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예레미야 35장 1-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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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량이 고금을 통틀어 가장 성공한 2인자의 한 사람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냉철한 현실 인식과 절제된 처신이 뒷받침된 ‘관계의 기술’ 덕분이었다. ⓒOlga Stalska on Unsplash
인생의 브레이크가 절제다

나는 1995년도 군에서 제대를 했다. 제대하고 부모님이 운전 연습하라고 중고차를 하나 사주셨다. 타고 다니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한 번은 복학하기 전에 학교에 한 번 다녀오려 상주에서 대구로 차를 몰고 갔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데 갑자기 소름이 쫙 돋았다. 브레이크가 잡히지 않는 것이었다. 순간이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도하면서 경산 I.C까지 가 보자라는 생각으로 차를 이리 저리 피해가면서 갔다.

경산 I.C에 거의 도착해 갈 때 브레이크를 밟아 보았다. 제대로 제동이 되지 않았다. 다시 힘껏 밟았다. 타이어가 타는 냄새가 나면서 제동이 되기 시작했다. 타이어 타는 냄새를 풀풀 내면서 겨우 경산 I.C에 멈춰서서 요금을 내고 나왔다. 다시 생각해도 오싹한 경험이었다.

차가 감당해야 할 중요한 두 가지 기능이 있다. 첫째는 잘 달리는 것이고, 둘째는 잘 멈추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기능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엑셀레이트와 브레이크다.

차가 아무리 잘 달려도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으면 큰 사고로 이어진다. 자동차뿐 아니라 우리의 인생에도 엑셀레이트와 브레이크가 필요하다.

우리 인생이 잘 나간다고 무조건 달려서는 안 된다. 때로는 속도를 줄이고 멈출 수 있는 브레이크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 브레이크가 바로 절제다.

절제=아름다움

헬라 사람들은 지켜야 하는 ‘4대 덕목’을 ‘지식, 용기, 정의, 절제’로 삼았다. 당시 어른들은 아테네 청년들에게 두 가지를 경고했다고 한다. 첫째,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이다. 둘째. “너 자신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자신을 다스리라는 말은 절제의 덕을 갖추라는 말이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다. 모든 국민에게는 자유가 부여돼 있다. 물론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의 자유다. 주어진 법 안에서는 마음껏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내가 기쁜 일이 있을 때 마음껏 기뻐한다 해서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좋은 일이 있어 행복해 한다고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옆에 있는 가족을 잃은 슬픔을 당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해 기쁨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아름다움을 만든다.

우리에게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면서 살 수 있는 자유가 분명히 있다. 내 마음 속에 하고 싶은 말을 담아놓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 말이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면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말로 인해 문제가 발생할 것 같으면 참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행동도 마찬가지다.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때로 다른 사람을 위해 절제 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을 위해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성장을 위해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아름다움을 만든다.

어떤 분이 요르단에서 기수가 모는 두 마리의 말이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을 보았다. 이 분은 가까이에서 그렇게 전속력으로 달리는 말을 처음 보았다.

이상한 것은 앞의 말은 힘겹게 호흡하며 달리고 있고 뒤의 말은 충분히 힘이 남아 보였는데 앞의 말을 따라잡지 않았다.

결국 멈춰설 때까지 앞의 말은 선두를 지켰다. 그래서 이 분이 궁금해 말이 멈춘 곳으로 가 보았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선두에 달린 말은 너무 많이 지쳐보였고 뒤에 있는 말보다 늙었다.

이 분이 기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이 말이 선두로 달릴 수 있었나요?” 뒤에 들어온 말을 타고 있는 기수가 대답을 했다.

“먼저 들어온 말은 다른 말에게 추월당하면 늙고 힘겨워 더 이상 달릴 수 없다고 단념할 게 뻔합니다. 그래서 건강하고 어린 말과 달려 이겼다고 생각하게 하는 거죠. 그 마음가짐만으로도 몇 년은 더 달릴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뒤에 달린 어린 말은 힘을 전부 써서 달리면 승리하겠지만, 그런 기분을 몇 번 느끼면 버릇이 나빠져 사람이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절제를 배우게 하려고 두 마리를 함께 달리게 한 겁니다.”

앞에 있는 늙은 말에게는 용기와 힘을 북돋아 주고 뒤에 있는 어린 말은 절제를 배우게 하려고 두 마리를 함께 달리게 한 것이 참 지혜롭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힘이 있어도 그것이 절제 될 때 정말 아름다운 것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말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 가뭄을 해갈하는 물도 넘치면 홍수가 된다.

맛을 내는 소금도 과하면 맛을 잃는다. 나무는 물이 필요하지만 과한 물은 나무를 죽인다. 몸을 건강하게 하는 운동도 지나치면 사망에 이르게 한다.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음식도 과식을 하면 질병을 일으킨다. “과식은 자기 이빨로 자기 무덤을 파는 것이다”는 말처럼, 절제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것도 결국 독이 되고 만다.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기록하고 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가운데 마지막 열매가 절제다.

