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식 목사
▲윤형식 목사(동인교회 담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해에 '칭의와 성화(성결)'에 대한 재조명은 뜻 깊은 일이다. 종교개혁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칭의의 복음을 재발견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루터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이신칭의'의 깨달음은 당시 가톨릭신학의 배경 속에 있었던 교회들에게 일대 혁명이었다. '칭의론'은 종교개혁의 중심 논제였고,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이다. 루터는 "나는 어떻게 구원을 받을까?" 하는 고민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을 깨닫게 된다. 

이 때로부터 기독교 칭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요, 선물이라는 점에서 '은총만으로(sola gratia)', 인간적인 모든 업적(선행)을 부인한다는 점에서 '신앙만으로(sola fide)',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구원의 소식(방법)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성서만으로(sola scriptura)' 가능하다는 원리 위에 세워지게 된다. 

칼빈과 웨슬리 역시 루터의 칭의 원리에 대해 이견을 갖지 않는다. 다만 구원론적 관점이 칼빈은 구원자 하나님에 대해 집중하므로 '하나님 중심'의 구원론을, 웨슬리는 구원의 대상인 인간에게 관심을 두어 '선행적인 은총'을 강조하는 차이점을 보인다. 이러한 차이점은 구원론의 점진적 발전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칭의와 성화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첫째, 칭의(justification)란 무엇인가? 칭의란 '하나님이 죄인인 사람을 의롭다' 하신 것이다. 칭의는 죄인을 위한 칭의(justification of the ungodly)이기 때문에, 우리의 내면적 '의'나 '행위'를 통해 얻는 의가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imputation of righteousness)됨으로 가능하다. 인간의 의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인들인 모두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것이요(penal), 그리하여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버린 대신적(substitutionary) 속죄 제사(sacrifice of atonement)이다. 따라서 인간의 공로나 선행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이다(롬 3:21-26). 

칭의는 전통적으로는 법정적으로 이해되어져 왔다. 법정적 의미는 원죄를 용서 받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해방됨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관계적 의미에서의 칭의를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는 원죄로 틀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잡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개념은 어느 하나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칭의는 법정적이든 관계적이든 전적으로 그리스도로 인한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 다만 그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인간의 믿음이 필요하지만, 그 믿음 자체도 인간의 선행이 아니며,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의가 될 수 없다고 루터는 강조한다. 웨슬리도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하면서, 칭의는 성화를 수반해야 온전하다고 덧붙인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칭의와 성화의 이중 사업의 완성으로 보기 때문이다. 

둘째, 성화(sanctification)란 무엇인가? 종교개혁 이후에 교회는 구원에 있어서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루터는 칭의된 의인은 성도이며 동시에 죄인으로서 계속 겸손하게 하나님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함을 말하면서, 칭의를 사죄의 본질로 보고 성화는 삶의 혁신으로 강조 한다. 웨슬리는 성화란 죄인을 순결하게 하시며 죄인의 전 인격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하여 선행하도록 하시는 성령의 계속적이고 은혜로운 작용이라 본다. 

웨슬리는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는데 그치지 않고(칭의), 실제로 변화를 받는 것이라(성화/성결)고 강조 하는데, 전자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는 사역이라면, 후자는 성령으로 인간 안에 역사하시는 사역이다. 인간이 그리스도의 속죄 행위를 통해서 무죄 선언을 받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된 것을 칭의로 표현하고, 성화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지칭하여 사용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셋째, 칭의와 성화의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는 것은 종교개혁의 아름다운 전통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성화는 칭의의 다른 표현이라고 하므로,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답습한 듯한 주장들이 제기되어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칭의론은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받는 무죄선언 되어, 의인된 자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거룩한 삶(성화)을 유지해야 한다고 함으로 웨슬리의 입장과 유사함을 보이고 있다. 

구원은 칭의에 머물지 않고 성결(성화)의 자리로 나가는 것이다. 칭의는 이미 얻은 구원뿐만 아니라 그 구원을 이루어 가는 과정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성화는 이 땅에서도 이룰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인해 의롭게 된 자는(칭의), 날마다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역동적인 구원의 삶(성화)을 살아가야 한다. 

결론적으로 구원은 '칭의'와 '성화'의 어느 한 부분만을 지칭 하는 것이 아니라, 전(全)과정을 통해 완성됨을 보여 준다. 또한 구원이란 중생, 칭의, 성화, 영화 같은 하나의 order(순서 혹은 과정)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칭의된 신앙인은 의롭다함에 머물지 않고, 성결의 자리(성화)에 나아가야 한다. 성화는 칭의의 조건이나 근거가 아님을 확실히 해야 한다. 

종교개혁은 의롭게 되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며, 믿음역시 선행이나 공로가 되지 못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루터나 웨슬리는 '이신칭의'를 강조했고, 행위를 통한 구원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반대했다. 이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은 성화의 자리에 나가야 한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 교회는 칭의와 성화에 대한 균형 잡힌 강조를 통해 죄를 단호히 거부하고 거룩한 삶의 자리(성결)에 이르도록 힘써야 한다. 어느 시대든 성경의 교리로 인해 교회가 비난받은 적은 많지 않다. 다만 그리스도인의 비윤리적인 삶 때문에 비난 받은 것이다. 이 시대에 조국교회에 새로운 개혁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성화를 향한 몸부림일 것이다.

종교개혁 500주년 세미나 윤형식 목사
▲윤형식 목사가 3월 송현교회 종교개혁 세미나에서 설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