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환 새안교회
▲장시환 목사.
베드로전후서는 매우 짧지만 깊은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는 무엇을 강조합니까. 두 말을 붙들어야합니다. 산 돌과 거룩한 백성. 산 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주님의 삶과 사역을 가리킵니다. 본문은 그 주님과 맞서는 자의 최후에 관해 가르쳐 주고, 그리고 우리는 그 주님의 택함을 받은 거룩한 백성들인 것을 일깨워 주는 말씀입니다.

먼저 믿는 자들, 예수를 믿는 자들은 어떤 자들이 되어야 하나요. 갓난아이들 같아야 합니다. 갓난아이 같다는 것이 뭘까요? 1절에 말했습니다. 모든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을 버리는 것. 우리안에 이런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한 것, 나쁜 생각 마음들은 조그만 것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또 속이는 것, 겉과 속이 다른 것, 남을 시기하는 것, 비방하는 것. 이런 것들이 우리 안에 있지 않는지 돌아보고, 갓난아이와 같이 순수해야합니다.

천국 백성들은 다 이와 같습니다. 순전한 아이들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중생했을 때, 예수 믿고 거듭났을 때가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 모습을 점점 잃어버린 채, 죄에 물들고 찌들어버린 모습은 없나요?

그리고 갓난아이같이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신령한 젖은 뭘까요. 하나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말씀을 간절히 원하고 그 말씀을 늘 먹고 그것으로 자라나야합니다.

창세기 49장을 보면, 야곱이 죽기 전에 12아들들에게 유언을 남깁니다. 그 중에 유다에게 준 유언이 있습니다. 예언같은 유언인데, “너는 사자새끼다. 너는 많은 사람을 이끄는 지도자가 될 것이다. 그런 너의 눈은 포도주로 붉어져야 한다. 너의 입은 우유로 희어져야 한다.”

매우 상징적인 유언입니다. 늘 술취해 있으란 말일까요? 아닙니다. 포도주는 성경의 많은 말씀들을 볼 때,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고 성령을 상징합니다. 그것에 취해 있어야 합니다. 우유는 뭘까요. 진리의 말씀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너의 입이 가득해야 한다”, 늘 말씀을 말하고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요건입니다. 지도자의 삶이 이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지도력, 리더십은 이걸 통해 주어지고 발휘됩니다.

어제 한 가정에 심방을 했습니다. 시편 1편 말씀을 나눴는데, “복있는 사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사람은, 그런 가정은 어떤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죄악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또 다른 하나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

우린 율법과 더불어 복음의 말씀까지 있습니다. 그 하나님 말씀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늘 읽고 나누고 밤낮으로 묵상하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고 했습니다. 수분 공급을 늘 넘치게 받으니까 철을 따라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잎이 마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사가 형통하리로다”. 제가 물었습니다 ‘형통’이 뭘까요. 모든 것이 잘 되는 것?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문맥을 보면 더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어려움을 잘 이길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 5장 말씀처럼, 환란중에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어려움이 오면 도망가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①죄악을 멀리하고 ②주의 말씀을 늘 사랑하고 묵상하는 것, 이 두가지를 늘 기억하고 살면 늘 하나님의 복받는 인생, 그런 가정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 사도가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사람인가? 더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갓난아이들처럼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에 있어 제일 추한 것이 변질되는 것입니다. ‘아 저 사람, 옛날에 안저랬는데 요즘 이상해졌다.’ 이런 말 듣고 싶습니까?

우리는 신앙의 뜨거움 순수함을 다 갖고 있었습니다. 눈물로 기도하고 늘 예배를 사모하고 죄를 안 지으려 하고, 하나님 말씀 읽고 묵상하고 더 알고 싶어하고 더 듣고 싶어했습니다.

여러분, 한 해를 결산하는 때를 맞으면서, 이런 것들을 돌아보고 회복하는 기간으로 삼기를 원합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벧전 2:4)”.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나. 우리는 예수 믿는 자들입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여기 있는 자들이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따라 살려는 제자들입니다.

그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사람에게는 버림받았습니다. 눈물 없이 이야기할 수 없는, 실로 고난 가득하고 한스러운 삶 아니었습니까? 태어날 때부터 악한 왕이 찾아 죽이려는 칼날을 피해 도망가야 했던, 그리고 그 인생의 마지막은 나무 형틀에 매달려 처형당해 돌아가셨습니다. 그 한스러운 세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에게는 버림받았습니다. 세상에는 버림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분이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나요? 그 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도 동일한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다 버린다 할지라도,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택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이것을 더 실감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은 교회를 예수 믿는 자들을 조롱하고 미워하고 손가락질합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무어이 있습니까?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복이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은혜가 있습니다. 선택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놓쳐버리면, 우리는 세상과 같아지고 맛 잃은 소금처럼 아무 쓸데없어 밟혀질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산 돌’이시라고 했습니다. ‘living stone’, 살아있는 돌입니다. 왜 돌에 비유했을까요. 뒤에 보면, 그 돌이 큰 하나님의 집의 주춧돌이 됐다고 합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머릿돌, 기초석입니다. 이 돌부터 놓고 나서, 다른 돌들을 따라 놓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시인가요? 얼마나 깊은 언어입니까? 어떤 시인이 이런 시를 쓸 수 있겠습니까.

