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13장 5-13절

십자가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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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의 미래가 불안하다

사람들의 미래가 불안하다고 아우성이다. 당장 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자영업자의 타격은 심각하다. 작은 교회는 생존 자체가 어렵다.

지금만 살기 힘든 것이 아니었다. 단지 지금이 더 힘들 뿐이다. 앞으로가 걱정이다. 20세기 초반 대공황 때보다 더 힘들 것이라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

삶이 힘든 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은 통계청의 실업률 통계다. 2019년 2월 현재 우리나라 실업률은 4.7%다. 실업자 수는 130만3000명이다. 좀 더 넓혀 확장 실업률로 보면 13.4%로 실업자는 265만 2,000명이다.

청년 확장실업률은 무려 24.4%나 된다. 청년 4명 중 1명은 직장을 구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렇게 실업률이 높으니 삶의 불안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부모들의 교육열은 세계에서 최고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좋은 교육을 받아야 미래가 불안하지 않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미래 불안의 해소하기 위해 자녀가 일류 대학 입학하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한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대학 졸업률은 세계 최고다. OECD 주요국 25세부터 34세까지 대학 졸업률(2015년)이 69%로 세계 1위다. 반면 살기 좋은 나라인 독일은 30%밖에 안 된다. 미국은 46%이고 일본은 60%다.

대학을 졸업하면 번듯한 직장인으로 밝은 미래를 꿈꾸며 살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졸업자가 너무 많으니 고등학교만 나와도 할 수 있는 일들을 한다.

그 결과 많은 대학 졸업생들이 백수를 면치 못하고 있다. 좋은 직장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다. 주위 젊은이들 중에 몇 년째 취업 준비생들이 꽤 있다.

어른들이 교양이 없으니 젊은이들의 미래가 불안하다

젊은이들이 현재가 막막하고 미래가 불안한 것은 지도자들이 배려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 몫만 챙기려 하지, 후배들이나 필요한 사람의 몫은 남겨두지 않는다.

최근 들은 이야기 중 잊히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그 회사는 많은 사람들이 입사하고 싶은 회사란다. 그 직장에 70%는 인맥으로 다 채워지고, 나머지 30%가 경쟁을 통한다는 것이다.

배려가 없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친구 딸이 은행에 취업할 때 받지 않아야 할 질문을 받았다. “아버지께서 어떤 일을 하시냐?”

이런 질문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꼰대다. 젊은 직원을 뽑는 것이지, 아버지를 뽑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취업은 했다. 하지만 회사가 비전이 없다고 확신해, 곧바로 퇴직했다. 지금은 좋은 회사에 다니고 있다.

자녀들 공부하려며 세 가지를 갖춰야 한다는 웃픈 이야기가 있다. “할아버지의 경제력, 어머니 정보력, 아버지의 무관심!”

삶은 누가 대신 살아주는 게 아니다. 할아버지의 경제력이 없으면, 흙수저로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부모를 잘 두면 금수저로 살아간다. 태어나면서부터 불평등이 시작된다. 이는 국가 지도자들이 배려가 없기 때문이다.

전에는 개천에서 용이 났다. 그러나 지금은 할아버지 경제력까지 갖춰야 하니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구조다. 취업할 ‘사람’을 면접해야 하는데, 취업도 하지 않을 할아버지의 ‘배경’을 본다.

이는 지도자들이 교양이 없기 때문에 발생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이런 사회가 된 것은 어른들의 책임이 크다. 꼰대만 하려고 하지 스승이 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구치 슈라 일본 작가가 쓴 책이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이다. 그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교양 없는 전문가보다 위험한 존재는 없다”

교양 없는 지도자가 지천에 널린 우리나라는 위험할 수밖에 없음을 말해준다. 이는 지도자들이 자기 탐욕만 채우려 하기 때문이다.

사장에게 딸 취업 청탁을 했다는 의심을 받는 국회의원도 있다. 입사 지원서를 사장에게 직접 건넸다고 한다. 교양 없는 정치가들은 권력을 이용해 자녀를 취업시킨다.

