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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누가복음 15장 12-24절


역설의 원리

산악 전문가들은 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내려가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냥 올라가기만 해서는 정상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때로는 능선을 따라 걸어가야 하기도 하고, 가파른 바위를 타고 넘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올라가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내려와야만 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오르내리다보면 어느새 정상이 저만치 보이는 것입니다.

‘욕금고종(欲擒姑縱)’이란 ‘잡고 싶으면 먼저 놓아줘라’는 뜻입니다. 곧 이 말은 세상은 내가 잡으려고 한다고 잡혀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려놓았을 때 나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역설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가장 범하기 쉬운 착오 중 하나가 집착과 애착입니다. 놓으면 잃어버릴 것이라는 조바심에, 더욱 굳게 잡으려고 합니다. 주면 빼앗길 것이란 생각에 더욱 움켜잡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진짜 현명한 사람은 얻기 전에 줄 줄 아는 사람입니다. 기업은 고객에게 기쁨을 주었을 때, 고객의 사랑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완전히 얻으려면 먼저 주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얻으려면 먼저 내 마음을 주어야 합니다. 주먹을 꽉 쥐고 놓지 않으면 결코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이 로또 복권에 당첨되었습니다. 주변사람들은 운수대통(運數大通)했다며 야단입니다. 과연 운수대통(運數大通)한 것일까요?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얻으면 삶의 균형이 깨어져 버립니다. 평소에 누리던 일상의 작은 행복이 사라져 버립니다.

통계조사에 의하면 복권에 당첨된 대부분의 사람의 불행한 결과를 맞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얻고자 하다 잃어버린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찮은 것 때문에 귀중한 것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억울한 일입니다.

얻는 것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얻었지만 명예는 잃어버립니다. 어떤 자리를 쟁취하여 앉았으나 존경심은 사라져 버릴 수 있습니다. 얻고자 하는 것에만 눈이 어두워지면 좋은 것을 보지 못합니다.

잃으면 얻는다

오늘날 문명의 발달로 좋은 것도 있지만, 잃은 것이 더 많습니다. 편리해졌지만 삶은 오히려 부실해졌습니다. 자동차로 인해 다리가 허약해졌고, 스마트폰 때문에 사람들의 머리는 점점 바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교회 번호와 저의 아내 전화번호 밖에 외우는 전화번호가 없습니다. 저희 아들 전화번호도 모릅니다. 입력 키를 통해 전화하기 때문입니다. 고층 아파트에 살지만, 하늘의 별은 보지 못합니다.

잃으면 얻고, 얻으면 잃는 것이 삶입니다. 얻기만 하고 잃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잃어야 얻을 수 있습니다. 건강을 잃었지만 삶은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돈은 잃어버렸으나 사람을 얻었다면 좋은 선택을 한 것입니다.

남편을 잃고 가난하게 혼자 살아가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섬에서 나는 해산물을 사다 뭍에 내다 팔자고 결심을 했습니다. 이렇게 결심한 것은 우연히 이웃 섬을 오가며 장사를 하면 꽤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어렵게 빚을 내 장사 밑천을 만들어, 섬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나루터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만 돈 보따리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장사는 커녕 빚만 잔뜩 지게 되었습니다. 하늘이 노래지고 땅이 꺼지는 듯했습니다.

그 때 마침 길을 가던 한 노인이 그 보따리를 주웠습니다. 보따리에 너무 큰 돈이 들어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돈 주인을 찾아 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노인은 그 자리에 꼬박 반나절을 기다려 길을 되짚고 온 그녀에게 돈을 돌려 주었습니다.

