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와 자전거는 서로 닮았네
▲나귀와 자전거는 등힘 세고, 지구력 있고 인내심이 강할 뿐 아니라 주인 말에 순종하는 것 등 서로 닮은 점이 많다. ⓒ크리스천투데이 DB
본문: 베드로전서 3장 1-7절


꾸미는 삶과 가꾸는 삶

사람이 살아갈 때 강조점이 있다. 하나는 꾸미는 것을 강조한다. 또 다른 하나는 가꾸는 것을 강조한다. 꾸미는 것은 외적인 것이 초점이다. 가꾸는 것은 내적인 것이 초점이다.

사람이 꾸미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꾸미는 것이 본능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꾸미는데 있어서 남자보다 관심이 더 많다. 여자는 힘보다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속담에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했다. 추한 것보다는 아름다운 것이 보기 좋다. 또한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한다. 떡도 보기 좋아야 먹고 싶다.

사람들이 외적으로 꾸미는 것의 첫 번째는 옷이다. ‘옷이 날개다’라는 말이 있다. 옷을 잘 입으면 날개를 단 것 같은 사람이 된다. 누구나 멋진 옷을 입으면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한 번 더 받는다.

옷으로 꾸며야 한다. 옷을 꾸몄다면 옷 꾸미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 다음 꾸미는 것이 있다. 바로 얼굴이다. 그 결과 한국사회에서 성형은 일상이 되었다. 지금은 성형도 모자라 흉측한 문신을 하는 것도 불사한다.

왜 꾸며야 하는가? 사회적인 존재인 사람이 알몸으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알몸은 부끄럽기 짝이 없다. 아담과 하와도 알몸 상태를 몹시 부끄러워했다.

사람은 꾸미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원래 머리가 없는 사람에게도 한 마디 하는 사회다.

언젠가 아트설교연구원의 모임에서의 일이다. 머리가 없는 사람이 모임에 처음 나왔다. 나이가 좀 있는 여자 회원이 불쑥 던지지 않을 질문을 던졌다. “왜 머리를 박박 밀었어요.” 당사자는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사회는 머리를 꾸미지 않아도 한 마디 한다.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란 것이 있다. 주변 환경을 깨끗하게 하라는 말과 같다. ‘깨진 유리창 법칙’은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해 두면, 그곳을 중심으로 범죄가 확산된다는 이론이다. 이런 법칙이 있는 것은 사회도 살만 하게 꾸며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외적인 것을 꾸미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된다. 고양이도 외모를 꾸민다. 인간이 꾸밀 것은 내면이다. 외면을 꾸미면 시간이 흐르면 낡아진다. 내면을 가꾸면 시간이 흐를수록 더 멋있어진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가꿀 곳이 있다. 바로 교회다. 교회가 아름다울 때 세상이 살만하게 된다. 교회는 꾸미면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화려한 꾸며진 성전을 엎으셨다. 내면이 더러워진 성전을 청결케 하셨다. 이는 교회는 외적인 꾸밈이 아니라 내면 가꿈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개개인의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가꿔야 하는 곳이다. 튤리안 차비전 목사의 말처럼 “Jesus All”, 즉 “나는 예수님만으로 충분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가꿔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도 외모 꾸미기가 아니라 마음 가꾸기를 해야 한다.

순종은 영성 가꾸기의 출발이다

가꿀 마음은 이기심이 아니라 이타심이다. 인간의 추악한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마음이다.

거룩한 마음을 가지려면 최우선으로 할 일이 있다. 하나님께 순종이다. 십자가의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십자가는 우리가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다. 어디까지 순종해야 함을 가르쳐주셨다. 우리가 할 순종은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자신을 다 내어주는 데까지 순종해야 함을 말씀한다.

베드로는 100% 순종의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예수님을 떠난 경험이 있다. 예수님을 떠난 뒤 어느 정도 순종해야 하는지를 뼈저리게 절감했다. 그 아픔을 바탕으로 사랑의 예를 들어 순종을 이야기 한다.

아내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6절)으로 이야기한다. 보통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는다. 순종이 아니라 종처럼 부려먹고자 한다. 사라는 달랐다. 남편을 하나님에게 하듯 순종했다.

순종은 반드시 행동을 통해 나타난다. 즉 어떻게 행동 하는가를 보면 순종하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행동할 것은 두 가지다. 당연하게 하는 행동과 당연하게 하지 않는 행동이다. 순종할 상황이 발생하면 사람들이 하는 곳은 고민이다. 고민한다는 것은 순종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음이다. 당연하다고 여기면 고민할 이유가 없다. 군대에서 순종 하는 것을 고민하지 않는다. 당연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사람에게 하는 순종은 당연한 행동이 아니어야 한다. 우리가 순종할 대상은 하나님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세상의 불의를 보면 당연히 항거한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항거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은 순종을 부정할 권리가 있다. 독일의 철학자 막스 셜러(Max Scheler)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소유한 가장 귀한 특권 중 하나는 나인(Nein), 즉 ’아니요‘라고 부정할 수 있는 권리라고 했다. 인간만인 그런 권리를 가진 존재다.”