이와 같이 교양 없는 사람들이 나라를 다스리니, 젊은이들이 삶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 수 있는 나라가 될 리 만무다.

그리스도인은 교양으로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교양 있게 살고 있는가?

초대교회 때 그리스도인들은 교양 있게 살았다. 즉 인정받는 삶을 살았다. 사도행전에 안디옥 교회가 나온다. 바울이 사역한 안디옥 교회가 그리스도인이란 호칭을 얻었다.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6)”.

안디옥 교회가 들었던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세상 사람들이 다른 사람이라고 인정한 것을 뜻한다. 즉 “저 사람들은 달라!”라는 말을 들었다. 다른 말로 교양이 철철 넘치는 사람들이란 말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전광훈 목사가 담임인 사랑제일교회는 오프라인 예배를 하고 있다. 이는 교양 없는 교회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인은 교양 있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

며칠 전 역사학을 전공한 교수와의 대화 주제 중 하나가 ‘교양 있는 그리스도인’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교양 있는 그리스도인은 삶이나 신앙생활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집, 직장, 사회에서 멋지게 살아간다.

공의롭게 살아간다. 불로소득을 취하지 않는다. 편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비도덕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도리어 손해를 보는 삶을 선택한다.

지금 한국 교회가 쇠퇴하고 있다. 아니, 급격하게 쇠락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교양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나이로 101세 된 김형석 교수는 한국교회의 쇠퇴 이유 중 하나를 ‘그리스도인의 교양 없음’이라고 말했다.

서양 교회가 쇠퇴한 것도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보다 교양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가 쇠퇴하는 것도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보다 교양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회복할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한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야 한다고 한다. 그 이전에 할 일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교양인이 되는 것이다.

안디옥 교인처럼 진짜 그리스도인이어 되는 것이다. “저 사람들은 달라!”, “나도 저 사람들처럼 살고 싶어!”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말씀과 삶이 일치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교양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럼 교양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사람을 어떤 모습으로 사는 사람을 말하는가?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이 일치되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프랑스 말에 ‘딜레탕트(dilettante)’라는 말이 있다. 딜레탕트란 좋게 말하면 예술 애호가다. 나쁘게 말하면 예술에 관심은 많지만 많이 알지는 못하는 사람이다. 이는 어떤 분야를 깊이 탐구하지 않고 피상적으로 하는 사람을 말한다. ‘딜레탕트’는 일치가 아니라 불일치다.

그리스도인은 자칫 잘못하면 신앙이 피상적이 되기 쉽다. 말씀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삶을 살기 쉽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말씀과 삶이 일치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즉 똘레랑스(Tolérence)를 품고 살아야 한다.

교양 있는 그리스도인은 욕심 부리지 않는다

교양 있는 그리스도인은 탐욕적으로 살지 않는다. 도리어 포기할 것을 과감하게 포기하면 산다. 편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도리어 십자가의 삶을 살고자 한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며 살고자 한다.

교양 있는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삶이 그 중심에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불안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이다. 포기가 아닌 탐욕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포기의 삶을 살면 불안하지 않다. 도리어 바울처럼 희망을 품는다. 바울처럼 부귀영화를 자랑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자랑한다. 즉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를 자랑스럽게 외친다.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다. 하지만 부자를 포기하면 세상을 자유롭게 살 수 있다. 베풀며 살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으며 살 수 있다. 더 많이 취하고자 하면 불안하다. 더 많이 내려놓고자 하면 편안하다.

부자 되기를 포기하면 어떤 것도 결행할 수 있다. 공부를 하면서 터득한 것이 한 가지 있다.

“돈만 내려놓으면 결행하지 못할 것이 없다”라는 것이다. 돈을 내려놓지 못하면 우물쭈물 한다. 아무 것도 결단할 수 없다. 선택 장애가 될 뿐이다.

이런 말이 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영국의 극작가겸 소설가였던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에 적힌 말이다.