왜 성령의 마지막 열매가 절제일까? 그것은 앞에 있는 모든 열매들은 결국 절제라는 그릇에 담겨져야 진정한 빛을 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모든 너무나 좋은 열매다. 너무 좋은 열매들이지만 절제의 그릇에 담기지 않으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선한 일에도 절제가 필요하다.

사실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쁜 일에 대해 비교적 절제를 잘하는 편이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이 좋은 일에도 절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절제하는 레갑 사람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레갑 사람들을 불러 여호와의 한 방에 들어가게 한 이후,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예레미야는 하나님 말씀대로 레갑 사람들을 초청해 여호와의 방에 들어가서 포도주가 가득한 종지와 술잔을 놓고 마시라고 권했다.

그런데 여기서 ‘마시라고 권했다’는 표현을 원어적으로 보면 ‘마시라고 소리치다’는 강경한 명령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예레미야는 강압적으로 레갑 사람들에게 포도주를 먹으라고 한 것이다.

레갑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지자인 예레미야가 이렇게 하는 것에 대해 굉장히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조상인 요나답이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고 해서 먹지 않겠다고 거절한다.

그들은 포도주를 마시지 않을 뿐 아니라 조상 요나답의 말대로 집도 짓지 않고 포도원이나 밭도 소유하지 않고 장막에서 살고 있었다. 사실 레갑 사람들이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는 아니다.

포도주를 한 번 정도 먹을 수도 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집에서 내놓는 포도주이고 그것도 마시라고 호통을 치듯 강권하는데, 선지자의 낯을 봐서라도 그것을 거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선조 요나답의 명령에 따라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

왜 레갑 사람들인들 포도주를 마시고 싶지 않았겠는가? 자기 집도 짓고 정착하는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포도원도 소유하고 농사도 지으면서 살고 싶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이들은 요나답의 명령에 따라 절제된 삶을 살았다.

이런 레갑 사람들에게 대해,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이렇게 축복하신다. 예레미야 35장 18-19절 말씀이다.

“예레미야가 레갑 사람의 가문에게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선조 요나답의 명령을 순종하여 그의 모든 규율을 지키며 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행하였도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절제하지 못한 삼손과 솔로몬

성경에 보면 이렇게 레갑 자손들처럼 절제된 아름다운 삶을 산 사람들이 있는 가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삼손과 솔로몬이다.

삼손은 하나님이 자기를 나실인으로 세우셨음을 알면서도 죽은 시체를 가까이 했다. 독주를 입에 됐고 이방 여인과 혼인하는 등 하나님이 금하신 일을 저질렀다. 자신의 삶을 절제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머리카락이 잘려지고 두 눈도 뽑히고 블레셋 사람들의 노리개로 전락하고 말았다.

솔로몬도 마찬가지다. 솔로몬은 일천번제를 통해 하나님을 감동시켜 지혜도 얻고 부귀영화도 누린 왕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왕궁을 건축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율법에서 왕 된 자들에게 금하신 것을 행하였다. 왕은 병마를 많이 두지 말라고 했는데 많이 두었다.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고 했는데 많이 두었다.

그 결과 그는 그토록 지혜롭고 영화로운 왕이었으나, 이방 여인들에게 미혹되어 이방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된다. 그 결과 말년에 곳곳에 반란이 일어나고 결국 아들 대에서는 나라가 갈라지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절제하기 위해 해야 할 일

우리는 절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머릿속으로 잘 알고 있다. 절제가 아름다운 삶을 만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문제는 행동으로 잘 옮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많은 사람들이 중독에 빠지는가? 절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절제의 삶을 살 수 있을까? 물론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기도만 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해야 할 일이 있다. 두 가지만 생각해 보자.

목표를 세워라

첫째, 절제하기 위해서는 목표를 세워야 한다. 목표가 있으면 절제하기 훨씬 쉽다. 목표가 없는 사람은 되는대로 살게 된다. 생각 없이 살게 된다. 무절제한 삶을 살게 된다.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는 이렇게 말씀한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사도 바울이 사역했던 고린도에서는 2년마다 올림픽 경기와 비슷한 대회인 ‘이투미안’ 경기가 열렸다. 이 경기가 열릴 때마다 온 그리스가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그 경기에 참가한 선수들은 적어도 10개월 이상 극기와 절제를 하면서 연습과 훈련을 한 다음 대회에 참가를 했다. 바울은 운동 경기에 참가한 선수들의 그 모습을 보면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이 4년마다 열리고 있다. 올림픽 경기를 보면 많은 선수들이 금메달이 확정되는 순간 우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의 흘리는 눈물의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첫째는 기쁨의 눈물일 것이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것에 대한 그 기쁨이 오죽하겠는가?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것은 세계에서 그 분야에서 최고로 잘 한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둘째는 지난 날들이 생각이 나서 눈물일 것이다. 지난 날 금메달을 따기 위해 고통스러운 훈련을 참아내고, 하고 싶고, 먹고 싶은 모든 것을 절제하며 지내왔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서 눈물이 났을 것이다.

