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Ben White on Unsplash
본문: 베드로후서 2장 9-14절


간신이 아니라 충신으로

‘목숨을 걸고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을 ‘충신’이라고 한다. 그는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 오직 나라만 생각한다.

한 나라에 많아야 할 것은 충신이다. 하지만 많은 것은 이간질하는 사람이다. 각 나라마다 충신들이 있다.

조선의 대표적인 충신은 사육신(死六臣)이다. 이들은 1456년 단종 복위에 목숨을 바친 인물이다.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6명을 가리킨다.

지금을 살아가는 후손들이 존경하는 충신 중 한 명이 이순신 장군이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했다.

일제 침략 때의 충신은 안중근 의사다. 만주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순국했다.
순국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의사의 마지막 유언이 아래와 같다.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최근 영화 한 편을 관람했다. <남산의 부장들>이다. 그 영화를 관람한 뒤, 현대의 나라 충신은 망령된 행실은 일삼았던 박정희 대통령을 총으로 제거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망령된 행실을 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나라에 많아야 하는 것은 충신이다. 현실은 간신이 많다. 간신이 많으면 안 된다. 간신이 많으면 나라가 위기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간신은 사악한 일만 하기 때문이다.

왕은 사악한 행위를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제왕이 지녀야 할 통치의 모든 것을 담은 고전인 《한비자》에 ‘신하가 사악한 일을 하는 방법 여덟 가지’를 이야기한다. 8가지는 아래와 같다.

첫째는 정실부인과 총애하는 비빈, 또 명분 없이 가까이하는 미인들이 군주를 미혹시키는 것이다.
둘째는 항상 군주 곁에 있는 배우, 난쟁이, 시종 등이 안색과 기분을 살펴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이다.
셋째는 군주가 사랑하는 왕실 내 친인척의 마음을 유혹하여 군주의 마음을 바꾸도록 하는 것이다.
넷째는 군주의 사치와 허영을 채워줌으로써 사리 판단을 흐려놓고 자신의 욕심과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는 것이다.

다섯째는 신하가 공공의 재물을 나누어주어 민심을 사로잡는 것이다.
여섯째는 헛된 말로 군주의 마음을 허무는 것이다.
일곱째는 신하들이 협객을 모으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사를 양성해 자신의 위용을 자랑하는 것이다.
여덟째는 대국의 위세를 이용하여 자신의 군주를 협박하는 것이다.

왕은 지혜로워야 한다. 솔로몬 왕과 같이 지혜로워야 한다. 예수님과 같이 지혜로움이 극에 달해야 한다. 지혜로울 때, 신하의 사악한 행위를 간파해야 할 수 있다. 신하의 사악한 행위를 간파하지 못하면, 나라를 보존하기 힘들다.

고종은 사악한 간신 이완용을 간파하지 못해, 나라를 일본에 넘겨주는 왕이 됐다. 지혜로웠던 솔로몬이 지혜롭지 못하자 나라를 유다와 이스라엘로 나뉘었다.

그래서 오긍은 그의 책 『정관정요』의 ’두참사’ 편에 “군주 된 자는 신하의 사악한 행위를 간파할 때 자신과 나라를 보존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나를 보존하려면 지혜로워야 한다. 신하의 사악한 행위를 간파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세상이 아니라 진리를 쫓아야 한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지혜가 있어야 하는 한다. 그리스도인이 지혜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을 쫓지 않고 진리를 쫓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에 베드로는 거짓 선지자들의 마지막을 이야기 한다. 12절부터 14절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세상을 쫓으면 결과는 비참하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 더욱 피폐해진다. 이성 없는 짐승과 같다. 범죄가 그치지 않는다. 저주의 자식이라 불린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를 쫓아야 한다. 주께서 죄악에서 건져주신다. 시험에서 건져주신다. 즉 하나님의 보호 아래 살아간다. 마치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눅 13:34)”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보호해주신다.

