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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1. 세상에는 문제가 가득합니다. 하지만 어떤 문제도 답이 없는 문제는 없습니다.

문제의 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여러가지 응용 문제들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응용한 문제의 형태에 따라 풀어가는 식은 다를 수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답만 줄줄 외워봐야 문제 적용이 안 됩니다. 대부분의 경우 답만 외우다시피 해서, 여러가지 응용 문제 앞에 끄적거리다 포기하고 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살아야하는 일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때 당면하는 문제가 무엇인가를 요한복음 21장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 편지에서 우리가 점검해야 할 사항은 ‘열심히 일해야 하는 세상’ 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은 ‘안식과 쉼’이라고 했습니다.

아침과 밤, 둘 중 어느 것이라도 무너지면 반드시 영향을 미친다고 했습니다. 밤을 잘 보내는 사람이 아침을 맞이합니다.

마찬가지로 안식일의 의미를 잘 아는 사람이 올바른 일을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했지요.

2. 오늘 여러분과 나눌 두 번째 세상의 문제는 ‘빠름의 세상’입니다.

기본적으로 현대 사회는 빠름을 추구합니다. 자본주의 사회, 그리고 경쟁 사회에서 뒤처진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 듯 합니다.

특히 한국 사회는 대대로 빠름을 추구해 왔습니다. 음식점에 가서 10분 기다렸는데 음식이 안 나오면 성질이 납니다. 영화관에서도 마지막 크레딧까지 보는 관객은 거의 없습니다.

예식장에서는 1시간 내로 촬영까지 마쳐야 하니, 30분만에 모든 식순이 거의 끝나야 합니다. 로켓 배송이 생겼습니다. 하루라도 늦으면 독촉 전화를 합니다.

3. 물론 빠른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코로나19 사태 가운데, 한국 특유의 ‘빠름의 정신’이 많은 사람을 살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일과 쉼의 관계에서도 그러하듯, 쉼과 일의 정체성을 알아야 하듯, 빠름이라는 속성을 잘 알아야만 합니다.

4. 빠르면, 사랑해야 할 대상을 놓칩니다.

사랑은 본디 빠르지 않습니다. 사랑은 혼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관계가 있고 대상이 있습니다. 그러니 속도를 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그래서 느려야합니다.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에 대해, 사도 바울이 가장 먼저 오래참음이라고 한 게 괜한 말이 아닙니다. 서로를 느리게 볼 수 있는 사람.

5. 베드로가 서 있는 요한복음 21장은 ‘디베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과거 ‘갈릴리’ 호수였지만, 이제 지명이 바뀌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8장 9-10절에서 “갈릴리에서 보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디베랴를 두고 갈릴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다시 만날 때, 여전히 옛 마음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추억, 그분의 부르심을 받았던 첫 장소, 첫 사랑의 그 마음.

그러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황제의 바다, 물질만능주의의 호수 가운데 서서 밤새도록 고기잡이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곳에 이미 와 계신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빨리 빨리”를 외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징은 시야가 좁아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눈이 좋아도, 속도가 올라갈수록 시야는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6. 이런 빠름의 한복판, 시야가 좁아지게 만드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만나는 세 가지 ‘응용 문제’들이 있습니다.

첫째, 아무리 노력해도 이상하게 텅 빈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새벽 내내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텅 빈 그물입니다. 시간을 헛되이 쓴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 목소리가 들립니다.

“얘들아 고기는 잡았니? 오른쪽으로 그물 던져볼래?”

한 마디로 이런 말입니다.

“힘들지? 그런데 행복하니?”
“내 말대로 해볼래?”

7. 밤새 달리고 달리며 피곤해지고나서도, 시뻘개진 눈과 좁아진 시야를 가진 우리는 더 달리고 더 달리면서 말합니다.

“나만 텅 빈 것 같아.” 주님이 계신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항상 그 바쁨의 순간, 피곤한 순간, 주님이 묻습니다.

“그렇게 살았더니 정말 행복하니?”
“내 말 들어볼래?”

지치고 무뎌진 텅 빈 인생 가운데, 주님이 채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을 들어야 합니다.

일함의 한복판에 주일이 있는 이유입니다. 아무리 분주해도 멈춤과 쉼이 있는 이유입니다. 힘들어도 주님 말씀에 멈출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8.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는 또 다른 응용 문제가 있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여러분, 빈 그물이 채워지는 건 더 쉽습니다. 그런데 더 어려운 것은 여러분이 채움을 받았을 때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가면, 그때부터 그 사람의 믿음이 진짜인지가 드러납니다. 좋은 남자와 여자인지는, 사귀고 나서부터 드러납니다. 아니, 진짜는 결혼하고 나서부터입니다. 좋은 왕이 될지 아닐지도 왕이 되었을 때, 즉 힘이 주어졌을 때 드러납니다.

“내가 할 수 없어. 내가 채운 게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채움을 받고 나서 바뀝니다. 자기 노력, 자기 힘, 자기 의지를 자랑하거나 끊임없이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법을 모르는 것은, 하나님이 채워주신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9. 마지막으로 정말 주의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성격은 원래부터 다급했습니다. 기질은 아무리 환경이 바뀌어도 바꾸기가 힘듭니다.

저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요한으로부터 듣고 나서, 베드로는 당장 예수님께 당장 가고 싶었습니다. 지금 배 위에 있음에도 더 빨리, 더 빨리 보고 싶은 것입니다.