우물쭈물 하면 포기의 삶을 살 수 없다. 하지만 결단하면 포기의 삶을 살 수 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삶을 살 수 있다. 바울처럼 날마다 죽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불안할수록 내려놓아야 한다

불안할수록 세상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불안할수록 하나님을 붙들어야 한다. 우리가 내려놓을 것은 욕망이다. 우리가 붙들 것은 바울처럼 자족하는 삶이다.

사람들은 불안하면 반대로 행동한다. 더 많은 것을 붙들려고 한다. 더욱 탐욕적이 된다. 그 결과 보이던 희망도 암흑으로 변한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미래가 불안했다. 삼촌을 따라왔지만, 가족과 친족이 없으니 불안이 엄습했다.

불안했기에, 그는 없던 욕심까지 부렸다. 그때도 가축들이 많았기에 자족해야 했다. 그러나 롯은 자족하기보다 더욱 욕심을 부렸다. 포기할 것을 과감하게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탐욕적인 사람이 되었다.

반면 아브라함은 달랐다. 불안하지 않으니, 과감하게 포기했다. 아브라함과 롯의 가축의 키우는 목자가 다투었다. 가축을 먹일 공간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던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거처할 곳을 먼저 선정하라고 한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9절)”.

이 말을 듣지 마자 롯은 덥석 물었다. 그는 하나님을 생각했어야 했다. 이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하고 질문했어야 했다.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무릎을 꿇고 기도했어야 했다. 아니, 삼촌 먼저 선택하라고 말했어야 했다.

그러나 롯은 양보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좋은 땅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롯에 행동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창 13:10-11)”.

롯이 맘에 든 땅은 물이 넉넉했다. 물은 가축을 먹이는 데 가장 필요하다. 뿐만 아니었다. 땅이 여호와의 동산 같았다. 즉 비옥했다. 2모작이 보통이라면 3모작도 할 수 있는 땅이었다. 마지막으로 애굽 땅과 같았다. 최고의 땅이었다. 소위 강남 요지다.

불안했기에, 욕심을 부렸다. 좋은 땅을 선택했다고 잔치를 벌였을 것이다. 이제 삼성과 같은 갑부, 부자가 되었다고 축배를 들었을 것이다.

욕심은 불안을 가중시킨다

욕심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성경은 욕심은 사망을 낳는다고 한다. 결국 롯에게는 이 욕심이 사망을 낳았다.

인생은 멀리보기이다. 그는 멀리 보려 하지 않았다. 도리어 가까이 보기를 했다.

아브라함은 멀리 봤다. 포기는 가까이 보는 것 같지만 멀리 보는 것이다. 욕심은 멀리 보는 것 같지만 가까이 보는 것이다.

멀리 보는 사람은 결코 욕심 부리지 않는다. 포기할 것을 과감하게 포기한다. 가까이만 보는 사람은 욕심을 부린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 영광만 취하고자 한다.

롯이 포기하지 않았더니 어떻게 되었는가? 결국 다 잃었다. 멀리 보지 않았더니 가까운 시일에 가정과 자신의 미래가 암울해졌다. 그가 선택한 소돔과 고모라 땅이 하나님의 유황불로 심판 받았다.

포기한 아브라함은 어떻게 되었는가? 멀리 보니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 사람들에게도 아브라함은 따르고 싶은 사람이다. 롯은 따르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포기는 인생을 헛되게 살게 하지 않는다. 불쌍하게 살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 안에 들어가게 한다.

신앙생활은 포기로부터 시작된다

신앙생활은 포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이 취함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착각도 큰 착각이다. 신앙생활은 포기로부터 시작된다.

살다가 욕심이 생기면 포기를 생각해야 한다. 더 취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다 내려놓을 생각을 해야 한다.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선택하려 해야 한다.

우리는 욕심 부리기보다는 포기하고자 해야 한다. 포기해야 하는 이유는, 인생은 가까이 보기가 아니라 멀리보기이기 때문이다. 포기하는 사람은 인생을 멀리 본 사람이다.

