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포항 아름다운 고백교회
일시: 2023년 4월 23일
본문: 시 19:14, 엡 5:4

기독교학술원 이사장 취임식
▲설교를 전하는 김명혁 목사. ⓒ크투 DB
제가 아주 좋아하는 제목인 ‘미언 오언: 고미사뭘보의 아름다운 삶’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무슨 말을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습관과 인격과 운명이 정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 사도 바울은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 5:4) 라고 권면했습니다.

성경은 마음과 중심을 중요하게 보지만 동시에 입술의 말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우리들이 말 한 마디를 잘못하므로 성령님을 탄식하시게 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을 시험에 빠지게 할 수도 있고 자신의 운명을 망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말 한 마디를 잘 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을 절망에서 소망으로 이끌 수도 있고, 자신의 운명을 복되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미언 오언: 고미사뭘보의 아름다운 삶”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첫째로, 가장 아름다운 말은 “고맙습니다!” 감사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말은 아무리 많이 해도 싫증이 나지 않는 아름다운 말입니다. 감사를 가슴과 입에 지니고 사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누가 “고맙습니다!” 라는 말을 자주 합니까? 나의 존재와 나의 삶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 때문이라고 깨닫고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이

“고맙습니다!” 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존재와 나의 삶이 부모님과 형제 자매들과 교회와 성도들과 사회와 이웃들의 사랑과 도움 때문이라고 깨닫고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이 “고맙습니다!” 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우리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자주 할 때 그 말을 하는 사람도 그 말을 듣는 사람들도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을 지니게 됩니다. 우리 자신의 지 정 의에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이 채워지고 우리 자신의 습관과 기질과 세포와 DNA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고맙습니다!” 라는 말을 자주 할 때 근심 걱정, 원망 불평이 사라지고 기쁨과 즐거움이 생기고 어두움과 불행이 사라지고 밝음과 행복이 생기게 됩니다.

아마 다윗처럼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많이 한 사람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시 9:1).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시 30:12). “내가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많은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35:18). “내가 영영히 주께 감사하고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시 52:9).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57:9).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무리 중에서 찬송하리니”(시 109:30).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시 139:14).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9:15).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9,10).

사도 바울은 입을 열면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 라고 고백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심지어 극심한 영적인 절망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4,25). 너무너무 놀라운 일입니다. 감사는 영적인 절망 가운데 있는 우리들에게 소망과 승리를 가져다줍니다.

하나님께 대한 고마움과 감사가 넘치면 넘칠수록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도 넘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편지를 쓸 때마다 여러 교회와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과 교제와 수고와 도움에 대한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골 1:3-5).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살전 1:2,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빌 1:3-5).

결국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그리고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한 가장 행복하고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가장 아름다운 말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말은 모두를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만듭니다.

둘째로, 가장 아름다운 말은 “미안합니다!”라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회개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안합니다!” 라는 말은 아무리 많이 해도 싫증이 나지 않는 아름다운 말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모두 불완전한 죄인들이기 때문에 “미안합니다!” 라는 말을 하고 또 해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미안함”과 “죄송함”을 가슴과 입에 지니고 사는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하고 부드럽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라는 말을 자주 합니까?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나의 존재와 나의 삶이 실수와 허물과 죄로 가득한 부끄러운 존재와 삶이라는 사실을 바로 깨닫고 느끼고 고백하는 사람이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라는 회개하는 말을 자주 합니다. 의인들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 말을 할 수도 없습니다. 죄인들이 그런 말을 자주 합니다. 뻔뻔한 사람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 말을 할 수도 없습니다. 진솔한 사람이 그런 말을 자주 합니다.

우리가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라는 말을 자주 할 때 그 말을 하는 사람도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사람들도 감동과 눈물과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지니게 됩니다. 우리가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자주 할 때 우리 자신의 지 정 의 언 행에 감동과 눈물과 부드러움과 따뜻함과 온유와 겸손이 채워지고 우리 자신의 습관과 기질과 세포와 DNA에 아름다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미안합니다!” 라는 말을 자주 할 때 분노와 증오가 사라지고 그 대신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기운이 솟아나게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라는 말과 고백은 우리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향해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탕자의 운명이 바뀌어졌습니다.