그녀는 노인에게 감사의 큰 절을 올린 뒤 되찾은 돈 보따리를 품에 안고 다시 나루터로 가서 배를 탔습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쯤 나갔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한 청년이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렸습니다. 너무 깊은 바다여서 아무도 청년을 구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애가 타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당장 청년의 목숨부터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크게 소리쳤습니다. “누구 저 청년을 구할 사람이 없으세요. 누구든지 저 청년을 구하면 내가 이 돈을 다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 돈 보따리를 내보이며 크게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누군가 나서서 청년을 구해냈습니다. 그녀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장사 밑천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제 장사도 할 수 없고 빚쟁이가 기다리는 집으로도 돌아갈 수 없는 딱한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힘없이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녀가 구해준 청년이 다가와 함께 자기 집으로 가자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그녀는 마지못해 청년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놀랍게도 그 청년은 그녀의 돈을 찾아준 노인의 3대 독자였습니다. 청년은 자초지종을 다 말씀드리고, 아버지께 권유하여 그녀를 새어머니로 삼고 극진히 모셨습니다.

만일 돈 보따리를 주운 노인이 눈앞의 이익을 먼저 쫓았다면, 결국 3대 독자를 잃고 말았을 것입니다. 만일 그녀가 청년을 구하기 위해 그 돈을 내어놓지 않았다면 청년도 목숨을 잃었을 것이고 새로운 가정을 이루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잃으면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잃으면 또 다른 것을 얻게 됩니다. 잃은 것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

케네스 베일리라는 분이 15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태도에 대해 질문을 해보았다고 합니다. 그것도 한 곳에서만이 아니라, 모로코로부터 인도까지, 터키로부터 수단까지 15년 동안을 다니면서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아들이 유산을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에 대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람들의 대답은 모두 똑같았다고 합니다. 질문과 답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 마을에 어떤 사람이 탕자와 같이 아버지께 유산을 요구한 일이 있는 가?” “결코 없었다.”
“당신은 이런 요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불가능하다”
“누군가가 이런 요구를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하는가?” “아버지가 그를 때렸을 것이다.”
“왜 그런가?” “그런 요구는 아버지가 죽기를 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부분은 우리나라에서도 동일할 것입니다. 아버지가 건강하게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유산을 요구한다는 것은,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못 기다리겠으니 빨리 재산을 달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탕자는 모든 것을 잃고 아버지를 얻었다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요구하는데도, 아무런 말 없이 그냥 내어줍니다. 유산을 받아든 둘째 아들은 모든 것을 현찰로 바꾸어 아예 먼 나라로 떠나버립니다. 유산으로 받은 돈은 얼마 동안인지 모르지만, 다 허랑방탕하게 탕진합니다.

결국 돼지 치는 일을 하게 되는데, 돼지들이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 해도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돼지들이 먹는 먹이도 못 먹으니, 어찌 이를 인간이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 그는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풍족하게 먹고 사는 품꾼들을 떠올립니다. 결심합니다. 아버지께 돌아가서 용서를 구하고 아들로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품꾼으로라도 받아달라고 부탁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그 동안 그에게 있어 아버지는 단지 자신에게 물질을 공급해 주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죽을 때를 기다려서 자신에게 주어질 유산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당장에 받아 냈습니다. 그리곤 아버지를 떠나버렸습니다. 더 이상 아버지는 자신에게 필요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잃은 그 자리에서, 그는 진정한 아버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탕자는 분명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다 잃어버렸지만, 그는 잃어버린 아버지를 다시 얻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잃어버리면 잃어버린 것에 집착합니다. 잃어버린 것에 집착하지 말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얻은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얻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히 얻은 것이 있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잃게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잃게 하시는 것은 다른 것을 얻게 하심입니다. 만일 탕자가 잃은 버린 것에만 집착했으면, 자살을 선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 잃어버린 자리에서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여전히 돌아갈 수 있는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결국 아버지께로 돌아갔고, 잃어버렸던 아버지를 다시 얻었습니다.

‘Work Hard’에서 ‘Think Hard’으로

서울대 황농문 박사가 쓴 <몰입>이라는 책에 보면, ‘Work Hard’에서 ‘Think Hard’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Work Hard’란 열심히 일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Think Hard’는 열심히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황 교수는 매일 열심히 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던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머리를 쓰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저 그런 결과밖에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열심히 일하면 남들보다 2배 이상 잘하기도 힘들지만, 열심히 생각하고 몰입하면 남보다 10배, 100배 아니 1,000배까지도 잘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그야말로 열심히 생각하는 것에 인생을 송두리째 던져볼 만한 것이다.”

