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신화 성공신학
16세기 종교개혁 성패의 핵심
개발 시대 한국의 개신교 역량

조용기
▲천막교회 시절 조용기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성공신화 성공신학

지방도시의 한 중소형 교회 목회자가 서울의 한 대형교회 설립자의 일화를 자기 설교 중 예화로 쓰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설립자 목사가 빈한한 개척목회 시절 친구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함께 어려웠던 그 친구가 여전히 낡은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보고 최신형 자동차를 깜짝 선물로 희사했다는 성공 스토리에 큰 감명을 받았다는 설교였다.

마치 엘비스 프레슬리나 오프라 윈프리의 성공 스토리를 연상시키는 이런 일화는 요즘 성도들이 듣기엔 좀 어려울 수 있다. ‘증여세는 잘 냈는지?’, ‘그 대형교회 목회자는 대체 어디서 그런 돈이 났는지?’ 따위의 생각들이 대번에 먼저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예화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목회자는 고(故) 조용기 목사가 아니다. 조용기 목사처럼 원로목사 중 한 사람이다. 한국교회 원로들의 미담은 이렇게 자기 미담이 사라져갈 때, 함께 사라져가고 있다.

이들의 성공은 비단 개인적인 친구에 대한 보은뿐 아니라 교계 곳곳에, 그리고 사회복지라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던 시절의 한국 사회 곳곳에 ‘보이지 않는 손’의 흔적으로 남아 있을테지만, 대부분 이 손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적어도 받은 당사자들이라도 말이 있어야 할 텐데, 이들마저 입을 다물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받은 것이라고 말들 하는 모양이다. 성경은 이런 심성을 가리켜 코르반(Κορβᾶν)의 위선이라 가르친다.

루터
▲독일 드레스덴에 있는 마틴 루터의 동상. ⓒpixabay
종교개혁 성패의 핵심

16세기 종교개혁의 성패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지만, 개혁을 지속 가능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요인은 자유 상공인들이 추구하는 이념의 뒷받침이었다.

군주가 수틀리면 하루 아침에 재산을 몰수하던 유럽의 정서 속에서 가장 먼저 상공인의 사유 재산을 법이 보장하도록 확립한 나라는 다름 아닌 네덜란드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 혁명과는 달리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중산층 사회로 이행한 혁명을 통칭 ‘명예혁명’이라고 부르는데, 영국에서 이 혁명이 일어나기 100여 년 전에 이미 이런 제도화가 일어났으며, 그 시기는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50여 년이 경과한 시점이었다.

대다수가 개신교와 가톨릭의 가장 큰 차이점을 교리적 차이로 알고 있지만, 진정한 차이는 사유재산 제도에 있다.

가톨릭은 ‘천국의 열쇠’가 베드로 개인에 주어졌다는 교리를 통해 하나의 단일 교회가 모든 재산권을 행사하지만, 개신교는 베드로 개인이 아닌 베드로라는 ‘이름(반석)’에 그 열쇠가 주어졌다는 해석을 통해 단일한 교회가 아닌 모든 개별 교회가 재산권을 소유한다.

그런 점에서 자유 상공인 이념과 개신교의 이념은 완전한 결합체라 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본질인 자유민주주의가 오로지 개신교 국가에서만 그 이상을 제대로 펼쳤던 전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개신교 목회자는 가톨릭 사제와는 그 본질상 차이가 있다. 자유 상공인들의 성직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자유 상공인 즉 재산권을 소유한 자본적 분위기가 풍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반 자유민주주의 또는 공산/사회주의에 숙적(宿敵)하는 자유의 사도, 자유 상공인들의 기수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교회의 수입원 중 하나인 십일조는 사실 사회에서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잉여에 불과하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문재인 정부는 식당만도 못한 방역정책을 교회에 적용할 것이다.)

그러나 이 잉여의 위력은 자본주의 사회가 지불하는 그 어떤 비용보다 강력한 체제 유지비로서의 역량을 감당해 왔는데, 그것은 이들 자유상공인이 어느 누구의 간섭을 받지 않고도 자발적 각출을 통해 자신들의 가치인 자유의 심볼로서 교회를 수호해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가 세금으로 유지되는 (루터의 후예인) 독일 교회보다도 강력한 개혁의 위용을 보전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조용기
▲인터뷰하고 있는 조용기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개발 시대 한국 개신교의 역량

고(故) 조용기 목사는 이런저런 가십에도 불구하고 그 자격이 충분한데, 우리나라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가난한 자유 상공인들이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꿈과 희망을 불어넣음으로써 시대의 사명을 완주했기 때문이다.

특히 ‘삼박자 구원’으로 통칭되던 ‘오중복음 삼중축복’이라는 슬로건에 대해 ‘신학이 아니다’라느니 ‘기복신앙이다’라느니, 공부 많이 하고 실력 있는 기독교인 중심으로 끊임없는 문제제기가 있었으나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자고로 ‘예수쟁이’라는 말은 가톨릭 교도가 아닌 개신교인을 일컫는 호칭이었다는 사실을.

개신교가 초기 우리나라에 들어올 당시 주로 양반들 중심으로 유포되었던 가톨릭과는 달리 자유 상공인 중심으로 전파되었기 때문에, 경멸의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었다는 사실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명칭이 경멸의 의미로 붙여졌던 것을 감안할 때, 참된 복음과 개혁의 호칭이었던 셈이다.

1인당 25만원을 지급받는 위상을 자랑하게 된 복지 한국에 서식하게 된 개신교는 이제 고상하게 거듭나는 중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눈으로 회고할 때 ‘삼박자 구원’을 빨간 십자가 가방에 넣고 전도하러 다니던 여성 전도자들이 부끄러울 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 요한삼서 1:2

이영진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홍성사)', '영혼사용설명서(샘솟는기쁨)',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 등의 저서가 있다.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 전공 주임교수 | 크리스천투데이 칼럼니스트.
월간 《월드뷰》 편집위원 및 편집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며, 연구 저서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홍성사),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사용설명서》(샘솟는기쁨),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 《요한복음 파라독스》를 발표했고, 역서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성서와교회연구원)를 내놓았다. 그리고 원어성경 학습 프로그램 파워바이블 앱 개발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