아버지가 달려와서 그를 끌어안았습니다. 눅 7장에 나오는 죄인인 한 여자가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라는 말도 못하고 그저 눈물을 쏟으면서 울기만 했을 때 그녀의 운명이 바뀌어졌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죄인인 그 여인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 7:48,50).

아마 다윗과 사도 바울처럼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라는 말을 많이 한 사람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다윗과 사도 바울은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라는 말을 계속해서 하면서 맨날 울었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 6:6).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 32:5).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3,5).

“우리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고전 4:13).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가장 아름다운 말은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라는 말은 모두를 감동시키고 모두를 울게 만듭니다.

한국교회의 아버지 길선주 목사님과 제주도 복음화의 선구자 이기풍 목사님과 한국교회의 무디 이성봉 목사님과 한국교회의 예레미아 김치선 목사님과 만인의 존경을 받던 한경직 목사님은 하나님 앞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고 또 말하면서 자신들의 부끄러운 죄를 눈물로 고백하고 또 고백하므로 하나님과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그래서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말은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라는 말은 모두를 감동시키고 모두를 울게 만듭니다. 모두를 살립니다. “고맙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미안합니다” 라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은 소통이 잘 되는 사람이고, “고맙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미안합니다” 라는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소통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가장 아름다운 말은 “사랑합니다”라는 사랑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합니다” 라는 말은 아무리 많이 해도 싫증이 나지 않는 아름다운 말입니다. “사랑합니다” 라는 말보다 더 귀중하고 더 아름다운 말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아마 다윗과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처럼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많이 한 사람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다윗과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은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계속해서 하면서 자기들의 삶을 사랑의 제물들로 바쳤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시 31:23).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시 109:4).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마음에 부은바 되었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기를 강권해서 자기는 모두를 사랑하는 사랑의 노예가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 5: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골 3:14).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고전 16:22). 결국 사도 바울은 예수님 사랑에 미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지극하게 받은 사도 요한이야말로 하나님 사랑과 예수님 사랑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입을 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예수님은 사랑이시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라는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에서 사랑이란 말을 수 없이 사용했습니다. 여섯 절에서 사랑이란 말을 15번이나 사용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 4:7-12).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넘치면 넘칠수록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넘치게 됩니다. 다윗은 모두를 사랑하며 모두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시 109:4).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사울 왕에 대해서도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사울 왕이 전쟁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옷을 잡아 찢으면서 울었다고 했습니다.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을 인하여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삼하 1:11,12).

사도 바울은 편지를 쓸 때마다 여러 교회와 여러 성도들에 대한 사랑과 사모의 마음을 고백했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 2:17).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빌4:1).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살전 2:8).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9,20).

문제투성이였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한 사랑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고전 10:14).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고후 12:15).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사랑을 최고로 예찬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1,2).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사랑을 지니지 못한 목회나 선교나 구제는 참된 목회와 선교와 구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목회자와 선교사는 참된 목회자와 선교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이야말로 모두를 사랑한 사랑에 미친 참된 목회자요 선교사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배타적이고 비판적이고 위선적이고 독선적인 죄인 중의 죄인이지만 부족한 저도 주님과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사랑할 수는 없을 까 생각하면서 이곳 저곳으로 달려가서 사랑의 손길을 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고 싶어라’는 제목의 글을 쓴 일도 있었습니다. 그 글을 인용합니다.