열심히 일만 잘하면 된다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입니다. 이 고정관념을 버리려 하지 않습니다. 생각한다고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지금 이 시대는 창의적인 사람, 생각하는 사람이 이끌고 있습니다. ‘Work Hard’에서 ‘Think Hard’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것은 잃는 것 같지만 곧 더 많은 것을 얻는 것입니다.

1,300만원을 잃고 얻은 것

제가 신학대학원을 다니면서, 학교 근방에서 전세 집을 얻어 학교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첫째, 둘째가 어릴 때였습니다. 그 당시 1,300만원 전세였습니다. 방 두 칸에 부엌이 딸린 단독주택이었습니다.

전세를 얻기 전에 이래 저리 부동산에서 가서 알아보았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아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어느 날 이 집이 경매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새마을금고에 그 땅과 집이 저당잡혀서, 저희는 한 푼도 돈을 받지 못한 채 집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리저리 알아보고 어떻게 해보려고 했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때 제가 생전 처음으로 법원도 가보면서 ‘내가 정말 멍청했구나’라는 생각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 1,300만원은 시골에서 어머니 구해 주신 돈인데, 몽땅 다 잃어버렸으니 마음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가난한 신학생에게 1,300만원이란 정말 너무나도 큰돈이었습니다.

그 이후 가만히 기도하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난한 신학생에게 이 큰 돈을 잃어버리게 하셨을 때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제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솔직히 어머니가 전세금으로 마련해 주신 돈이지만, 전임전도사로 가면 사택을 주니 그 돈을 안 돌려드리려 생각했습니다. 그 돈이 있으면 좀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공부도 좀 더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런 마음 외에 저의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던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 집 주인에게 전화 한통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1,300만원을 잃어버렸지만, 하나님께서 저의 마음을 새롭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1,300만원 없으면 못살 것 같았는데,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지 않습니까?

썰물이 있기에 밀물도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간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현재입니다. 이 현재는 과거를 내려놓아야 얻을 수 있는 시간입니다, 또한 현재가 아무리 좋아도 현재를 떠나보내지 않으면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있는 곳이 아무리 좋아도, 포기해야 더 나은 것이 주어집니다. 지금 손에 쥔 것을 놓지 못하면 더 좋은 것을 얻을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좋다고 너무 오래 쥐고 있다가, 더 좋은 것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잃은 것은 잃는 것이 아닙니다.

철강왕 카네기의 사무실에는 볼품없는 그림이 하나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림 속에서 나룻배는 모래사장에 있었고, 그 배 안에는 노 하나가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습니다. 썰물이어서 물이 다 빠져 버렸고, 배는 온갖 쓰레기와 함께 모래사장에 방치된 그림입니다.

카네기는 이 그림을 아주 귀중한 보물처럼 아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은 춥고 배고팠던 청년 시절 만난 것입니다. 유명한 화가의 값나가는 그림도 아니었지만, 카네기는 이 그림을 아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화가는 이 그림의 배 아래에 다음 글귀를 적었습니다. “반드시 밀물이 밀려오리라. 그 날 나는 바다로 나아가리라.”

이 그림을 바라보면서 카네기는 자기 자신이 모래 위에 버려진 배와 같이 초라한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언젠가 밀물이 밀려오면 드넓은 바다로 나가 당당하게 항해하게 될 것을 생각하면서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썰물이 있기 때문에, 밀물이 있습니다. 썰물이 있기에, 밀물이 올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잃은 것이 있다면, 얻을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잃는 것과 얻는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잃는 것과 얻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받기를 좋아하고 주기를 싫어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받는 일이 곧 주는 일이며, 주는 일이 곧 받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주었기 때문에 받고, 받았기 때문에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주는 것과 받는 것을 따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성경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돌아온 아들이 유산보다 더 중요하다

아버지는 돌아온 둘째 아들을 보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면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4)”.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고 말합니다. 둘째 아들을 그냥 잃었다가 다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아들에게 준 유산을 다 잃어버리고 얻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잃어버린 그 유산보다 더 소중한 둘째 아들을 다시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둘째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를 보십시오. 자신의 유산을 다 가지고 떠나가 버린 그 아들이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밉겠습니까?