누가복음뿐 아니라, 이사야를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뛰어넘어 구원하리라 하셨느니라(사 31:5)”.

진리를 쫓아야 한다. 진리를 쫓는다는 말은 문제가 노출된 교회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한국교회의 문제를 지적할 때마다 단골손님이 있다. ‘성장지상주의, 세속주의 가치관, 목회자 인정욕구’ 등이다. 그 중 하나가 세상적인 가치관, 즉 세상을 쫓는 것이다. 진리를 쫓아야 하는데 비 진리를 쫓고 있다.

교회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딱 하나다. 진리를 쫓지 않고 세상을 쫓는 것이다. 툴리안 차비진은 그의 책 《더 크리스천》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성적 타락을 과감히 던지고 진짜 사랑을 입으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은 이기적인 성적 탐닉에 비해, 자기 희생의 사랑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만족스러운지를 이 외로운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교회는 이기적인 정욕과 자신을 내주는 사랑 사이에, 말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는 점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

세상을 쫓는 것과 진리를 쫓는 것의 차이를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 문제는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 세상과 똑같은 성장지상주의, 세속적인 가치관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 것은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다. 성벽이 무너진다. 집이 무너진다. 교회도 무너진다. 사람들이 죽는다.

요즘 중국 우한 폐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전 세계가 떨고 있다. 어제는 친구가 전화까지 하며 꼭 마스크 쓰고 다니라고 이야기까지 해줄 정도다. 지방 친구 중 한 명은 빨리 사람이 많은 서울에서 지방으로 내려오라고까지 말한다.

사람들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 1,000만 명 넘게 사는 중국 우한이란 도시는 유령 도시가 되었다고까지 한다.

하나님만으로 충분해야 한다

진리를 무너지지 않는다. 도리어 견고하게 선다. 그러므로 세상이 아니라 진리를 쫓아야 한다.

왜 세상을 쫓지 않고 진리를 쫓아야 하는가? 악한 사람이 아니라, 구원의 사람이 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일하셔야 한다. 인간이 일하면 문제만 만든다. 하나님이 일하시면 행복만 만든다. 천국을 만든다.

랜디 알콘은 그의 책 《돈, 소유, 영원》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의 결과를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구원은 인간을 대신해 하나님이 일하신 것이다. 반대로 상급은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행한 일에 대한 대가다.”

인간은 즐거움을 향락주의로, 소유에 대한 욕망은 물질 만능주의로, 권력에 대한 욕망을 이기주의로 타락시킨다. 결국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거리로 만든다. 하지만 하나님은 구원과 상급을 만든다.

하나님의 진리를 쫓으려면 할 일이 있다. 복음에 덧붙이면 안 된다. 앤드류 팔리는 그의 책 《복음에 더할 것은 없다》고 말한다. 덧붙이는 순간 죄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쫓게 하는 것은 밑바탕에 있는 것은 죄다. 악한 죄다. 하나님을 반대편에 서 있는 죄다. 죄가 그 사람을 지배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만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복음 외에 보태면 불평등만 심화된다

우리는 세상이 아니라 진리를 쫓아야 한다. 진리를 쫓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께서 형벌아래 두어지기 때문이다.

형벌 아래 두면 10절 말씀처럼 우리는 탐욕 가운에 행하게 된다. 하나님을 멸시하게 된다. 그리고 영광 아래 있는 사람들을 비방하게 된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4절 말씀처럼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 하기를 그치지 아니한다. 저주의 자식이 된다. 마지막에는 12절 말씀처럼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한다.

탐욕은 인간을 짐승보다 못하게 만든다. 인간이 하나님께 받는 가장 큰 형벌은 인간으로서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인간은 할 일을 해야 한다. 죽이는 일이 아니라,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 자기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남을 세우는 일을 해야 한다. 빼앗는 삶이 아니라, 빼앗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영조 대왕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였다. 어떤 부모가 아들을 죽일 수 있겠는가? 아무리 정치에 필요하다 해도, 부모가 아들을 죽일 수 있는 없다.