“사랑하고 싶어라. 나는 요사이 주님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한 평생 나를 향하신 주님의 생각과 사랑이 어찌 그리 크고 어찌 그리 많은지! 실로 모래알보다 더 많은 주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나의 가슴에 눈물을 자아낸다. 사랑하고 싶어라.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는 요사이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어린이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너무너무 귀엽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너무너무 예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 세상 곳곳에 흩어져 사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날 때도 비슷한 느낌을 가진다. 저들의 얼굴과 마음과 영혼 속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고귀한 인성과 신성의 흔적을 보기 때문이다. 저들을 모두 사랑하고 싶어라. 모슬렘도 공산주의자도 상관이 없다. 저들은 모슬렘이나 공산주의 라는 불행한 유산에 쌓여있는 가련한 영혼들일 따름이다. 랑하고 싶어라.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2007년 1월 3일 아침 교회로 운전하며 오는 차 속에서 쓴 글)

넷째로, 가장 아름다운 말은 “뭘 해 드릴까요?”라는 사랑과 섬김과 봉사의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뭘 해 드릴까요?” 라는 말은 아무리 많이 해도 싫증이 나지 않는 아름다운 말입니다. 누가 “뭘 해 드릴까요?” 라는 말을 자주 합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아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입니다. 결국 사랑과 섬김과 봉사의 손길을 펴고 싶은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사랑을 입은 다윗은 하나님께 “뭘 해 드릴까요?” 라고 물으면서 이런 소원과 기도를 아뢰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케 하소서”(시 143:10). 결국 다윗은 평생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상하고 통회하는 눈물의 제사를 드렸고 그리고 모두를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며 사랑했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 6:6).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시 109:4).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후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사랑을 입은 다음부터 평생 “뭘 해 드릴까요?” 물으면서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면서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으며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31-33).

자기의 삶의 소원과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거듭해서 고백했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 그리고 우리들도 그렇게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 5:10).

결국 사도 바울은 주님의 지시를 따라서 그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이방인들의 소리를 따라서 이곳 저곳으로 달려가서 주님께서 원하시고 이방인들이 원하는 대로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었습니다(행 16:7-10).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행 20:24).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고 이방의 교회들을 위해서 괴로움과 고난을 받아도 피를 쏟아 제물로 드려도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 2:17,18).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과 누군가를 위해 “뭘 해 드릴까요?” 라고 물으면서 사랑과 섬김과 봉사와 제물 되는 삶을 사는 삶만큼 귀중하고 아름다운 삶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주님, 내가 뭘 하며 살아야 할까요?” 라고 물으면서 평생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주님과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손양원 목사님은 버림받은 나환자들에게 모든 사랑과 정성을 다 쏟아 부으면서 살았고 자기 두 아들을 죽인 마귀새끼 같은 안재선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품으면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축복된 삶을 살다가 주님 닮은 순교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자기를 위해 산 삶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자기 자리와 자기 명예를 위해서 산 삶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 그리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뭘 해 드릴까요?” 라고 물으면서 회개와 감사와 섬김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리고 모두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섬김과 봉사의 손길을 베풀면서 제물 되는 삶을 사는 삶만이 영원토록 빛나는 아름다운 보석과 같은 삶일 것입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이지만 저도 신앙의 선배님들을 따라서 사랑과 섬김과 봉사와 제물 되는 삶을 살기를 소원하며 다음과 같은 소원과 기도의 글을 쓴 일이 있는데 그 글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저의 모든 죄악을 주님의 피로 도말시켜 주시옵소서. 저는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지극히 작은 자들과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지시고 찾아가서 어루만지시며 돌아보신 것처럼, 저도 작은 교회들을 찾아가서 위로와 격려의 손길을 계속해서 펴게 하시고 그리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위로와 격려의 손길을 펴게 하시옵소서!

저는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사도 바울과 주님의 제자들을 본받아서 그리고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을 본받아서 주님과 누군가를 위해서 특히 고통 당하는 북한 동포들과 모슬렘 형제들을 위해서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하시옵소서! 미움과 분노와 증오가 있는 곳에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심고 분열과 갈등과 대결이 있는 곳에 화해와 일치와 평화를 심는 작은 거름과 씨앗이 되게 하시옵소서!