인간은 ’아니요‘라고 말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문제는 악한 조직에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들이다. 독일 나치가 악한 조직인 나치당에게 무조건 순종했다. 그 결과 600만 명의 유대인이 목숨을 잃었다. 성경에도 이런 예가 많다. 대표적인 예가 사울 왕 당시 다윗을 죽이려고 한 사울의 부하들이다.

우리나라가 일본 압제에서 해방될 수 있었던 안중근, 윤봉길, 유관순 등 항거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민주화를 이룬 것은 이승만과 박정희 독재정권 때 이를 부당하게 여긴 ’아니요‘라고 외쳤던 국민들 때문이었다.

인간이라면 불의한 것에 순종하지 않을 권리가 당연하다. 불의한 것에 순종하는 것은 ’생각의 동물‘이 아니라는 증거다.

그리스도인이 순종할 대상은 유일하다. 하나님이시다. 개도 주인에게 순종한다.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인 하나님께 순종함이 마땅하다. 만약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개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하는 순종은 당연한 행동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하는 순종은 당연한 행동이다.

행복한 가정 만들기, 아내의 순종으로 된다

누구나 행복한 가정을 꿈꾼다. 행복한 가정을 만들려면 순종이 필수적이다. 특히 아내의 순종이 중요하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아내에게 남편에게 순종하라(1절)고 한다. 남편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면 순종이 당연하다고 말다. 그것이 1절과 2절이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바울도 똑같이 말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골 3:18)”.

베드로는 아내가 순종할 당위성만 이야기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예를 들어 아내가 순종 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먼저,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을 이야기 한다(5절). 다음으로, 사라의 이야기를 한다(6절).

베드로는 아내에게 순종하는 방법도 이야기 한다. 외모로 하지 말고 마음으로 하라고 한다(3-4절).

아내만 순종하면 불공평하다. 아내가 순종하면 남편들은 감동을 받는다. 감동 받은 남편은 대신 하나님께 순종한다. 기도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행위다(7절). 그 이유는 기도가 응답받아야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자다. 하나님께 드린 기도 응답으로 살아가는 자다. 즉 순종함으로 살아가는 자다. 남편의 하나님께 순종의 근거가 아내를 어떻게 대하느냐를 결정한다. 그것이 7절이다. 현대어 성경은 7절을 아래와 같이 번역한다.

“남편 된 사람들도 아내에게 세심하게 마음을 써야 합니다. 아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항상 보살펴주고 연약한 여자임을 인식하여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아내는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받는 반려자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만일 아내를 구박한다면 여러분의 기도는 응답받지 못할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 만들기, 남편의 순종으로 된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아내를 사랑하려면 먼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골로새서 3장 19절은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씀 한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이 말씀을 이루려면 하나님께 순종할 때 가능하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데 아내를 귀히 여길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순종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에게 순종은 당연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행복을 꿈꾼다. 오랫동안 꾸어왔던 행복 만들기 꿈이 꿈에 그치지 않아야 한다. 행복 만들기로 연결되어야 한다. 행복을 만들려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어야 한다.

아내에게 당연한 행동은 남편에게 순종함이다. 남편의 당연한 행동은 하나님께 순종함이다. 이 당연하게 해야 될 행동이 우리 삶에 행복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가 된다.

우리가 해야 될 당연한 행동은 순종이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당연한 행동은 순종이 아니라 불순종이다. 믿음의 삶이 아니라 불신의 삶이다. 긍정의 삶이 아니라 불만의 삶이다. 그럴지라도 그리스도인은 당연한 삶을 살아야 한다. 당연히 순종함으로 살아가야 한다.

순종은 당연한 행동이다

그럼 왜 우리의 당연한 행동이 ‘순종’이어야 하는가? 순종이 행복한 삶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 순종이다. 우리가 순종을 가장 안하는 대상이 하나님이다. 직장에서 사장에게는 순종을 잘 한다. 군대에서 선임에게 순종은 저절로 된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순종보다는 불순종이 일상이다. 그 이유는 순종하지 않아도 당장 괜찮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사람에게 못할지라도 하나님께만은 순종해야 한다. 이는 우리의 순종할 대상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순종이 당연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사회복을 주관하시기 때문이다. 죽음과 삶, 복과 화를 주관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받고 싶어 한다.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신명기 28장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이 임한다(신 28:2)고 한다. 더 나아가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고 한다(신 28:6).

다윗이 기도를 드릴 때 구한 것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복이다. 육적인 복이 아니라 영적인 복이다. 종의 집이 하나님의 영적인 복을 받는 것이다.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주의 말씀들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을 주의 종에게 말씀하셨사오니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삼하 7:28-29)”.

하나님께 당연한 행동을 해야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하루 세 끼 당연히 먹어야 한다. 그럼 건강하게 살 수 있다. 하루가 마치면 당연히 잠을 자야 한다. 그래야 다음 날 일을 할 수 있다.