조카를 죽이는 왕도 있었다. 세조다. 세조는 조카 단종을 유배를 보냈다 죽여버렸다. 형제들을 죽인 왕도 있었다. 태종 이방원은 왕이 되는 데 방해가 되는 형제들을 죽였다. 그것도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일으켜 죽였다.

북한의 김정남은 이복 동생 김정은에 의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독침으로 피살됐다. 또한 이모부인 장성택도 죽였다.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도 있다. 성군이라고 하는 다윗도 정욕 때문에 밧세바를 힘으로 얻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방해가 되는 남편 우리아를 죽였다.

하지 않을 일을 하면, 그 이후부터 사람답게 살 수 없다. 죄책감 속에서 살아간다. 저는 조금만 실수를 해도 꽤 오랫동안 그 생각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 그렇다면 영조나 세조, 그리고 김정은은 잠도 제대로 못 잘 수도 있다.

미국은 세계 최강의 나라다. 미국에 대해, 사람들은 ‘미 제국주의’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돈은 더 많지만 더 행복하지는 않은 나라가 미국이다. 그 이유는 불평등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미국을 롤 모델로 했다. 그 결과 미국과 비슷하게 불평등이 심각하다. 전문가들은 번영을 행복으로 전환시키는데 실패한 전형적인 사례가 바로 미국이라고 한다. 미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경제 성장을 이루고 부를 축적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것이 행복의 증진으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미국은 부의 90%가 가장 부유한 10%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아니 1%의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럼 행복한 나라가 아니라 불행한 나라다. 이는 세상을 쫓은 결과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야한다.

진리만이 행복하게 해준다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것이 행복이다. 불평등에 평등의 십자가를 질 수 있다. 대신 십자가를 져도 울면서 지는 것이 아니라 웃으면서 진다. 도리어 환호를 지르면서 진다.

그럼 우리 영혼이 자유케 된다. 즉 진리로 살면 자유케 된다. 요한복음 8장 32절처럼 자유케 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또한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도 이렇게 말씀한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하나님을 쫓으면 결과는 속박이 아니라 자유다. 돈의 속박이 아니라 진리 안에 자유다.

그럼 진리를 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마치 세리가 한 기도처럼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여기서 그치면 안 된다. ‘절박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마치 한 맹인과 같이 예수님께 절박함을 매달려야 한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가실 때 한 맹인이 한 말처럼 절박하게 매달려야 한다. 한 맹인이 외친 말이 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눅 18:39).”

절박하지 않으면 이렇게 외치며 말하지 않는다. 정중하게 말한다. “예수님 저를 한 번 살펴봐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럼 주목을 끌 수 없다. 그저 주변인에 머물 뿐이다. 절박하면 주변인에서 관심 대상이 된다.

진리를 쫓는데 절박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절박할 것은 자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 아니다. 즉 기복적인 것인 아니다. 영적인 것이어야 한다. 진리에 속한 것이어야 한다. 진리만이 우리를 거룩하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로 거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절박할 때 하나님을 찾는다. 절박해야만 진리를 쫓는다. 절박하지 않으면 진리를 쫓지 않는다. 대신 자기 욕망을 쫓는다. 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이 아니라, 절박함을 하나님을 쫓는데 사용한다.

우리가 절박하게 하나님을 쫓아야 할 이유가 있다. 절박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우리의 시선이 세상에 빼앗기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선이 진리에 빼앗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 시선이 진리에 고정시켜야 한다.

신앙생활이란 시선 뺏기가 아니라 시선 고정하기다. 세상으로부터 시선 뺏기가 아니라, 하나님께 시선 고정하기다. 하나님께 시선 고정하면 진리만을 쫓고 평생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진리에 시선 뺏긴 삶을 살기를 축복한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김도인 목사/ 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