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새해
▲과거 새해 동해 일출. ⓒ크투 DB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 12:50)”.

여기서 예수께서는 가족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밝히십니다.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막 3:21)”는 말씀처럼, 가족들은 예수를 미쳤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곧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려는 자를 ‘가족’이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가족관계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대로 살려는 자에게서 더 깊은 결속감과 따뜻함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모르는 가족보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과 더 친밀하셨습니다.

2022년 임인년(壬寅年)이 지나가고, 2023년 계묘년(癸卯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해는 ‘검은 토끼의 해’라고 합니다. 토끼는 예로부터 온순하고 얌전해 사회 적응이 빠르고, 사람들에게 호감을 많이 얻어 사회생활을 비교적 잘하는 성격이라고 합니다. 또 착한 성품에 유머가 풍부해 예능 방면에도 재능이 많다고 합니다.

소심함보다 외향적 성격을 타고나는 사람이 많으며, 낙천적 성격이라 항상 주변에 사람이 많으며,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재주도 있다고 합니다.

단점으로는 인내심과 끈기, 지구력이 약한 면입니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을 하다 보면 생각과 달리 빨리 끝내고 싶어 일을 그르칠 수도 있고 별 것 아닌 일에도 화를 내지만 장점이 더 많다는 것은, 토끼띠 사람들의 성향이 주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100% 다 맞다고 볼 수 없고 인간 사회에서 흔히들 통계학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이지, 결코 그것들을 믿고 의지해서는 안 될 것이며 무던한 자신의 의지와 노력만이 얻을 수 있는 비결일 것입니다.

해마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평소 하늘에 잘 떠 있는 ‘해’는 외면하더니, 새해 해오름(일출)을 보기 위해 전날 밤부터 난리법석을 떠는 것을 보면 참으로 민망하기도 합니다. 평소 ‘해’와 새해 아침에 떠오르는 ‘해’는 무엇이 그리 차이가 날까요?

물론 지난해는 잊고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축복을 기대하는 마음은 좋지만, 그 ‘해’를 쳐다보며 빌기라도 한다 해서 무엇이 그렇게 달라질까요? 괜한 헛고생만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미래 불확실한 삶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공포 때문에 먼 곳 까지 찾아가 해맞이 행사를 하는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고, 시간 낭비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새해 아침은 참으로 신선하고 맑고 아름답습니다. 또한 청아하고 온유하며, 인간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웅장하고 장엄한 호흡입니다. 아침 맑은 해를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우선 지난해 과오를 회개하는 아름다운 속량을 우선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고요한 아침 먼동을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든 군중 안에는 숱한 사연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들의 소원들은 제각기 다릅니다. 부자가 되게 해달라거나 아들 딸 대학입시 합격에 대한 염원, 병을 고쳐달라는 소원, 다양한 골칫거리에 대한 해결을 기원, 권력이나 승진에 대한 망원 등.

모두 각자의 문제를 가지고 나와 비는 소원이 참으로 안타깝기도 하지만, 세상 어떤 물체나 형상에 빌고 절해봤자 아무 소용 없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옛부터 내려오는 풍습과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실로 안타깝습니다.

사람들은 강하고 담대한 척 하지만, 아주 나약한 미물보다 못합니다. 어찌하여 바른 정답을 회피하고 아무 쓸모 없는 곳에 호소하고 빌고 온 정신을 맡기는 어처구니없는 바보 같은 짓을 스스럼없이 자행하는지요.

어두컴컴한 밤 밖에 칼바람이 휘몰아치고 아무도 없이 혼자 집을 지키고 있을 때, 아이는 불안과 공포 속에 엄마가 어서 속히 집에 돌아오시기를 기다립니다. 마음과 눈의 시선은 줄곧 대문을 향합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방 한구석 호롱불 밑에서 집을 지키는 아이는 어디에 신경을 곤두세울까요? 초점은 호롱불도, 방안에 있는 모든 기구들도 아닙니다. 아이에게는 오롯이 어머니가 오셔야 무서움과 두려움, 그리고 짙은 공포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이 칼럼의 핵심입니다. 아이는 어머니가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아이의 구원은 어머니에게 있습니다. 잠시 후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이는 반가움에 “엄마!” 하고 큰 소리로 부르며, 두려움과 공포 속에 지냈던 조금 전과 완전히 다른 세계로 전환됩니다.

이제 자신을 구원할 어머니가 오셨기에, 무섭지 않습니다. 여태 한쪽 방구석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잔뜩 겁에 질렸던 잠시 전 모습과 전혀 달리 자신에 찬 당당한 모습으로, 이제 귀신이라도 때려잡을 기세로 든든한 어머니만을 믿고 있어 두려움에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어머니” 하고 부르면, 세상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엄마만 있으면 안심이 되고 행복할까요? 어머니와 아이들 간의 관계성 때문입니다.아이들에게 의지가 되는 엄마라는 존재가 지금 내 곁에 있기에, 상황은 그대로이지만 그대로가 아닌 것처럼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엄마가 내 곁에 있느냐 없느냐가, 거센 바람이 부느냐 고요하냐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니, 그것이 채워지면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인 것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어떤 관계여야 할까요? 배를 움켜잡으며 아프다고 뒹구는 아이는 어머니의 손끝이 배에 닿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울음을 그치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놉니다. 예수님 손이 닿자 그토록 아프던 배가 치유를 얻어 금세 환한 웃음으로 변하는 아이의 청순한 모습에는,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을 차지하지 못한다는 주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새해도, 언제나 그랬듯 요란한 공포 속의 밤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이가 엄마를 믿고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르고 애쓴다면 오늘 아이가 엄마를 만나서 당당해지는 것처럼, 주님을 향해 우리는 부르짖고 당당하게 맞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지만,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를 도우십니다. 병이 낫거나 물질을 얻는 일에 있어 해와 달 같은 어떤 형상을 따라다니며 비는 자들은 외면하시고, 오롯이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에게 반드시 역사를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새해에 떠오르는 해를 찾아 소원을 빌러 가는 모습은 이제 사라져야 하겠습니다. 그저 자연의 아름다운 해를 보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거기에 절하며 소원을 맡기는 일은 이제 근절돼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만이 행복한 소원을 쟁취하며 살지 않을까요?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