올림픽 금메달을 목표로 하는 선수는 절제한다. 먹는 것도 절제하고, 하고 싶은 것도 절제하고 시간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기에는 단순히 저들이 운동을 잘 해서 금메달을 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스스로를 절제하고 피나는 훈련을 해 왔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주어진 것이다.

자신이 목표한 대학이 있는 학생은 그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힘들지만 절제된 삶을 산다. TV 보는 것도 스마트폰 하는 것도 절제하고 노는 것도 절제하고, 오직 공부에만 집중한다. 몇 kg를 감량하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는 사람들은 먹는 것을 절제한다.

맛있는 것이 있어도, 많이 먹지 않는다. 하기 싫은 운동도 한다. 그래야 목표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만일 무절제하다면, 그 이유 중 하나는 분명한 목표가 없기 때문이다. 분명한 목표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절제하게 된다.

벤자민 플랭클린

미국에 벤자민 플랭클린이라는 분이 있었다. 이분은 가난한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학교라고는 1년 밖에 다녀보지 못한 분이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의 교육과 마아트 목사님의 청교도 교육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열심히 일하는 것과 독서하는 것을 체득했다. 결국 그는 미국의 철학회 창시자가 되었다. 피뢰침 발명가가 되었고, 초대 프랑스 대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13가지 덕목을 정해 평생 지켰다. 자기 관리가 철저했던 사람이다. 13가지 덕목의 첫째가 뭔지 아는가? 절제다.

그는 자신이 평생 지켜야 할 원칙 중에서 가장 우선되는 것을 절제로 정했다. 왜 그랬는가? 자신이 목표하는 삶을 이루기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이 절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썩지 않을 면류관 받을 목표를 분명히 하라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고린도전서 9장 25절의 후반부에 바울이 한 말을 우리는 가슴에 새겨야 한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바울은 운동선수들을 보면서 세상의 썩을 승리관을 얻기 위해 저렇게 절제하고 애를 쓰는데,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썩지 않은 면류관을 얻기 위해 절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절제하는 삶을 살기 위해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이 땅에서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도 분명히 해야 하고, 하나님 앞에 가서 썩지 않은 면류관을 받고자 하는 목표도 분명히 해야 한다.

구별된 삶을 살라

둘째, 절제하기 위해서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절제된 삶이란 무조건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구별된 삶을 살라는 것이다.

내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할 줄 알고, 먹을 것과 먹지 않을 것,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별하여 사는 것이 ‘절제’다.

사람이 집 안에서 애완동물을 키우려면 가장 먼저 위생에 대한 부분을 가르쳐야 한다. 원래 동물들은 배설을 아무데나 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배설만큼은 철저하게 구별된 곳에서 해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람이 고급화될수록 화장실 시설이 깨끗해지고 화려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가까이 하시는데 가장 어려운 점은 인간들이 더러운 죄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430년 동안 노예 근성에 젖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 삼으시고, 가장 먼저 ‘거룩’하기를 요구하셨다.

레위기 19장 2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신다. ‘거룩하라’는 것은 곧 구별된 삶을 살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과 다른 삶을 살라는 것이다.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잊지 말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잊고 살면, 세상 가운데 물들 수밖에 없다. 세상과 섞일 수밖에 없다. 구별되지 않고 세상과 섞이면 망하는 것이다.

노아의 홍수가 일어난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들의 딸을 섞였기 때문이다. 셋 계열의 사람과 가인 계열의 사람이 섞였기 때문이다.

결국 노아의 홍수 사건은 하나님의 공동체가 세상과 섞임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사건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과 섞이면 안 된다.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내가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구별된 삶을 살아갈 때 자연스럽게 절제된 삶을 살게 된다. 세상 사람들이 다 “예”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하셨다면, “아니오”라고 할 수 있게 된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니오”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면 “예” 하게 된다.

절제된 삶을 사신 예수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절제된 아름다운 삶을 사셨다.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다(마 8:20).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머리 둘 곳도 없는 절제된 삶을 사셨다. 하루 종일 병든 자를 치유하시고 말씀을 가르치시고 피곤하실텐데, 새벽 미명에 일어나 기도하셨다. 마지막 십자가를 지는 것도 자신의 의지를 절제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다.

코로나19라는 상황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가 절제의 삶이다. 아무리 좋은 것도 절제라는 그릇에 담기지 않으면 아름다울 수 없다.

절제하기 위해 우리는 목표를 정해야 한다. 되는 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 또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망각하지 않고 세상 가운데서 구별되게 살아야 한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이재영 목사는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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