어제도 시를 읽고 감명받고, 오늘도 베드로 사도의 시와 같은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들을 읽으면서 시심 동심을 회복하길 바랍니다. 어린아이 같은 순전한 마음을 회복하길 바랍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 믿는 우리에게 뭐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까? 세상의 조롱을 받고 비웃음 거리가 되어도, 지금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것은, ‘선택’ 입니다. ‘선택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아무 능력 없어 보이고 아무 자랑할 것 없어 보여도,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다 버려도 이것 하나 있으면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보배로운 산 돌이신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고별 설교인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고별 설교라는 것은 십자가 죽음을 앞두신 유언 같은 말씀입니다. 자신이 죽기 전에 남겨진 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그 연합의 깊은 비유의 말씀을 주시고는, 뒷부분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란다” 하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셨다”.

여러분, 이 선택의 깊은 세계를 깨닫는다면, 세상의 어떤 박해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나아가 세상을 바꾸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바울이 그랬고 지금 베드로 사도가 그렇습니다. 사도들의 삶이 그랬습니다. 어딜 가나 박해를 받고 멸시를 받았지만, 그들을 통해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이 본문을 볼 때, 늘 영화 <라이온 킹> 이야기를 합니다. 새끼 사자가 죄책감을 갖고 숲속에 숨어 벌레만 먹고 살다 어느날 우물가로 갔는데, 자기 얼굴이 보입니다. 보니까 사자인 것입니다. 초원을 다스리는 위엄있고 권세있는 사자인데, 이렇게 살 내가 아니라는 것이 찾아옵니다.

나는 누구인가? 자기 정체성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잃어버리고 사니까 초원이 하이애나의 세상, 비참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심바가 그것을 딱 깨닫고 나니까, 자기 정체성을 깨닫고 나니까, 초원이 질서를 되찾게 되고 다시금 살만한 세상, 아름다운 세상으로 변화되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의 메시지가 얼마나 대단한지요? 그만큼 우리 정체성을 잘 깨닫고 사는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입니다.

이것을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정말 자던 영혼들이 다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 대서사시 같은 장엄한 역사 속에 우리의 자리, 우리가 받은 선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다 이기고 다 뚫고 나가는 ‘돌덩이’가 되는 것입니다. 산 돌이신 예수를 따라서요. 자, 이 돌의 비유를 좀더 보겠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 2:6-8)”.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이는 본래 시편 118편 말씀입니다. 그것을 베드로 사도가 인용하는 것입니다.

그 돌은 어떤 것입니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것입니다. 부딪히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박해하고 대적하는 자는 그것에 다 넘어지고 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심판의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과 대화하는데, 이전에 자기 경험을 얘기했습니다. 같이 있던 사람들이 다 나쁜 죄를 짓는데, 자기는 같이 죄 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왜 너만 깨끗한 척하느냐? 온갖 말을 들었겠죠.

그러다 죄짓는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찾아와서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네가 있는 것 자체가 나에게 상처가 된다고. 보기만 해도 찔리고 괴로운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이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좇아 산다는 것, 진리 위에 서 있는다는 것이 정말 강력한 힘이 있구나.’ 죄악을 심판할 놀라운 권세입니다. 아무리 짙은 어둠이 있어도 작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가 누구인가. 예수 믿는 우리라는 것입니다. 선택받은 우리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 사도가 또 유명한 말을 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벧전 2:9)”.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주장한 만인사제설의 근거가 되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다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직능의 차이 질서는 있지만, 그러나 부름받은 모두는 다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무엇입니까? 구약을 보면 선민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사람,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이고 가장 거룩한 백성들의 대표자입니다. 그 제사장이 위임식을 할 때,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 이 기름은 ‘큰 권세’를 상징합니다. 이 기름은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을 상징합니다.

왕이 될 때도 이렇게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의 뜻도 ‘크리스토스’,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지금 베드로 사도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기름부음 받으셨던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권세와 영원한 축복의 세계를, 믿는 자들이 이어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두에 말했습니다. 본문을 이해하는 두 가지 핵심적인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산 돌과 거룩한 백성’.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그 귀한 세계를 이어 위대한 세계를 이루어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벧전 2:9)”.

이것이 우리 정체성입니다. 더 크게 보면 한국이란 나라의 자리도 그렇습니다. 멀지 않은 통계자료에 의하면, 이 조그만 나라에서 전세계 선교사 파송을 미국 다음으로 많이 했습니다. 인구 대비 파송 수로 따지면 단연 1위입니다.

왜 그런가요? 수많은 제국들의 박해와 수탈을 당했던 역사적인 경험이 이스라엘과 비슷합니다. 고통이 있고 한이 있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접촉점이 됩니다. 그것이 복음을 제일 깊이 있게 아는 지점이 됩니다.

그런 민족을 들어 쓰셔서 전 세계를 변화시키시려는 놀라운 계획이 있는 것이 아닌가요. 여러분, 우리 신앙이 개인의 삶의 안위, 영달, 행복 그런 것만 생각하고 살 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하나님 역사의 위대한 뜻이 있고 사명이 있다는 것을 늘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이 그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꿈을 꾸고 이루고자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많은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 나를 선택하시어 예수를 알게 하시고 진리를 깨닫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택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셨습니다. 교회라는 단어의 원 뜻은 에클레시아(Ecclesia), called-out 입니다. 부름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어디서부터 불러냈을까요? 어두운 데서, 죄와 사망의 세계에서 불러냈습니다.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빛, 빛은 진리입니다. 그 진리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놀랍고 신비한 세계에 들어가도록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온 땅에 온누리에 전하라고 우리를 불러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세계 선교를 꿈꾸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온 세계가 복음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변화되는 역사의 grand finale, 그 거대한 그림을 늘 그리고 그것에 기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택하신 이유입니다. 이 말씀 따라 사는 새안교회와 모든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장시환 목사(서울 길음동 새안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