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감
▲내가 열등감을 느끼는 것도 우월감을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로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결코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모든 감정이나 사고들이 나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것은 고작 한두 개에 불과하거나 일어나지도 않을 불확실한 괜한 걱정들이다. ⓒDavid Marcu
파스칼은 인간이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생각하는 특권이 주어져 있다. 이 생각은 인간에게 지혜를 주고 확신을 주고 능력을 준다.

하지만 인간은 본능적으로 욕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생각이 근심을 가져다 주어 경우에 따라 좋은 결과와 나쁜 결과를 낳는다. 그런데 좋은 근심은 생명을 낳지만, 나쁜 근심은 생명을 죽인다.

다른 이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책망하는 일은 쉽지 않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듣는 이가 수용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해 고린도교인들의 문제를 지적하였고, 또 디도를 통해 그들을 질책하는 편지를 써 보냈다. 따라서 그는 이 말을 들은 고린도의 교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를 근심하였다.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고후 2:4)”.

그는 속히 디도의 소식을 듣기를 원했고, 마침내 마게도냐에서 디도를 만나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감사하게도 디도는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책망을 달게 받고 잘못을 고치고 회개하였음을 바울에게 전하였다.

바울은 이 소식을 매우 기뻐하였고, 그 소식에 대한 반응으로 고린도후서를 써서 보냈던 것이다.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고후 7:7)”.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그들과 화해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근심하였지만, 그 모든 문제가 해결되자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며 자신을 모욕하였던 그들을 칭찬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그렇게 근심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의 근심은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진 근심이었으며, 그 근심은 오히려 죄인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촉발하였기 때문이다.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복음의 성장을 이룬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예수님도 바울처럼 근심하기도 하셨다. 그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다. 동족이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또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외에는 이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 주는 방법이 없는지를 놓고 기도하며 근심하셨다. 그의 근심은 거룩한 근심이었다.

느헤미야도 거룩한 근심을 했다. 그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을 보임으로써,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이 그의 근심의 원인이 무엇인지 물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근심을 아뢰고, 그가 이스라엘로 돌아가서 성벽을 건축하는 일을 완성할 수 있도록 왕으로부터 허락을 얻어냈다.

채천석 크리스찬북뉴스 대표
▲채천석 목사.
국가와 교회와 가정에 대한, 또는 자신에 대한 거룩한 근심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간다. 바울은 오로지 이런 거룩한 근심에 사로잡혔던 사람이다.

그는 복음 전파를 위해 자신의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의 근심은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있었다. 그에게는 이러한 거룩한 근심이 있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작은 근심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근심만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세상의 염려들을 극복할 수 있었다.

사람이 어떤 근심을 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긍정적이 될 수도 있고 부정적이 될 수도 있다. 사람은 근심 없이 살 수 없고, 근심한다 해서 다 나쁜 것도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근심이 없다면 발전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은 이제 세상 근심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한 거룩한 근심을 해야 한다. 거룩한 근심은 진보를 낳고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채천석
크리스찬북뉴스 발행인, 순회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