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제20대 4.13 총선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선거일이 다가오지만 사람들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뭔가 시큰둥하다. 왜 그럴까? 정치에 대한 실망 때문이다. 기대하고 뽑았더니 별로 달라지는 게 없는 경제 현실 때문이다. 정치에 실망한 사람들은 냉담하게 말한다. '찍을 정당이나 후보가 없다.' '뭐가 바뀌겠어!' '뽑을 인물이 없어.' 얼마든지 공감이 가는 말이다. 정치에 실망한 국민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간다. 그러나 그건 큰 오산이다. 무책임한 말이다.

아무리 일꾼이 없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맘에 가는 정당이 없다손 치더라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리 달라지지 않는 정치 판국이고, 경제 현실이라고 할지라도 그래도 내팽개칠 순 없다.

달리 생각해 보자.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고, 좋은 엄마가 되고 싶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두셋밖에 안 되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인정받는 것도 쉽지 않은데, 자기 이익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변덕스러운 국민들의 마음을 맞춘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한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기 위해 사업을 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직장생활을 성공적으로 잘해 나가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런데 '내 마음에 쏙 드는' 정치인·정당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세계 경제가 휘청하고 있다. 우리 정치인들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그들이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기도하면 된다. 응원하고 채찍질하면 된다. 그러나 포기하는 것은 방법이 아니다.

내 마음에 쏙 드는 일꾼이 없다면 차선이라도 선택해야 한다. 세상은 반드시 최선으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때로는 차선이 최선보다 더 좋은 결과를 도출할 때도 있다. 차선이라도 내가 포기한다면 세상은 달라질 수 없다. 세상이 정말로 달라지길 원한다면 그래도 차선이라도 선택해야 한다.

'나 하나 포기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부득이하게 일이 있어서!' 이런저런 핑계를 둘러대고 투표를 포기한다면 우리가 기대하는 차선도 사라진다. 이 나라를 생각하고, 이 나라에 발을 딛고 산다면, 국민의 의무요 특권인 선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이 '나 하나쯤'이라고 하찮게 여긴다 해서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나 하나라도' 참여해야 뭐가 달라질 기미가 보인다. 변화는 아주 사소한 것,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느 할아버지가 미 대륙을 걸어서 횡단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그것도 걸어서 대륙을 횡단했다니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끌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대륙을 횡단하기로 결심하신 이유가 뭐에요?"

그런데 할아버지의 대답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손자가 사 준 신발이 무척 예뻐서 자랑하고 싶어 걷기 시작했어. 다른 할아버지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걷다 보니 이렇게 되었어." 손자가 사준 신발이 예뻤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틈엔가 미대륙 일주라는 거대한 일이 이루어졌다. 아주 하찮은 것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

'1%의 힘'이라는 말이 있다.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 99.9999도가 되어도 끓지 않는다. 학생들은 수능에서 1문제, 총점 0.1점 차이로 합격 여부가 갈린다. 스피드스케이팅에서는 0.1초 차이로 우승자가 갈린다. 벽돌 한 장의 여부로 건물이 견고히 설 수 있고 무너질 수 있다. 더욱이 우주를 향해 발사된 우주선은 초미세한 차이로 대형 참사가 일어날 수 있다. 그 극미세 차이는 우주선을 정확히 달에 착륙시킬 수도 있고, 아니면 영원한 우주 미아로 만들 수도 있다. 정확도는 보이지 않는 생명이다.

이번 선거에서 내가 행사하는 한 표는 너무 작아서 표시도 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포기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지혜롭고 신중하게 일꾼을 살피고 던지는 한 표 한 표가 성공적인 선거를 가져오고, 이 민족을 이끌어갈 대표자를 세울 수 있다.

그러니 이렇게 소중한 한 표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은 국민의 자격이 없다. 정치를 잘하느니 못하느니 말할 자격이 없다. 일단 내가 해야 할 국민의 의무는 감당해 놓고, 정치인들에게 돌을 던지든지 기도를 하든지 쓴소리를 하든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아주 '중대한 일'을 하찮게 여겨 큰 낭패를 경험한다. 크고 중대한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은 자기 인생을 파멸로 이끌고 있다. 공부해야 할 학생이 공부를 내팽개친다면, 앞날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사업을 하는 사람이 열심히 뛰고 고민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어려운 시대에 사업장을 세워나갈 수 있겠는가? 정신없이 뛰어도 어려운 판국에. 중대한 일을 대수롭지 않게 간주하고선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한 영혼을 건지는 전도는 매우 중요하다. 내가 전도하는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하니까. 내가 하는 전도를 통해 하나님나라의 비전이 이루어지니까. 그렇기에 영적인 사람들은 결코 한 영혼을 그리스도의 품으로 인도하는 것을 하찮게 여기지 않는다.

일상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그리스도인의 생명줄이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 주님의 마음을 알아가게 된다. 낙심된 마음이 회복되기도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경험을 한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힘이다. 그런데 이걸 하찮게 여긴다면, 그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한편 우리 주변에는 '하찮게 보이는 작은 일'을 '큰 일'처럼 진지하고 신중하고 철저하게 처리해 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작은 일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세상을 정복한다. 남보다 10~20분 일찍 나가서 청소를 해 놓는 것, 다른 직원들을 위해 커피 한 잔 서빙하는 것,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점심 한 끼 사주면서 마음에 있는 고민과 아픔을 들어주는 것.

사소하고 작은 일이지만, 그런 것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사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은 그렇게 바뀌는 것 아닐까?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그야말로 앞으로 멋진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게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의 힘을 말씀하신 바가 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게다. 자신이 십자가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으심으로 온 인류를 구원함으로 그 말씀을 증명해 주셨다. 이 세상은 지금 썩고 죽을 한 사람을 찾고 있다. 그게 바로 나이면 어떨까?