행복은 당연한 곳에 있다. 당연히 하는 행동 안에 있다. 우리가 주일 예배 드리는 것 당연하다. 날마다 기도하는 것 당연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당연하다. 이런 당연한 행동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푹 익은 사람이 순종할 수 있다

누가 순종의 삶을 살 수 있는가? 푹 익은 사람이다.

겨울철에 가장 맛있는 간식이 군고구마다. 군고구마는 고구마 가마에 집어넣으면 맛있게 되어 나온다. 이는 고구마를 불에 푹 익혔기 때문이다.
행복도 만들기가 아니라 익히기다.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불가마에 익혀야 한다. 내가 익히면 설익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익히시면 푹 익는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신앙도 익히기다. 사람들은 신앙에서 훈련의 중요성을 이야기 한다. 이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신앙에는 훈련이 필요하다. 하지만 훈련은 푹 익히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푹 익히실 수 있다.

제자란 하나님에 의해서 푹 익혀진 사람이다. 그럼 인간이 제자훈련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제자훈련을 해야 한다.

익혀진 사람과 만들어진 사람은 차이가 난다. 만들어진 사람은 언제나 배반할 수 있다. 하지만 익혀진 사람은 배반할 여력이 전혀 없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들기를 하지 않으셨다. 익히기를 하셨다. 그 도구는 말씀과 성경이셨다.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 날, 성령의 바람이 불자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졌다. 그러자 성령에 취했다. 성령에 취하자 물건이 내 것 네 것이 없어졌다. 자기 재산을 없는 사람에게 나눠주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 그 결과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많아졌다.

고구마 익히는 가마에 들어가야 군고구마가 되어 나온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에 들어가야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나온다. 하나님의 사람다운 삶을 살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에 익혀져야 한다. 더 나아가 녹아 사라져야 한다. 용문교회 이언구 목사의 책이 《그리스도인은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먹는다》다. 그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완전히 녹아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말씀을 들게 되면 시간이 흐르면 자아가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저절로 없어져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 남아 있게 된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이다.

그리스도인이란 푹 익은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녹아져 없어진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순종은 저절로 한다. 순종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순종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마음껏 쓰실 수 있다

순종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마음껏 쓰실 수 있다. 푹 익어서 저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푹 익은 군고구마는 찌르면 찔러진다. 덜 익은 고구마는 찔러지지 않는다.

어릴 적 우리 집 논에 감나무가 있었다. 가을만 되면 아버지께서 감을 가지고 오셨다. 감을 익히려면 카바이트를 사용해야 했다. 익혀야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덜 익은 감 카바이트로 익히기 전에는 못 먹는다. 익히면 맛있게 먹는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맛있게 쓰실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푹 익어야 한다. 푹 익지 않으면 쓰임받기 어렵다.
사람이 절대 땡감을 먹지 않는다.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홍시감을 좋아한다. 푹 익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푹 익어야 한다. 푹 익을 때 하나님께서 마음껏 쓰신다.

‘아버지 학교’ 훈련을 받은 적 있다. 받을 때는 좋은 아버지 같았다. 하지만 푹 익지 않으니 3개월도 가지 않아 아버지 같지 않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순종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푹 익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마음껏 쓰실 수 있도록 준비되어져 있어야 한다.

당연한 행동이 행복의 문을 열어준다

푹 익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당연한 순종을 당연하게 할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순종은 우리의 삶에 행복의 문을 열어준다.

그리스도인이었던 유관순 열사가 3·1 운동에 앞장설 수 있었던 것은 만세 운동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하기 전날 밤, 생가 뒷산에 올라 함께 거사하기를 약속하는 봉화를 올리며 올린 기도문이 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오오 하나님이시어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왜(倭)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그녀에게 독립운동은 당연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 순종은 당연하다. 남편에게 순종은 당연하다. 아내에게 사랑을 당연하다. 이 당연함은 당연함으로 그치지 않는다. 삶과 가정 그리고 신앙생활에 행복의 문을 열어준다.

당연한 순종을 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것이 있다. 성령으로 푹 익어야 한다. 푹 익을 때 당연한 순종의 사람이 된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가? 그럼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순종이 쉬워야 한다. 신승재 목사는 그의 책 《스침에서 마주침으로》에 ‘인생’을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인생은 ’많이‘ 담는 게 아니라 ‘중요한 것’을 담는 일련의 과정이다. 행복은 ‘많이’ 담기에서 오지 않고 ‘중요한 것’을 담기로부터 온다.”

우리가 담을 것은 순종이다. 중요한 것, 담을 것도 순종이다. 그럼 행복이 삶에 담긴다.

카피라이터 박웅현의 명함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다고 한다.
“Surprise me(나를 놀라게 해)!”

신앙생활은 나를 놀라게 해야 한다. 순종은 하나님을 놀라게 한다. 그럼 당연한 행동인 순종으로 인해 행복의 문이 놀랍게 열린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당연한 행동이 행복의 문을 열어준다. 그러므로 나를 성령으로 푹 익혀야 한다. 그럼 순종을 당연히 하게 된다. 그 결과 하나님께 한 순종을 통해 행복의 문이 열린다.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