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태흔 목사(엘림코뮤니오).
19세기 활동했던 남태평양 군도(群島)의 선교사 존 윌리암스(John Williams)는 런던 선교회가 더프호를 남태평양으로 출항시킨 1796년 영국의 신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국의 노동자 계급이 모여 사는 토텐햄 하이크로스에서 자라면서 찬송가와 기도서를 만들 정도로 열정이 있었다. 그러나 사춘기로 접어든 14세 철물상 점원이 되면서부터, 마음 속에 있던 뜨겁고 순수한 신앙을 모두 버리고 불량 소년이 됐다. 그러나 하숙집 주인의 부드러운 관심과 인도로 올드 휫트필드 교회에 출석하게 됐고, 18세 때 극적인 회심을 경험한다.

이후 그는 무시로 전도하면서 교회학교 교사로 열심을 다해 봉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본 교회 담임목사 매튜 윌크스(Matthew Wilkes)가 예비 선교사 후보생들을 초청해 선교에 관한 특별한 강의를 개설했다. 그때 초청받은 존은 강의에 감동을 받아 권위있는 런던 선교회에 곧바로 지원했다. 당시 존은 어린 나이였고, 해외 선교사로 훈련받은 적도 없었다. 그러나 남태평양 선교 강화를 위해 많은 선교사가 절실히 필요했고, 그는 매우 성실한 신앙의 청년이었기 때문에 선교회는 그의 입회를 전격 허락했다.

1817년 그는 선교를 이해하는 메리 쇼너와 결혼해 곧바로 타히티 근처 소시에테 남양제도를 향해 처음으로 사역을 떠났다. 선교사 윌리암스 부부는 남태평양에 도착하자 마자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타히티 근처 작은 섬 모레아에서 1년간 머물렀다. 이후 13년 동안 선교해야 할 후보지인 라이아테아 섬으로 옮겼다. 그곳은 인신 제사와 유아 살해, 그리고 매우 난잡한 성 문화가 인습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존은 양심에 화인맞은 듯한 비윤리적인 주민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지 심하게 고민했다. 타문화권 선교 훈련을 전혀 받지 않고 급히 파송됐기 때문에 적절한 방법을 강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릎을 꿇고 눈물로 기도하던 중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다. 매우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서구의 문명을 복음과 함께 전하라는 말씀이었다. 또 그 섬 사람들은 대부분 게을러 섬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보트를 만들지 않고 불편한 대로 지내고 있었다. 부지런히 사탕수수를 재배하면 나름대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는데도 전혀 그 부분에 손을 대지 않고 빈둥거리고만 있었다.

그래서 존은 그들에게 보트 만드는 기술과 사탕수수 재배 방법을 가르쳐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인쇄소를 만들어 누가복음과 그들의 신앙생활을 위해서 반드시 읽어야 할 기초적인 책들을 출판했다. 동족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회심한 원주민 기독교인들에게 전도 사역을 맡겼다. 선교에 관한 훈련이 매우 부족했고 기독교인으로서 삶이 성숙하지 못해 여러 어려운 장애에 부딪혔지만, 존보다 그들이 자신의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섬이 복음화 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개척자 정신이 매우 강했던 존 윌리암스는 라이아테아 이외의 다른 군도에 살고 있는 영혼들이 죽어가는 것을 그냥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다. 유산으로 물려 받은 부동산을 팔아 군도 사이를 항해할 스쿠너 한 척을 구입했다. 그 배로 남양에 있는 많은 섬들을 하나씩 탐험하기 시작했다. 약 11년 동안 라로통가섬, 그보트로타히티섬, 새비지섬, 프랜들리제도, 사모아섬 등을 탐험하면서 곳곳에 군도의 선교를 위한 지부를 세웠다.

1837년부터 그는 바울 사도처럼 이미 섬에 세운 선교 기지를 반대로 순회하고 교회의 상황을 점검하면서 도움을 줬다. 그러나 1839년 그의 동료인 제임스 해리스와 에로망가에 있는 딜론만에 상륙했다 원주민들에게 붙잡혀 아무 이유 없이 살해되고 말았다. 얼마 전 영국기를 달고 상륙한 배의 승무원들이 섬 사람들에게 잔혹한 행위를 한 것에 대한 보복을 존 윌리암스에게 했던 것이다. 그의 유해(遺骸)는 크로커 선장이 거둬 사모아우폴로섬에 묻었다.

존 윌리암스에 대한 비극적인 사망 소식은 국제적으로 크게 알려졌고, 모든 교회들은 애도를 표했으며 청년들 수십명이 그의 뒤를 잇겠다고 헌신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존은 수준 높은 교육도 받지 못한 노동자 출신이었고, 남양제도의 선교를 위한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선교사역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안위가 아닌, 오직 원주민 공동체의 복지만을 생각하며 열심히 사역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 1837년 4월에 출판한 책 는 전문적 지식을 가진 학자들은 물론 과학자들마저도 그것의 정교함에 찬사를 보냈다. 그의 책은 지금까지도 태평양 군도(群島)를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지리적, 과학적으로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세종시 문제로 정치권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요즘, 국가와 민족, 그리고 세종시와 관련된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한번 더 생각하는 성숙한 자세가 필요한 것 같다. 당리당략이나 개인의 정치적 계산으로 세종시 문제를 다뤄서는 아니된다. 19세기 남양제도의 선교사 존 윌리암스의 이타적 삶이 우리나라 정치권에도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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