포기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생각한 사람이다. 포기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과감하게 이 땅의 것을 포기할 수 있었다. 롯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이 땅의 것을 포기하지 못했다.

고수와 하수의 차이점이 있다. 하수들은 미래가 불안하면 욕심을 부린다. 고수들은 불안하면 포기한다. 불안할수록 고수의 삶의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그 이유는 “욕심은 죄를 낳는다”고 성경이 말씀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멀리 보며 살아가야 한다. 멀리 보며 살아가는 삶은 포기를 잘 한다. 포기를 잘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예수님은 포기의 달인이다. 포기를 아주 잘하셨다. 죽음까지 포기하셨다.

그 포기가 부활을 이루셨다, 부활의 주님이 되셨다. 그렇다면 우리도 포기의 달인이 돼야 한다.

하나님을 위해 포기하라

그리스도인은 포기를 잘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왜 포기를 잘 해야 하나? 하나님께서 포기하길 원하시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포기하면 안 된다. 하나님을 위해 포기해야 한다. 자기 마음 편하기 위해 포기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포기해야 한다.

호주에서 럭비 선수로 뛰는 이스라엘 출신 폴라우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선수 생활까지 포기했다. 폴라우와 같이 포기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자신의 SNS에 성경구절을 포스팅했다. 다른 것이 아니라 동성애에 대해 반대하는 성경구절을 포스팅했다. 이에 대해 호주럭비협회는 선수 규정을 위반했다고 판결했다. 그 결과 회사는 폴라우와의 400만 달러짜리 4년 계약도 종결했다.

폴라우는 럭비선수 생활이 끝났다. 선수 생활이 끝나는 판결을 받은 뒤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의 럭비 선수 커리어가 끝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또한 “그분의 계획을 신뢰한다.”

그는 동성애에 대한 성경 구절을 포스팅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해서 선수 생활을 포기할 각오를 하고 포스팅을 한 것이다. 그가 인스타그램과 트위터에 남긴 성경구절은 고린도전서 6장 9-10절이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폴라우는 하나님을 위해 포기했다. 우리가 포기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어야 한다. 부귀 영화를 포기해야 하는 이유도 하나님 때문이어야 한다. 우리가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모든 것을 포기하셨기 때문이다.

폴라우는 전부를 포기한 것이 아니다. 일부분을 포기했다. 선수 생활에 일찍 마침표를 찍었을 뿐이다. 호주에서 선수 생활을 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셨다.

그리스도인 중에 멋있게 포기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넘사벽 기부왕’이라고 부르는 션과 정혜영이다. 그들의 기부액이 45억원에 육박한다.

기부하기 위해 그들은 집을 포기했다. 연예인 중 집 없는 연예인이 없을 것이다. 대부분 호화저택에 산다. 하지만 그들은 기부하기 위해 호화로운 집을 포기했다. 잘 나가는 연예인의 삶을 포기했다.

그들의 포기는 자기들을 위한 포기가 아니었다. 하나님을 위한 포기였다. 그들은 세상의 집은 포기했다. 하지만 ‘내 집은 천국에 마련하겠다’고 했다.

저는 아트설교연구원을 시작하면서 세상적으로 잘 살고자 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는 사람을 키우기 위함이다. 미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해 포기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설교자들을 세우기를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포기하는 삶을 살고자 해야 한다. 멀리 본다면 포기를 선택해야 한다. 아브라함과 같이 좋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롯과 같이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 그럼 다 잃게 된다.

아브라함과 같이 좋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그럼 하나님을 얻는다. 하나님을 얻는 것이 다 얻는 것이다.

지금 삶이 불안한가요?

그럼 먼저 세상 것을 포기해야 한다. 하나님을 선택하기 위해, 눈에 좋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내가 포기하면 하나님께서 다른 길을 여신다. 그럼 미래가 불안하지 않고 미래가 보장된다. 멀리 보고자 한다면 먼저 포기하라. 그럼 하나님께서 내 두 손을 꼭 붙들고 가신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김도인 목사
아트설교연구원 대표
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자와 묵상/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이기는 독서/절판》《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