄 얼굴이 굵게 얽은 두부장수 아주머니 옆에는, 콩엿이랑 수수엿 담은 나무쟁반을 어린아이처럼 보듬어 안고 있는 귀밑에 팥알만 한 사마귀가 달린 새댁이 손사래로 파리를 쫓고 있었다.

국수 파는 아낙네는 땀이 많아 세수수건을 머리에서 양 귀밑으로 늘어트리고 장국밥의 고깃국이 끓는 뜨거운 솥 옆에서 연신 갈잎 부채질을 하고 있다.

그 건너편에는 아랫니가 빠진 할머니가 비빔국수에 넣을 고추장 양념 뚝배기를 정성스레 휘젓고 있다. 구부정한 허리에 지게를 지고 일거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노인에게 그 할머니는 어서 와서 맛난 국수를 자시라고 냅다 인심 쓰는 소리로 손짓을 한다.

조금 지나니까 짚으로 엮은 열 개들이 계란꾸러미 세 줄을 땅바닥에 놓고 소학교 일 학년쯤 돼 보이는 얼굴에 버짐 핀 계집아이가 옹크리고 앉아 있다. 땟국이 흐르는 옷에 배고픈 얼굴이었다.

그 옆에 도토리묵 장수가 쪼그리고 앉아 곰방대를 볼이 움푹 패도록 빨고 있다. 조금 지나니까 새까맣고 쪼글쪼글한 할머니가 머리에 수건도 쓰지 않은 맨 얼굴에 줄줄 땀을 흘리며, 숯불 위에 뒤집어 놓은 무쇠 솥뚜껑에 들기름을 넉넉히 둘러 녹두 지짐이를 부치고 있었다. 고소한 들기름 내가 허기진 장터에 서글픔처럼 휘돌았다.

신애는 급히 왼편 쪽 좁다란 골목으로 들어섰다. 얼개 빗이며 참빗이랑 뒷머리 보는 손거울들 옆으로 인두, 부젓가락, 부삽, 싸리조리, 나무주걱들을 오밀조밀 가지런히 늘어놓은 좌판을 들여다보고 있는 가즈오 엄마를 보게 되었다.

재빨리 신애는 골목을 빠져나왔다.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인 것이었다. 더워서인지 위압적인 국방색 옷에 긴 칼을 찬 일본 순사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신애는 우牛시장 쪽으로 발길을 돌리었다. <계속>

김녕희 작가
<현대문학>으로 등단, 한국소설문학상·조연현문학상·만우문학상·PEN문학상 등 수상, 단편소설집 <고독한 축제> 등, 장편소설 <에덴의 강>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