유창한 설교나 심오한 신학강의를 하기 전에 주님이 지니셨던 긍휼의 눈물을 지니게 하시고 주님께서 품으셨던 사랑의 심장을 지니게 하시고 주님께서 지니셨던 죽음의 흔적을 지니게 하시옵소서! 죄인 중의 괴수가 주님께서 흘리신 대속의 피와 순교자들이 흘린 충성의 피를 의지하며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인자와 사랑을 의지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한국교회와 한국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북한동포들과 일본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아멘!”(2011. 3. 29).

다섯째로, 가장 아름다운 말은 “보고 싶습니다”라는 그리움의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보고 싶습니다” 라는 말은 아무리 많이 해도 싫증이 나지 않는 아름다운 말입니다.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은 주님이 보고 싶고 성도들이 보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고전 13:12).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1.23,24). “우리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2). “그의 종들이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계 22:4).

사도 바울은 또한 성도들이 보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살전 2:17).

주님이 보고 싶지도 않고 성도들이 보고 싶지도 않은 목회자들과 신자들은 참으로 무정하고 불행한 목회자들과 신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 그리고 성도들과 그 누군가를 향해 “보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할 때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변화될 것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보고 싶어지는 사람들”이라는 글을 쓴 일이 있는데 그 글을 줄여서 인용하므로 “보고 싶습니다” 라는 아름다운 말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보고 싶어지는 사람들이 생각났다. 어머니와 아버지와 어린 아들 철원이를 비롯해서 보고 싶어지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중에 몇 사람들의 이름만 적어본다. 우선 박윤선 목사님이 보고 싶어진다. 가식과 꾸밈이 없는 분이었다… 나는 장경재 목사님이 보고 싶어진다. 그분은 착하신 분이었다… 나는 한경직 목사님이 보고 싶어진다. 그분은 약하고 겸손하고 부드럽고 착하신 분이었다… 나는 김치선 목사님이 보고 싶어진다. 그분은 내가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 나에게 깊은 신앙적인 감화를 끼치신 분이다… 나는 이성봉 목사님이 보고 싶어진다.

그분은 내가 중학생 시절, 내가 홀로 월남하여 대구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시절, 나의 감성과 지성과 의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분이었다… 나는 강원용 목사님이 보고 싶어진다. 그분은 폭 넓은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가진 분이었고 모두를 품고 아우르는 넓은 분이었다… 나는 이중표 목사님이 보고 싶어진다. 이목사님은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벗어버린 순수하고 착한 분이었다.” (2007.10.22 저녁).

저는 최근에 세 분이 또 보고 싶어진다는 글을 추가해서 쓴 일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정진경 목사님이 보고 싶어진다. 그분은 온유와 겸손과 포용과 격려와 칭찬의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모두를 품는 넓으신 분이셨고 욕심이 없는 깨끗하신 분이셨고 한국교회와 남북을 사랑하신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스승이셨다… 나는 지금 옥한흠 목사님이 보고 싶어진다. 옥한흠 목사님은 진실하고 철저한 분이었다. 진실함이 사라져가는 이때 나는 옥한흠 목사님이 너무너무 보고 싶어진다… 나는 지금 방지일 목사님이 보고 싶어진다. 그 분은 순수함과 섬세함과 정확함과 따뜻함과 함께 눈물의 영성을 지니고 모두에게 따뜻한 손길을 펴면서 사신 분이었다.”(2015.9.12 저녁)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오늘 아침 “미언 오언: 고미사뭘보의 아름다운 삶” 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포항 아름다운 고백교회 교역자들과 성도 여러분들을 사랑하면서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귀중하고 아름다운 말을 하는 귀중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미언 오언”은 “아름다운 말 다섯 마디” 라는 말이고 “고미사뭘보”는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뭘 해드릴까요, 보고 싶습니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가슴과 입에 아름다운 생각과 아름다운 말들을 채워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포항 아름다운 고백교회 교역자들과 성도 여러분들이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뭘 해 드릴까요?” “보고 싶습니다.” 라는 귀중하고 아름다운 말을 자주 하면서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며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