탕자의 아버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들이 떠나간 후로 날마다 동구 밖에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거지 꼴을 하고 돌아오는 아들을 알아보는 것은 아버지라도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멀리서도 거지가 되어 돌아오는 아들을 알아보고 그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달려갑니다. 누더기 옷을 입고 냄새가 나는 거지 아들, 그 어느 누구도 가까이 싫어하던 그 아들을 부둥켜안고 입을 맞춥니다.

이런 아버지 앞에 이 아들은 어찌할바를 몰라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큰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닙니다. 저는 아버지의 종에 불과합니다. 저를 품꾼에 하나로 여겨 주십시오. 흑흑흑.”

이런 아들 앞에서,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왜 이제 돌아왔느냐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준 유산 다 어떻게 하고 거지꼴로 돌아왔느냐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돌아올 걸 왜 그렇게 했느냐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버지는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아들에게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말합니다. 빨리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돌아온 아들에게,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고 잔치를 열고 아들의 권위를 회복시켜 주시는 것,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셨지만 다시 얻으셨다

예수님도 이 땅 가운데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수많은 무리들은 돌변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지르는 군중으로 변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은30에 예수님을 팔아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해고 놓고선, 3번이나 부인하고 떠나가 버렸습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셨고, 잃어버린 모든 것을 다시 다 얻으셨습니다. 제자들을 통해 더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지식만 있는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지혜와 지식은 차이가 있습니다. 조금 쉽게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길을 가다 우연히 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발견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서 만원을 발견하면 ‘어 왠 돈이냐?’ 하고 그 종이가 만원임을 알아보는 것이 지식이라면, ‘야 오늘 운 좋은데, 이 돈으로 무엇을 하지? 하면서 그‘만원의 가치’를 알아보는 것이 지혜입니다.

곧 잃어버린 것을 보고 ‘잃어버렸구나’라고 아는 것은 지식입니다. 이에 반해 잃은 것을 통해 얻는 것을 아는 것은 지혜입니다. 우리는 지식이 있는 사람만 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잃은 버린 것이 아니라 얻은 것을 생각하라

공자가 조카 공멸에게 물었습니다.“벼슬해서 얻은 것이 무엇이고, 잃은 것이 무엇이냐?” 공멸이 그 물음에 답했습니다. “얻은 것은 없고 잃은 것만 세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이 많아 공부를 하지 못했고, 두 번째는 녹봉이 적어 친척을 돌볼 수 없었습니다. 세 번째는 공무가 다급하여 친구들과 관계가 소원해졌습니다.”

공자는 같은 벼슬을 하고 있던 복자천에게도 물었습니다. “벼슬해서 얻은 것이 무엇이고, 잃은 것이 무엇이냐?” 복자천이 그 물음에 답했습니다. “잃은 것은 없고 얻은 것만 세 가지나 됩니다. 첫 번째는 예전에 배운 것을 날마다 실천하여 학문이 늘었고, 두 번째는 녹봉은 적지만 이를 아껴 친척을 도왔기에 더욱 친근해졌습니다. 세 번째는 공무가 다급하지만 틈을 내니 친구들과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같은 일을 하고 같은 하루를 보내면서도 어떤 사람은 불행에 빠져 생활하고, 어떤 사람은 행복하게 생활합니다.

불행한 사람은 잃은 것만 생각합니다. 이것도 잃고 저것도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잃은 것만을 생각하면 감사함도 만족감도 잃게 됩니다.

하지만 행복한 사람은 얻은 것을 생각합니다. 이것도 얻고 저것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얻은 것을 생각할수록 감사함도 만족감도 넘치는 것입니다.

잃은 것으로 인해 힘들어 하고 계십니까? 잃어버린 과거에 집착해 여전히 현실에 있어 고통 가운데 계신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좋은 것을 주기 위해, 잃어버린 자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얻은 것을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