바다에서 밤새 고기를 잡아올리려면, 당연히 옷을 제대로 입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부로서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뛰어들면서, 베드로는 놀라운 행동을 합니다.

7절입니다. “겉옷을 두른 후에”.

늘 감정적이고 격분하는 기질, 언제나 뜨겁고 가장 앞서야 했던 ‘빠름 빠름’의 베드로. 이제 그토록 원하던 그물이 가득찬 순간, 베드로가 놓치지 않았던 것은 ‘예절’이었습니다.

헤엄을 쳐야 하는데, 구태여 겉옷을 두릅니다. 한국적으로 예절이지만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겸손’입니다.

겸손은 나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것입니다. 힘을 가졌다 해서, 그 힘의 사용을 잘못하면 폭력이 됩니다.

10. 우리는 주님께서 왜 베드로에게 교회의 시작을 맡기셨는지 발견합니다.

가장 뜨겁고, 빠르고, 기질적으로 바뀌기 어려운 베드로가 바뀌어야 할 부분, ‘예의’였습니다.

늘 남보다 앞서서 뛰어가고, 그래서 응답도, 주님에 대한 경험도 많은 베드로가 놓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남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거센 물결이 힘겹게 떠밀어도 예의를 다하기 위한 베드로의 모습은 용기가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감정적으로 격동되어도, 예의를 지키는 것은 용기 없이는 안 됩니다.

싫은 사람이 앞에 있다고 곧바로 칼을 휘두르는 ‘빠름의 사람’은, 폭력의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격정적인 순간에서도 잠시 멈추고 생각해 옷을 걸쳐입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즉 느림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상대가 ‘누구인지’,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이 예수님임을 바로 보게 할 것입니다.

11. 조지 플로이드는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경찰의 과도한 힘에 의해 인격이 모독되고 생명을 잃었습니다.

CNN에서 경찰의 무력사용 기록을 분석한 결과, 체포 과정에서 목이 눌린 사람이 2012년 이후 약 428명이랍니다. 그런데 그 중 흑인이 65%였습니다.

목 누르기를 당한 이들 중 14%는 의식을 잃었습니다. 의식을 잃은 용의자들 중 56%는 또한 흑인입니다.

이러한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는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무례는 무례를 낳습니다. 현재 시위는 점점 격화되고 있습니다.

빠름은 결국 대상의 존귀함을 보지 못하게 하였고, 힘의 사용에 있어 무절제를, 무절제는 폭력을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예의를 다하는 사람들은 있습니다. 워싱턴 라파예트 공원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할 때, 한 흑인 소년은 두 팔을 들고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흑인 소년은 흥분하기 쉬운 상황, 그리고 위기의 순간에서도 예의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경찰들이 방패를 들고 이 흑인 소년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때 한 소녀가 등장합니다. 소녀는 소년을 필사적으로 감쌌습니다. 대단한 용기입니다. 예의와 용기가 만난 이 장면은 영상으로 공개되어, 수많은 전 세계 시민들에게 감동과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12. 홍콩도 힘으로 억누르려 하는 사람들에 의해 인권이 유린되고 있습니다.

중국은 미국의 시위 상황을 이용해, 이기회에 빨리 홍콩의 보안법을 완전히 추진하려 합니다. 그 빠름은 결국 또 다른 폭력을 가져올 것이 분명합니다. 그 빠름은 세계 사람들을 적으로 보이게 만들 것입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각자 부여받은 힘으로 끊임없이 서로를 향한 ‘총구 없는 전쟁’이 연일 계속되고 있습니다. 누군가 폭행을 당한 사건을 두고, 남과 여가 갈라서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세상은 교회를 의심하고 미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수록, 한가지 생각을 해야 합니다. 겉옷을 걸칠 만큼의 예의를 지키고 있습니까? 상대가 원수입니까? 그렇다면 사랑할 대상을 만났으니, 예를 다해 보십시다.

13. 서로 허물이 없어지는 것, 중요합니다.

격식이 없어지고 허례허식 같은 겉치례들은 다 사라져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뜨거움과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가득찬 그물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 아니 그 다음 단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겉옷을 점검해 보십시다.

빠름의 시대, 너무 뜨겁고 격정적인 젊음이 여러분의 알몸을 다 드러낸 것은 아닌가 말이지요. 빠름만 추구한 나머지 우리 시야가 좁아져, 상대를 소유의 대상으로 보거나 걸림돌이 되는 타인은 적대시하는, 그래서 내게 가득찬 힘으로 상대를 무릎 꿇리고 숨막히게 하는 또 다른 폭력을 일삼는 것은 아닌가.

13.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베드로에게 주님은 더욱 예를 갖추셨다는 것입니다.

잘못한 일 투성이의 베드로에게, 단 한 마디 지적없이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셨습니다. 예를 갖췄던 베드로에게, 더욱 진정한 예와 사랑으로 답해주신 주님의 사랑을, 여러분도 경험해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14.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빠름의 시대에서 삽니다. 그 빠름은 우리를 폭력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세상 속에서 예의를 다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건,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건 예의를 갖추려 노력하며, 잠시 시간을 멈추고 겉옷을 걸쳐 입는 우리가 된다면, 바로 그러한 자들에게 사랑의 고백을 던지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누군가 늦게 와도 그 사람을 위해 기다려주는 성찬의 사람, 빠름의 세상과 다름은 그렇게 구현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을 주님은 이 시대의 베드로로 새롭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으로 인해, 아름다운 예를 갖춘 교회들이 태어나기를 기도드립니다.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